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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인물

이발(李潑)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22|조회수20 목록 댓글 0

1. 개요

이발(李潑, 1544~1589)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자는 경함(景涵), 호는 동암(東菴)이다. 학문과 문장에 능하여 경연에서 왕도정치를 강조하였으며, 이조전랑, 부제학, 대사간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세종조에 병조판서를 지낸 성주 이씨 이발(李潑, ?~1426)과는 동명이인이다.

동인 강경파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였으나, 1589년(선조 22년)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국문을 받던 중 옥사하였으며, 가문이 멸문지화를 겪었다. 이후 여러 차례 신원이 시도되었고, 1624년(인조 2년) 그의 관직이 복권되었으며, 1694년(숙종 20년)에는 그의 절개를 기리는 정문이 세워졌다.

호는 동암(東菴)이며, 조선 정치사에서 동인과 서인의 갈등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2. 생애

호남의 명문가 광산 이씨 집안 출신으로 전라도 광주목 대촌면 유등곡에서 출생해 최영경 등과 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1568년 과거에 급제해 관직 생활을 시작했고 부제학 등 여러 관직을 거쳐 1584년 대사간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동서 분당 사태가 일어난 때 이조전랑에 기용되어 자신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을 다수 기용하여 자연스럽게 동인의 지도자가 되었다. 동인이었지만 후일에 서인의 거두로 추증되는 이이를 무척이나 존경하여 이이와의 사이가 각별했다. 이이는 이발과 정철을 불러 손을 맞잡게 하고 화해를 주선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서 분당의 감정의 골은 두 사람의 표면적 화해 정도로 끝날 수준이 아니었고 동인 중에서도 최고 강경파인 정인홍이 이발, 이이와 함께 심의겸을 탄핵하는 과정에서 "이게 다 서인 놈들이 소인배라 그렇다"라는 말을 멋대로 하는 바람에 선조가 분노하고 이이도 분격하는 사태가 벌어져 이에 책임을 지고 이이, 정철, 정인홍 등이 모조리 사직해 버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본인 역시 동인 중에서도 강경파인 인물이라 심의겸뿐 아니라 박순, 송익필, 이항복을 탄핵했고 이는 자신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1589년 정여립을 만난 아우 이길(李洁)이 급히 편지를 보내 이발과 상의하여 정여립을 처치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서인측이 이발 형제가 정여립을 고변하기 이전에 먼저 정여립의 역모를 고하였고 이발은 동생의 편지를 보고 달려가 삼례역(參禮驛)에 이르러서야 역모 소식을 듣게되어 조기에 정여립을 처리하려는 계획이 실패하고 만다. 정여립의 난이 일어난 이후 양천회가 상소하여 이발, 이길, 김우옹, 백유양, 정언신, 최영경 등을 정여립과 절친한 조신으로 고발하면서 연루된다. 양천회는 이발 형제가 남도를 왕래하며 정여립과 공모하였으며, 정여립을 존경하여 그를 천거한 한 세력으로 지목했다. 이어 예조정랑 백유함도 이발, 이길 형제를 정여립의 세력으로 고발하면서 선조가 즉시 종성군으로 귀양을 보낸다.

그러다가 정즙, 선홍복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이발, 이길, 백유양, 유덕수 등이 한패였다고 고변하면서 하옥하여 국문을 받게 된다. 이발은 유배지로 끌려가다가 다시 하옥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는데,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같이 갇혀 있던 이정란에게 "내가 눈이 있으면서 사람을 알지 못하였다. 그대는 죽음을 면하게 될 것이니 모름지기 칼로 내 눈을 뽑아버리라. (...) "내가 조헌의 말을 듣지 아니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음을 후회한다."라고 한탄하였다. 결국 이발은 모진 고문을 받다 사망하게 되었고 그의 형제 이길, 이급도 연이어 죽었는데 정철이 이길은 살려주자고 주장했으나 별 수를 쓰지 못했다. 널리 알려진 일이지만, 선조실록에 따르면 선홍복은 형장에 끌려가 "가서(家書)와 버선 안의 글에 이발·이길·백유양 등을 끌어 대면 살려 주겠다 하고 어찌 도리어 죽이려 하느냐?"라고 울부짖었고, 선조실록은 이를 대놓고 정철의 소행이라고 지목하고 있다. 하지만 인조 2년에 정철의 자식들인 정종명, 정홍명 형제는 오히려 정철은 선조의 과한 옥사에 대해서 정철이 어떻게 정여립이 둘이나 있을 수 있겠느냐고 말렸으며 이발의 가족들이 몰살당했을 때 정철은 이미 위관에서 해임된 후였다고 항변했다. 광해군 즉위년에 성혼의 제자 광주 목사 신응구도 정철이 성혼과 의논하여 사대부들을 구하려고 했으나 위관에서 체직된 후라서 그러지 못했다는 내용의 진술을 하였다.

