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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인물

홍윤성(洪允成)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13|조회수50 목록 댓글 0

1. 개요

조선 세조 때의 문신, 정치가, 군인

집채만한 바위를 드는 용력과 술을 동이째 거푸 비우는 호방함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문과 급제까지 한 문무 겸전이었다. 한명회의 측근으로서 계유정난 때 공신으로 출세해 세조 즉위 때 공으로 좌익공신에 올랐고 예조판서를 거쳐 이시애의 난 때 우의정, 영의정까지 지낸 세조의 총신이었다. 입버릇처럼 자신이 주상의 벗이라 말해도 왕이 허물하지 않고, 조선 법도로는 말도 안 될 중혼을 해 정실을 둘이나 두고도 세조가 웃어 넘겼다고 한다. 인산부원군에 올라 위평공의 시호가 내려졌다.

그러나 평소 안하무인의 태도로 지위남용과 주색, 토색질 및 살인으로 크게 인심을 잃었으며, 악명 때문에 죽어서도 욕을 들었다. 직계는 물론 방계에도 후손이 없으며 봉사손 역시 없었다.

2. 생애

2.1. 초기

1425년(세종 7년) 충청도 평택현(현 경기도 평택시)에서 홍제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증조부는 홍연보(洪延甫), 조부는 홍용(洪容), 부친은 홍제년(洪齊年)이며, 형으로 홍대성이 있었다. 초명은 우성(禹成), 자는 수옹(守翁)으로, 후에 이름을 윤성으로 고쳤다.

1450년(문종 1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종6품 사복시 주부에 임명되었다. 사복시는 비교적 한직으로 여겨졌으며, 이후 한성참군 등을 지내며 관직 생활을 이어갔다. 이 시기 수양대군과 가까워지면서 정치적으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수양대군이 반란 참여 의사를 타진하자 홍윤성은 “장부라면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죽는다”고 하며 가담 의사를 밝혔다고 전한다. 계유정난 당일에는 무사들의 호응이 예상보다 미약하자 결단을 망설이던 수양대군에게 결행을 독려하며 거사 추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공으로 계유정난 이후 2등 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인산군(仁山君)에 봉해졌다.

2.2. 악행

또 세조는 동왕 4년에 잠저에 있을 때의 사부로서 당시 가장 위망과 학식이 높고 영의정부사에 재직하고 있던 정인지를 功臣仲朔宴 중 취중에 崇佛을 비판한 일로 파직하였다. 세조 12년에 楊山君 양정은 정난·좌익 2등공신이었고 세조 원년으로부터 12년까지 함길도도절제사와 평안도도절제사로서 북변진수에 공이 있었지만, 그의 귀환을 위로하는 연회석상에서 그가 “퇴위하여 편안하게 지내라”고 한 말을 빌미로 사사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仁山君 홍윤성은 세조 12년과 13년에 강압적으로 양가의 여자를 축첩하고, 가신이 收租하면서 正兵 羅季文을 살해까지 하였지만 주의를 받는데 그쳤다.

-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3. 왕권의 재확립과 제도의 완성 > 2) 세조의 왕권강화와 정치

하지만 홍윤성은 권세를 휘두르며 세간의 비난과 손가락질에도 불구하고 행패를 부렸고, 남이 베풀어준 호의는 아랑곳 않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패악질을 해댔다. 집 앞에 말을 타고 가는 것조차 용납하지 못해, 반드시 감시해 말 타고 지나가는 이를 두들겨 패 죽이게 했다. 참고로 홍윤성의 신분으로 보아 당시 홍윤성은 한양에서 살던 게 확실시되는데, 당시 한양도성 내에서 말을 타고 다닐 수 있는 사람은 양반밖에 없었다. 즉 같은 양반들에게도 패악질을 저지를 만큼 막나갔다는 것이다.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이고 논밭을 탈취해서, 야사에서는 홍윤성을 아예 살인마 정승이라 불렀을 정도.

