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선의 문신.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희강(希剛), 호는 금헌(琴軒), 시호는 정도(貞度)이다.
성종대에 임용되어 연산군대를 거쳐 중종대까지 관직 생활을 하였다.
2. 생애
1492년 4월 1일 무재가 있는 장수를 뽑는 일을 논하던 중에 유자광이 19살 나이에 강궁(強弓)을 잘 당기고 용모가 뛰어난 사람이 있다고 하며 이장곤을 천거하여 성종 앞에서 직접 활을 당기고 시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1495년 생원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1504년 이극균에게 사사로운 일로 천거를 받은 적이 있다는 이유로 연산군의 의심을 받아 옥사를 겪고 고문을 당했다. 이장곤은 활쏘기 시험에서 여러 차례 수석을 차지해서 천거를 받았다고 변명했지만 더 심하게 고문을 당했다.
이후 남해로 유배되었지만 탈출하여 행적을 감추었는데 나중에 중종반정 때의 기록에 보면 연산군이 이장곤이 반란을 일으킬까 의심해서 잡아 죽이려 했기 때문에 도망쳤다고 되어 있다. 이장곤이 도망치자 연산군은 이장곤의 형인 이장길에게 연좌제를 적용하여 잡아오도록 명령했다. 만약 잡아올 경우 남해 현감을 벌주고 이장곤의 흉악함을 비난하는 어제시를 내리며 이장곤을 잡아들이는 자는 죄인이라도 죄를 면하게 해주겠다고 하였다. 이장곤은 모습을 감추었지만 무용과 계략이 뛰어난 사람이라 잡혀 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 저잣거리에 파다하게 퍼졌으며 이장곤이 무리를 모아 거병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는데 이런 소문이 중종반정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는데, 실제로 반정을 준비하던 세력들이 이장곤이 손을 쓰기 전에 먼저 거병하기 위해 서둘렀기 때문이었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축출당하자 조정에 복귀하여 벼슬을 했다. 내직으로는 예조좌랑, 동부승지, 병조참의, 이조참판, 예조참판, 대사헌, 형조판서, 이조판서, 병조판서, 우참찬, 우찬성, 좌찬성, 판돈녕부사, 외직으로는 평안도 절도사, 평안도 관찰사, 전라도 관찰사, 함경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예조참판 때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조광조 등의 사림과 가깝게 지냈으나 기묘사화에 연루되지는 않았다. 조광조를 심문할 때 심문관으로 참석하였으나 이후 조광조를 사사하는 것에는 반대하는 등의 모습을 보면 숙청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지는 않은 것으로 추정한다. 심문할 당시 조광조는 크게 배신감을 가졌는지 술에 취해서는 "희강(希剛, 이장곤의 자) 이 사람아! 나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못난 사람 같으니."라며 반말을 하며 대청에 오르려 한 통에 김전 등이 사람을 시켜 붙잡게 했다고 한다. 기묘사화로 사림이 몰락한 뒤인 1520년에 병을 핑계로 체직해 은퇴했다.
사망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중종실록 28년(1533년) 12월 15일에 이장곤이 반신 불수라는 언급이 나오고, 33년(1538년) 4월 12일 기사에 직첩을 환수당한 이후 사망한 사람들에게 직첩을 돌려주는 명단에 언급되어, 이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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