이발, 이길 형제가 죽은 후 82세의 노모 윤씨와 아내, 8살 난 아들도 모조리 끌려와 심문을 받았다. 이발의 80세 노모는 맞아 죽었고 이발의 어린 아들들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압슬형을 받다가 사망했다. 아무리 봐도 선조는 이발의 가문이 세도정치할 가문이라는 생각으로 착각에 빠지고 있었다. 선조는 유독 이발을 증오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어쩌다가 신하들이 이발과 이길의 죽음이 원통한 죽음이었다고 언급하면 화를 내며 ‘역적을 토벌하는 데 있어서는 마땅히 그의 무리를 엄하게 해야 한다. 정여립(鄭汝立)이 어느 곳에서 나왔는가.’ 하였기 때문에 신하들은 이발을 복권을 선조에게 언급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한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따르면 정여립의 난이 일어나자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이발이 관직을 그만두고 교외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다가 잡혀와 국문을 받았는데 선조가 “너는 어찌 벼슬을 하지 않고 시골에 갔느냐고 질문하자 “신의 노모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형 급(汲)이 정읍 현감이 되어 모친을 봉양할 수 있도록 성상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아우 길도 이미 올라왔고, 신도 역시 올라왔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선조가 너는 네 죄를 아느냐 질문하였고 이발이 자신의 낯가죽을 벗겨버리고 싶습니다라고 답변하자 선조가 이미 때가 늦었다며 이발을 비웃었다고 한다.

그 외로도 정언신, 김우옹, 백유양, 정개청, 최영경도 역시 모반 참여 혐의와 왕권에 방해되는 예비 권간으로 지목당하면서 유배를 가거나 죽임을 당했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 이발 형제에 대한 신원 요청이 제기되었으나, 광해군은 선조의 결정을 즉위하자마자 뒤집을 수 없다는 이유로 후일에 처리하겠다고 하였다. 이후 인조 2년(1624년) 5월 29일, 인조는 이발과 이길 일가의 몰살과 관련하여 정철에게 죄가 없다고 판정하고 그의 관작을 회복시켰다. 동시에 이발의 가산을 적몰한 것이 지나쳤음을 인정하고, 같은 해 7월 3일 이발, 이길, 정개청 등의 직첩을 돌려주며 그들을 완전히 복권시켰다. 이후 숙종 20년(1694년) 3월 4일에는 이발이 이조참판으로 증직되었으며,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정려가 내려지고 강진의 수암서원에 제향 되었다.

조정과 서인들의 결론과는 별개로 정철과 워낙 앙숙지간이었던 탓에 동인계열 사람들은 정철이 자기 원한을 풀기 위해 이발과 이발의 일가를 처참하게 몰살시켰다고 보았다. 이발의 가족이 모조리 잡혀가기 직전에 이발은 자신의 아들과 종의 아들의 옷을 바꿔 입혀서 아들 하나는 살아남게 했다 한다. 그래서 이발의 가계가 겨우 이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발의 후손들은 제사를 지낼 때 고기를 다지며 "정철정철정철..."이라고 중얼대는데 정철에 대한 원한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하지만 정작 정철은 이발의 죽음에 관여한 바가 없는데 '역모죄는 법에 구애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죄 없는 가족들까지 수사하여 죽게 만든 것은 선조 본인의 의지였다. 오히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이발의 동생 이길이 연루되어 사형에 처하게 되었을 때 정철이 선조를 찾아가 만류하였으나 선조가 이에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3. 여담

KBS 한국사전에서 정철을 다룰 때, 이발의 가문인 광산 이씨 종가를 찾아가서 이 의식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집안에 시집 온 한 여성과 인터뷰를 했는데, 그 여성 역시 이 주문의 내력을 알고 있었고, 주문에 대해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오늘날까지도 이럴까"라는 감상을 말했다.