대표적인 일화로 홍윤성이 정승에 오른 뒤, 고향 유향소에서는 이를 축하하는 뜻에서 노비 두 명을 선물로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홍윤성은 노비들의 체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선발을 담당한 나계문을 붙잡아 심하게 구타했고, 나계문이 평생 가꿔 온 나무들까지 베어버리게 했다. 이후 홍윤성의 종의 남편인 김돌산이 세 명의 동조자와 함께 나계문을 발가벗겨 폭행해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전한다

아는 홍윤성의 권세를 두려워해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홍윤성의 지시에 따라 아전을 폭행한 김돌산은 건드리지 못한 채, 폭행에 가담한 종 세 명만 체포해 형식적인 조사만 진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홍윤성 집 종들이 몰려와 이들의 석방을 요구했으나 관아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나계문의 아내 윤덕녕은 억울함을 호소하며 감사에게 진정하는 등 여러 차례 구제를 요청했으나, 오히려 옥에 갇히는 처분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노비가 주인을 역모나 강상죄 이외의 사유로 고발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소송 자체가 제한된 것은 아니었으나, 이 사건에서는 법적 문제보다는 홍윤성의 권세에 대한 두려움이 사법 처리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윤덕녕은 온양온천에서 요양 중이던 세조를 직접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했다고 한다. 이에 세조는 크게 노하여 김돌산을 능지처참에 처하고, 폭행에 가담한 종들을 참수하도록 명했다. 또한 사건을 은폐하려 한 수령과 아전들은 곤장을 친 뒤 유배 보내고, 감사 역시 파직하였다. 세조는 피해자의 아내에게 쌀 10섬을 하사하며 “지아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힘쓴 것이 가상하다”고 치하했으나, 정작 그 주범인 홍윤성 본인에게는 별다른 처벌을 내리지 않았다.

이 일화는 홍윤성이 사소한 이유로도 과격한 행동을 일삼았다는 점과 함께, 사건의 직접적 책임을 진 인물은 처벌받지 않고 하인들만 처형되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다만 홍윤성이 노비가 튼실하지 않다는 이유로 나계문을 구타한 것은 사실이나 이 일로 홍윤성이 나계문을 구타해 죽였다는 것도 야사의 일이다. 정사인 실록에 따르면 홍윤성의 권세를 등에 업은 노비 김돌산이 길에서 나계문을 마주쳤을 때, 나계문이 자신을 무례하게 대했다는 이유만으로 엄동설한에 그의 옷을 벗기고 다른 노비들을 불러 무수히 구타하여 비명횡사하게 만든 사건이다. 물론 김돌산이 나계문의 나무를 모조리 베었다는 것도 사실이며 실록을 보면 홍윤성은 나는 항상 서울에 있었으니 직접 위해를 가한 건 없다고 하였고 나계문(羅季文)의 아내 윤덕녕(尹德寧) 역시 홍윤성이 직접 나계문을 패죽었다는 고발은 하지 않았다.

홍윤성은 하루가 멀다하고 만행을 저질렀으나 그럼에도 세조는 홍윤성을 감싸고 벼슬을 자꾸 올려 주었다. 심지어 홍윤성을 어릴 때 거두어 돌보던 숙부가 홍윤성을 찾아와 벼슬 자리를 하나 부탁하자 홍윤성은 논 20마지기를 요구하여 다툼이 벌어졌고, 결국 삼촌을 때려죽이고 앞마당에 암매장했다. 벼슬을 청탁한 숙부에게도 잘못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이 시기에 청탁은 딱히 부정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홍윤성의 숙모가 원한을 품고 세조에게 탄원하였는데 "공신을 죽일 수는 없다"하여 홍윤성의 몸종들만 도륙당했다. 세조가 "이게 술 탓이니 술을 금하라"는 금주령을 내렸으나 홍윤성이 "신은 술이 없으면 죽습니다."라고 보채서 취소시켰다고 한다.

세조는 홍윤성에게 직접 경음당(鯨飮堂)이라는 호를 지어주고 도장까지 내려주었는데, 전술했듯 포악한 성격으로 밑사람을 하도 괴롭혀서 온갖 지탄을 받았으나 세조의 이러한 비호로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다. 실제로 평안도 군량미 30만 석을 혼자서 횡령했었음에도 세조가 덮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덮어주는 데에도 한계가 있기에, 하루는 술자리에서 "자중하지 않으면 숙부를 죽인 죄를 물어 극형에 처하겠다"고 꾸짖었는데 이에 홍윤성은 "주상께서는 조카를 죽이시지 않았느냐"라고 여유롭게 되받았고, 세조는 "배짱이 남다르다"며 웃고 말았다고 한다.

