1. 개요
구한말의 급진개화파 출신의 정치가, 군인, 관료
급진개화파이지만 고영희, 박중양, 이규완 등과 달리 한일 강제 병합에 반대했고 이완용, 송병준 등의 친일반민족행위자들에 의해 고종이 강제로 폐위되자 박영효, 남정철과 고종에게 폐위를 압박한 대신들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발각되어 실패했다. 이후에는 친일파로 전향했던 박영효, 남정철과 달리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향하지 않은 채 1907년에 총리대신 이완용의 모함으로 박영효와 함께 나문정죄(拿問定罪) 당하여 1909년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생애
1848년 한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이명익(李溟翼)의 아들로 태어나, 이후 증 우의정 이건익(李健翼)에게 입양되었다. 젊을 때에는 강위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무예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한다. 1879년(고종 16) 식년 생원시에 3등 45위로 입격하였고, 33세가 되던 1880년 음서로 무관직에 천거되어 관직에 나아갔다. 2년 후인 1882년(고종 19)에는 생원으로 별시 문과에 병과 14위로 급제하여, 홍문관 부수찬(副修撰, 종6품)에 제수되었다.
1883년, 경상좌도 암행어사로 나가 당시 수령에 의해 누명에 씌어져 살해, 수탈, 고문 등의 피해를 받던 백성들을 구제해 백성들이 고마운 마음으로 바위에 그의 공적을 쓴 어사암이 부산광역시 기장군에 아직까지 남아있으며, 1884년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이 갑신정변을 일으키자 진압 작전에 참전해 갑신정변을 진압했다. 이후 경상좌도암행어사, 동부승지, 참의군국사무, 이조 참의, 성균관 대사성 등을 지냈다. 1886년 호군에 재직중 사대당에 의해 고금도로 귀양을 갔고, 1894년 개화당(급진개화파) 정부가 수립되며 풀려났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전라도 관찰사로 파견되어 김개남을 생포해 전주 초록바위 위에서 처형하고 전봉준을 생포하여 동학 농민 운동 진압에 공을 세웠다.
전라도 관찰사로 재직하면서 과거 유배 생활을 하던 시절 보았던 섬사람들의 고충을 기억해 전라도 서남해안 일대의 섬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행정구역을 만들어줄 것을 조정에 상소하였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1896년 2월 13일, 칙령 제13호 《전주부, 나주부, 남원부의 여러 섬을 나누어 완도·돌산·지도 3군을 두는 안건 》이 공포되어 전라도 서남해안 일대의 섬들을 관할하는 완도군, 돌산군, 지도군의 3개 군이 신설되었다. 즉 이 조치는 행정구역 신설이라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천년 동안 억압받던 섬사람들의 공동체가 탄생한 것이다. 돌산군과 지도군은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폐지되어 역사속으로 사라졌지만 완도군은 현재까지도 남아있고, 이에 완도 사람들은 고금도에 이도재를 기리는 영세불망비를 세웠다.
군부대신, 학부대신 등을 역임했지만 단발령이 내려지자 상소를 올리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 다시 철도원 총재, 학부대신, 내부대신 등을 역임했다. 1904년 일본이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사람들을 모아 농광회사를 설립하고 '황무지 개척은 일본인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우리 손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06년 8월 그동안의 공적으로 훈2등 태극장(太極章)을 서훈받았고, 동년 10월 궁내부특진관, 장례원경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1907년 4월 훈2등 팔괘장(八卦章)을 서훈받았고, 동년 6월 수학원장, 궁내부특진관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동년 7월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의 퇴위에 대해 논의하기 위하여 어전회의가 개회되자 질병을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고, 이완용 내각에 의해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하자 박영효, 남정철 등과 평양에서 올라온 시위대 제2연대의 지원을 통해 7월 20일, 고종의 양위식 날 이완용을 비롯한 고종의 양위를 결정한 관료들을 전부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발각됐고 결국 체포되었다. 이후 다시 시종원경에 임명되었으나, 조중응이 고종의 양위식에 이도재가 질병 등의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벌할 것을 아뢰어 탄핵을 받았고, 1909년 9월 25일에 사망하였다. 이에 순종이 몹시 애통해하며 장례 물품을 지원해주었다.
3. 여담
현재 육군박물관에서 부장 이도재 예복을 보관 및 전시 중인데 국가등록문화재 제 553호로 1897~1907년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대한제국의 예복이다. 이 예복은 운정 이도재가 입었던 것으로 대한제국의 예복이라는 상징적인 가치 뿐만이 아니라 보존 상태, 디자인, 색상 등 보존 상태가 뛰어나 보존 가치가 더욱 높다.
전라남도 관찰사 재직 중이던 1906년 6월 19일, 조정의 명령으로 전라북도 순창군에 주둔한 최익현의 의병진을 진압하기 위해 광주군에 주둔한 대한제국군 진위대를 파견한 바 있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군대를 파견할 당시 순창군 경내에 주둔만 하고 의병과 교전을 일절 하지 말라고 칙령을 내렸고, 혹시라도 교전을 한다면 승리를 거둔다한들 참형에 처할 것이라고 엄하게 단속해두었기에 광주군에서 파견된 진위대는 최익현 의병진과 교전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도재의 강직함을 엿볼 수 있는 일화이다.매천야록 제5권 崔益鉉의 被執
2016년 완도군 설군 120주년 기념축제가 열렸다지만 정작 이도재공에 대한 업적조차 공개가 없다며 아쉬워하는 완도지역 지역신문의 기사도 나왔다. 또한 1896년 돌산군 설군 덕분에 1897년 5월 16일 여수군 설군의 시발점으로 만든 인물로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에도 이도재 영세불망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