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하륜(河崙)은 여말선초의 관료, 조선의 정승이다.
다소 결과론적이지만 인간지사 새옹지마, 끝까지 버틴 사람이 강한 사람이라는 말의 표본인 인생을 살았으며 그러면서도 자신의 분수를 알아 공신으로서 편안히 와석종신하고 주군의 묘정에 배향되는 등 수와 복을 누린 인물이다.
2. 생애
2.1. 고려 말, 기복이 심했던 관직 변천사
1347년(충목왕 3) 순흥부사를 지낸 아버지 하윤린(河允潾)과 어머니 진주 강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나, 정도전, 정몽주 등 신진사대부들처럼 이색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360년 국자감시에 합격하고 1365년(공민왕 14) 을사방(乙巳榜) 문과에 을과 3위로 급제한 뒤 여러 내직을 지내며 승승장구했지만 신돈의 미움을 사서 파직되었다가 복직되었다.
1365년 윤10월 흥안부원군 이인복, 첨서일직사사 이색이 주관한 과거에서는 윤소종이 장원 급제하고 하륜, 박상진(박상충의 동생), 맹희도(맹사성의 아버지) 등이 급제했다.
이후 하륜은 보문각 직제학, 성균관 대사성 등의 요직을 거치다가 최영의 요동 정벌에 반대하면서 양주로 추방되었고 위화도 회군 직후에는 이색 계열로 몰려 이성계 일파의 눈 밖에 나서 추방당했다가 복직되기도 했다.
고려사 간신 열전 이인임 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388년 우왕 14년에 임견미, 염흥방를 처형하고 이인임을 경산부(京山府)에 안치(安置)하였으며 이인임의 아우 전 평리 이인민(仁敏)은 계림(鷄林)으로 추방하여 봉졸(烽卒)로 만들었다(이인민은 태종 대 정승 이직의 아버지이다. 또한 우현보와 함께 이방원의 좌주로서, 이방원이 과거 급제한 시험을 주관하였다)
여담으로, 맏형 이인복은 동생인 이인임과 이인민의 품성에 대해서 앞날을 걱정하고 우려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인임의 서자인 대호군 이헌과, 이인임의 서사위 지신사 권집경(權執經), 이인임의 조카 우대언 이직(李稷), 인척인 첨서 밀직 하륜(河崙), 이숭인(李崇仁), 밀직부사 박가흥(朴可興)은 곤장 치고 귀양 보냈으며 종손(從孫)인 삼사우사 이존성(存性; 이인임의 형 이인복의 손자)은 처단하였다고 한다. 당시 하륜은, 이인임의 동생 이인미의 사위인 관계로 이인임과 인척 간이라 곤장을 맞은 셈이다.
실제 온건 개혁파이기도 했고 본인부터가 이인임의 조카사위로서 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래서 관직 변천사가 제법 파란만장하다. 이성계 세력과 정몽주 세력이 고려 조정에서 대립하던 공양왕 시절에는 전라도 순찰사로 나가 있었으며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경기도 관찰사를 지냈다.
2.2. 조선 초기, 태종의 사이드킥
태조가 개경에서 계룡산으로 도읍을 옮기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하기 시작하자 하륜은 풍수학설을 근거로 계룡산 천도를 무산시킨 후 지금의 서대문구 천연동, 홍제동, 대현동 근교인 무악 일대를 새 도읍지로 밀었으나 다른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특히 정도전은 하륜을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술수하는 자들의 말 따위는 믿을 수 없다"라며 하륜의 주장을 대차게 거절했다. 오늘날의 경복궁 일대로 조정의 대세가 모아져도 끝까지 무악을 고집했으나 결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주도 있고 출세욕과 성취욕도 강했던 하륜이었지만 당시에는 태조 정권에서 태조의 측근들인 조준, 남은, 정도전 등이 태조의 비호 아래에서 권력을 지닌 상태였었고 사적으로도 한양 천도를 둘러싸고 벌였던 논쟁에서 정도전에게 거의 모욕을 당하다시피해서인지 기록으로는 알 수 없지만 정도전에 대해 원망을 품게 되었던 것 같다. 별거 아닌 말 같지만 '술수하는 자'라는 말은 유학자에게는 엄청난 모욕이다. 