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대한제국의 제23·25·29·31대 내부대신
구한말의 국권상실 당시 대표적인 매국노 중 가장 악질이지만, 원흉격인 이완용은 물론 을사오적도 아닌 송병준보다는 덜 알려진 인물이다.
2. 생애
전주 이씨 왕족으로 흥선대원군의 형인 흥인군의 양손자이다. 원래는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의 17대손이다. 광흥령 이희하의 친아들이었으나 1881년 사망한 흥인군의 아들 이재긍의 양자로 들어갔다. 이로 인해 고종과는 사실상 5촌 당숙부와 당질의 관계가 된다. 본래 이름은 '이용구(李龍驅)'였다가 이재긍의 양자가 되면서 '이은용(李垠鎔)'으로 바꿨고 1900년 8월에 고종이 4살 난 3황자 이름을 '이은(李垠)'으로 짓자 피휘를 위해 '이지용(李址鎔)'으로 재개명하였다.
1887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1895년 칙명을 받아 일본을 유람하고 돌아왔으며 경상도감찰사, 황해도감찰사를 거쳐 궁내부 협판을 역임하다가 궁내부(宮內部), 법부(法部), 경부(警部)대신 서리를 맡고 1901년 주일 공사를 지냈다. 1903년 10월 무렵부터 일본 측과 협상하여 대한제국이 일본을 돕도록 하는데 힘썼으며 1904년 2월 외부대신(현 외교부장관)으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로부터 1만엔을 받고 한일의정서에 서명했다.
1905년 내부대신(현 행정안전부장관)으로 을사조약에 동조하는 5대 매국노의 일원이 되었고, 병합 후 백작 작위를 얻었다. 그는 자신의 행위를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항복한 지천 최명길에 비유하며 정당화하려 했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 후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백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으며 그 후 이지용은 나라를 판 돈으로 도박에 올인했다고 한다.
"일본에게 속았다."
유언
사망하기 직전에야 자신이 일본에게 보기 좋게 낚였음을 뇌까렸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다만 이 후회가 '동아공영론'에 낚였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매국노까지 되어 얻은 돈마저 도박으로 모두 탕진해버린 자신의 단순한 신세 한탄인지는 논란이 있다.
3. 후손
슬하에 이해충과 이해문 두 아들을 낳았다. 장남 이해충은 세 아들(이경주, 이문주, 이홍주)을 두고도 그들의 본가인 광평대군파에서 항렬이 맞는 아이를 데려다 입양해 후계자로 삼았는데 그가 이영주이다. 이해충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이영주는 이지용 사후 흥인군계의 종손으로 이지용이 가지고 있던 조선귀족 백작 작위를 물려받았고 열심히 친일 행위를 했다. 8.15 광복 후 반민특위에게서 소환장을 받았고 1955년 4월에 사망한 것 빼곤 알려져 있지 않다. 이지용의 둘째 아들 이해문은 형처럼 세 아들(이해주, 이석주, 이철주)을 두었다. 이 외에는 정보가 없다.
4. 기타
구한말 '산홍'이라는 기생에게 첩이 되어달라고 구애했지만, "역적의 첩이 될 수 없다."라며 거절당하는 굴욕을 당했다.
대한제국의 매국노 중 최연소이다. 경술국치 시점에선 40세였으므로, 윤덕영(37세)이 최연소지만, 본인이 직접 매국노로 활약한 〈제2차 한일협약〉 체결 당시에는 35세였다. 이는 본인이 고종과 혈통상 가까운 왕족으로 입양되었기 때문에 그 나이에 대신으로 올라가서 가능했던 일이다.
1933년 11월 잡지 《별건곤》에 이지용과 그의 가족들에 대해 대략적으로 정리한 기사가 실렸다. 이에 따르면, 이지용의 생가 지위가 양가보다 더 높았지만, 흥선대원군의 형이면서도 대립했던 흥인군의 손자로 입양됨에 따라 정치적 입지가 애매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민씨 세력과의 친분 덕분에 고종과 순헌황귀비의 신임을 얻었고, 내무대신까지 올라 막대한 이권을 챙겼다. 그의 재산은 서울 금융시장을 뒤흔들 정도였으며, 원동에 300여 칸의 대저택을 지으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렸다고 한다. 하지만, 도박에 빠져 재산을 탕진했고, 경술국치 후 예산으로 낙향했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와 중추원 고문직을 맡아 여생을 보냈으며, 결국 아들도, 손자도 없이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이지용이 죽고 가문이 몰락하여, 과부가 된 이지용의 부인과 며느리가 왕실 지원금과 창복회(彰福會)에서 나오는 생활비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데, 이지용 부인의 헤픈 씀씀이로 경제적 어려움이 계속되며, 가족 간 갈등도 끊이지 않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결국, 나라를 판 대가로 권세와 부를 누리며 호화롭게 살았지만, 부패와 방탕한 생활로 인해 남은 것은 쇠락한 가문과 끝없는 다툼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