야사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이발의 방계 집안에 어쩌다가 정철의 방계 집안 출신 며느리가 시집왔는데, 집안 여자들이 '정철정철정철...' 거리며 고기를 다지는 것을 이 며느리도 멋모르고 따라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를 보다 못한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직접 '아가, 너는 그거 따라하지 마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는 믿지 못할 이야기인 게, 당파가 다른 집안끼리 통혼하지 않는 것은 양반 사회에서 기본이었다. 하물며 철천지원수의 가문과 혼인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고기를 다지면서도 정철정철거릴 정도로 옛 원한을 잊지 못하면서 통혼을 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이발의 처조카로 윤선도가 있다고 위키백과와 해남우리신문에 써져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위키백과에서는 이발이 윤선도의 고모부라는 글에 대해서 출처 필요라고 써서 확실하지 않다는 뜻으로 썼으며, 해남우리신문에서는 이발이 윤선도의 고모부라는 글에 대해서 "고산 윤선도의 고모부였다는 이야기도 있다."라고 써서 둘 다 윤선도의 고모부가 이발임이 확실하지 않다는 뜻으로 썼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발은 윤선도의 할아버지 윤의중의 사위가 아니라 박이(朴苡)의 사위므로 윤선도의 고모부일 수가 없다.

동인 강경파의 영수 였지만 이이를 존경해 그의 문하를 자칭하기도 했기 때문에 이이의 제자이자 서인 강경파인 조헌과 절친한 사이였다 수정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조헌이 이발에게 정여립과 절교할 것을 권했지만 무시 했기 때문에 옥중에서 조헌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을 후회하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고 한다. 기축옥사가 일어나 이발의 집안이 화를 입자 조헌이 이발의 노모인 윤씨를 찾아가 뵙기도 했다. 이발의 집안이 언급되는 일이 있으면 조헌이 매우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구한말에도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독립운동가 이동휘의 부친이자 자신도 독립운동가였던 이발이다. 원래 이름은 이승교였으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이름을 바꿨다. 중국에서 독립운동 단체일을 하다가 한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난 걸 알게 되자, 경성으로 와서 같은 해 5월 1일에 무려 69세의 나이로 노인동맹단 경성만세운동을 벌였다. 당시 45살이면 할아버지라 불리고, 60살이면 생을 마감할 준비를 하던 사회분위기에서는 정말 충격적이었던 일이었다. 본관이 달라서 조상관계는 아니다. 또한 이 항목의 이발은 물수변이 있는, 활발하다라고 할 때의 발이지만, 이동휘의 부친 이발은 거기서 물수 부수자를 뺀, 출발하다라고 할 때의 發이다.

이발의 막내동생인 이직(李溭)은 기촉옥사가 일어나기 이전에 죽었기 때문에 형들인 이급 이발 이길등과 다르게 고문을 받지 않고 자연사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직을 가리켜 길인(吉人)이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따르면 일찍이 송상(宋祥)이라는 점쟁이가 말하기를, “위로 세 형은 극히 흉하고 이직은 가장 길하다.” 하였는데, 뒷날 이직은 이름을 못 이루고 일찍 죽고, 이발과 이길은 명사가 되고 이급도 음관(蔭官)으로 벼슬에 올랐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송상의 말이 허망하다 하였으나, 먼저 죽은 이직을 제외한 이발 형제가 고문을 받고 죽자 모두 탄복하였다고 한다.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따르면 이발은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한다. 어머니가 평소에 병이 많았으므로 이발은 옷과 띠를 풀지 아니하고 약 달이는 것도 종들에게 맡기지 않았다고 한다. 기촉옥사가 일어나고 옥에 갇힌 이발은 자기옷 앞섶에 혈서로 쓰기를 역적과 사귀었다가 화가 늙은 어머니에게 미쳤다며 남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니 땅이 검고 하늘이 푸르도다.”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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