어느 날 홍윤성에게 전재산이던 작은 논을 빼앗긴 노파가 땅을 돌려달라며 땅문서를 가지고 홍윤성에게 찾아가자, 그대로 노파를 잡아 돌 위에 거꾸로 매달고 모난 돌로 때려 죽인 후 그 시체를 길가에 버렸다. 그 길가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가였지만 홍윤성이 두려워 아무도 그 시신을 거두지 못했다고 한다. 거기다가 홍윤성은 자기 집 근처 시냇가에서 발을 닦은 사람까지 건방지다며 때려죽였고, 판서와 부사직의 아내까지 때려죽이기까지 했다.

조선후기인 19세기의 야담집 문헌인 기문총화(記聞叢話)에도 그의 악행에 대한 야사가 전해지고 있는데, 홍윤성이 길을 걷다가 바둑을 두는 백성 둘을 보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게 무슨 일인가? 여기서 옷이 나오느냐, 밥이 나오느냐? 너희 같은 소인들은 밤낮으로 부지런히 일을 해서 제 힘으로 살아야 하거늘, 이 무익한 노닥거리는 뭣 때문에 하는가? 이것도 먹을 수 있기 때문인가?" 하고 꾸짖고는, 그들에게 바둑알을 먹였다고 한다. 어째서 민간에서 살인마 정승이라고 불리었는지 그 편린을 알 수 있는 야사다.

하루는 전림이라는 부하가 홍윤성에게 보고할 일이 있어서 찾아갔더니 홍윤성이 웬 젊고 예쁜 여인을 나무에 묶어놓고 활로 쏴 죽이려고 하고 있어 전림이 이유를 묻자 "우리집 여종인데, 한번 불렀는데 대답을 안 해서 죽이려고 한다."라고 하여 전림이 "죽이실 바에는 차라리 제게 주십시오."라고 청하자 평소 전림을 좋게 봤는지 웬일로 흔쾌히 허락하여 전림은 그 여종을 아내로 삼아 백년해로 했다고 한다.

거기다가 홍윤성은 자기 마음에 들면 양반집 딸이라도 겁박해서 강간하거나 첩으로 삼았다는데, 한 번은 홍윤성이 양주를 지나가다 길거리에서 빼어난 미인을 보고는 그녀의 아버지를 부른 후 "네 딸을 첩으로 삼을 테니 집에 돌아가자마자 술상을 차려놓고 준비해라. 지체하면 죽인다"라는 협박까지 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홍윤성이 갑옷과 투구를 쓰고 그 집으로 들이 닥쳤는데, 중문 안쪽에 숨어있던 여자는 홍윤성이 중문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뒤에서 홍윤성에게 칼을 겨누고는 "사족(양반)의 딸을 마음대로 첩으로 삼겠다고? 정식으로 아내로 삼는 거면 몰라도 첩으로 삼겠다면 당장 목숨을 끊겠다"라고 홍윤성에게 호통을 쳤고, 결국 천하의 홍윤성도 이 미녀의 절개에 굴복하여 그날로 원래 부인과 이혼하고 이 미녀를 새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다고도 하고, 위 개요 문단에 나온 것처럼 본부인과 이 여인 둘 다 정실부인으로 인정해달라고 세조에게 졸라 둘 다 정실로 인정받는 중혼을 하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웃 사람이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면 많은 재물을 아끼지 않고 상으로 주는 면모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 좋은 이야기라는 것이 실제로 미담이면 듣기만 좋아하지 실행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볼 수 있고 아첨이나 홍윤성 자신이 볼 때 좋은 이야기인 것이라면 더 논할 가치가 없다.

다만 홍윤성의 악행이 과장되었다는 반박도 있다. 대표적으로 홍윤성의 집 앞에 말을 타고 가면 죽였다는 얘기도 선조~인조 대 문신 박동량이 지은 야사 기재잡기에 나오는 일화이다. 또한 홍윤성이 숙부를 살해 했다는 이야기도 선조 대 문신 차천로가 쓴 야담집 오산설림초고에 나오는 일화로 실록에는 홍윤성이 숙부를 죽였다는 이야기는 없으며 홍윤성이 평안도 군량미 30만 석을 횡령했다는 기록은 실록이나 신빙성 있는 문헌에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홍윤성이 세조에게 조카인 단종을 죽였다고 대들었던 일화 역시 한국고전종합DB에서 홍윤성의 각종 악행을 고발하는 문헌에서도 찾을 수 없으며 아무리 홍윤성이 안하무인인 권신이라 하더라도 왕의 가장 치명적인 역린인 단종 살해를 대놓고 건드리는 것은 삼족이 멸해질 역모죄에 해당하므로 이는 현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극적인 재미를 위해 창작된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2.3. 사후

세조 사후 예종, 성종 때는 위세가 꺾이기는 했어도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만 50세에 병으로 죽었는데, 죽기 전에 의원들이 가망이 없다고 하자 의원들에게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다"라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다만 홍윤성이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 라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는 묘사는 홍윤성을 까는 실록 졸기, 야사, 야담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는 이야기 이기 때문에 홍윤성이 목숨을 구걸했다는 해당 일화는 홍윤성이 마땅한 응보를 받지 않았다면서 현대에 지어낸 일화였을 가능성이 높다.

홍윤성에게는 원래 홍진이라는 아들이 1명 있었는데, 일찍 죽었는지 홍윤성의 핏줄은 끊겼으며 결국 자손을 1명도 남기지 못했다. 봉사손도 없었는데, 회인 홍씨 가문에서도 홍윤성의 악명과 숙부를 죽인 패륜 때문에 홍윤성의 봉사손을 배출하기를 꺼린 듯하다. 홍윤성이 온갖 만행에도 불구하고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걸로 보아, 만약 세조의 치세에 홍윤성이 일찍 죽음을 맞이했다면 홍윤성의 죽음을 슬퍼했을 세조를 의식해서라도 억지로나마 회인 홍씨 중 누군가가 홍윤성의 봉사손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결국 홍윤성의 재산은 애첩이 상속받게 되었다. 그 애첩은 재산으로 풍족하게 살다가 갔으며, 홍윤성에게 제사를 단 한번도 지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홍윤성은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경둔리 정수터에 무덤에 안장되었다.

홍윤성의 악행의 업보는 사후에야 비로소 받게 되었는데, 먼저 생전에 저지른 악행이 엄청나다는 이유로 홍윤성이 쓴 글은 모조리 불태워졌으며 그나마 유일하게 남아있던 성주군 세조대왕태실비문도 세조와 홍윤성에 대해 원한을 품은 백성들이 비문을 돌로 찍고 갈면서 비문이 지워졌기 때문에 판독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다만 당시 비문의 내용 자체는 전해지고 있다.

홍윤성에게 원한을 품은 이들이 그 무덤을 찾아 비석을 훼손하고 침을 뱉었으나 이를 제지하는 사람이 없어, 성종이 공을 기리며 세운 묘비를 비롯해 기존의 석물 대부분이 사라졌다고 전한다. 정확히는 묘비문과 신도비가 심하게 마멸되어 해독이 불가능해졌고, 부인의 묘비 역시 파손된 상태였다고 한다. 이후 조정에서 죽은 사람에 대한 예를 잃었다며 다시 묘비를 세웠으나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현재 이 묘는 부여군 향토유적 제49호로 지정되어 있으나, 훼손과 모욕 행위가 이어져 한때 무덤에 오줌을 누는 사례까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2003년 3월 13일에는 묘 앞에 설치되어 있던 장명등(長明燈)이 도난당해 20년 넘게 행방불명 상태로 남아 있는 등, 홍윤성의 무덤은 오늘날까지도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3. 여담

홍윤성이 1450년 과거에 급제하기 전의 삶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데, 전설에 의하면 세종 때 충청도 회인에 살던 그의 형 홍대성은 주점을 하는 설패두의 데릴사위가 되고 자신은 군관이 되어 공주감영으로 갔고 공주감영의 토포군관(討捕軍官)까지 승진했다. 그러나 태만석의 유혹에 넘어간 형수 설씨가 병든 그의 형 홍대성을 독약으로 독살하자 그가 돌아와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독살이며 형수 설씨와 태만석이 살해했음을 밝혀내고 태만석과 설씨를 죽여 복수한다. 곧 충청도 관찰사부에까지 올라가 심문 끝에 사형은 면하여 양산으로 유배형을 받았으나 추풍령에 이르러 태만석의 아우 태만흥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 이춘달의 술청을 부수었으며 백성들의 민심을 현혹하던 양산군 통도사의 괴승 청월을 처단하고 밀양의 어느 양인 노인의 딸을 재취로 데려다 주막집 시킨다는 이춘달을 살해하고 풀어주었다는 전설도 전한다. 그 뒤 경상북도 청도에 있다가 밀양을 거쳐 충청북도 황간의 당숙의 집에까지 갔으나 공교롭게 당숙모가 원수 태만석의 누이임이 밝혀져 영동 마니산으로 다시 떠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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