음양술수 같은 괴력난신이나 논하는 소인배라는 사이비와 같은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정도전과 하륜은 이색 휘하에서 같이 배운 동문이지만 나중에 스승 이색의 비문을 쓰다가 불충 시비로 경을 칠 뻔한 하륜과 달리 정도전은 조선 개국 이후 스승과 동문들을 가혹하게 대우했으니 하륜 입장에서는 정도전을 좋게 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태조 정권에서는 하륜이 스스로의 능력을 펼칠 기회도 없었고 조준, 남은, 정도전 등처럼 중앙에서 나라를 좌우하는 위치로 올라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하륜은 태조의 5남 이방원의 장인인 민제와 친구였는데 민제를 통해서 이방원과 친교를 맺게 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방원의 사람이 되어 1차 왕자의 난을 성공으로 이끌어 종국에는 태종의 즉위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하륜이 이 과정에서 한 일은 또 다른 인재인 이숙번을 태종에게 추천하기도 했고 사병이 혁파되는 상황에서 이숙번의 병력을 1차 왕자의 난 때 동원 가능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당시 이숙번은 지안산군사(안산 군수)였는데 정릉(오늘날 정동)을 지키는 임무를 맡게 되어 사역군을 이끌고 상경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이숙번의 사역군이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의 기동 호위 병력이 될 수 있었다. 민담집에 의하면 하륜과 이방원을 떼어 놓기 위해 정도전이 하륜을 충청도 관찰사로 내려보냈다. 이방원이 하륜을 불러 송별연을 가졌는데 하륜은 취한 척하고 이방원의 옷에 술을 쏟았다. 화가 난 이방원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자 하륜은 사과한다는 핑계를 대고 이방원을 쫓아가 독대하게 되었고 자리에서 이방원에게 결정적인 책략을 진언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하륜이 올린 것으로 보이는 진언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륜이 일찍이 임금(태종 이방원)의 잠저에 나아가니 임금이 사람을 물리치고 계책을 묻자 하륜이 말하기를 "이것은 다른 계책이 없고 다만 마땅히 선수를 쳐서 이 무리를 없애는 것 뿐입니다."하니 임금이 말이 없었다. 하륜이 다시 "이것은 다만 아들이 아버지의 군사를 희롱하여 죽음을 구하는 것이니, 비록 상위(태조 이성계)께서 놀라더라도 필경 어쩌겠습니까?"
<태종실록> 태종 16년(1416년) 11월 6일 하륜의 졸기
하륜이 이숙번을 추천하면서 그 병사를 동원 가능하도록 조치를 취하여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하고 있던 움직임을 피해 반란을 성공시킬 수 있었고 이후로도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는 데 많은 역할을 했다. 정종이 즉위했을 때 정사공신 1등으로 진산군에 봉해졌고 마침내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자 좌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그야말로 태종의 킹메이커이자 사이드킥.
2.3. 조선의 불도저 재상
태종 즉위 후 그토록 바라던 재상의 반열에 오른 하륜은 왕권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제 아래 태종의 개혁 정책을 계획하고 집행하는 데 앞장섰다. 6조 직계제의 도입이나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개편하는 정치ㆍ관제 개혁에 직접 관여했고 태종이 실시했던 군제 개혁, 호패법 시행, 조세 제도 정비 등에서도 계획을 입안하고 집행했다. 신문고 설치에도 일익을 담당했는데 신문고를 함부로 칠 우려가 있다는 반대 주장이나 실효성이 있냐는 비판이 제기되자 "이 제도는 백성이 신문고를 직접 치느냐 마느냐 하는 것보다 백성의 송사를 결단하는 관리들이 스스로 신중을 기하도록 하는 상징성에 더 의미가 있다"는 요지의 말로 비판들을 반박했다. 이외에도 저화(화폐)를 유통시키고자 태종에게 건의하여 이를 실행에 옮겼지만 당시 상품 화폐 경제의 미발달로 실패로 끝났다.
조선 초기의 법률인 경제육전(經濟六典)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정도전이 지은 조선경국전이 있었지만, 정도전의 조선 경국전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저작물에 불과해서 공식 법전으로 사용되지는 못했고, 태조 6년 조준의 지휘로 조선 최초의 법전인 경제육전을 새로 편찬하게 된다. 이를 속칭하여 처음 만들어졌다고 해서 '원육전' 또는 중심 인물인 조준의 이름을 따서 '조준육전'이라고도 한다. 태종 7년 이두 혼용이었던 이 원육전을 하륜이 주도해 순한문화하며 논란이 되던 부분들을 다듬었는데 같은 맥락에서 '속육전' 또는 '하륜육전'이라고 부른다. 속육전은 세종 시기에 이직과 황희에 의해 다시 수정되었고 경국대전의 바탕으로서 조선시대 법률 체계의 원형으로 자리잡는다. 태종의 뜻에 따라 <고려사>와 <동국사략> 등의 역사서 편찬도 감독했으며 <조선왕조실록> 중 태조실록의 편찬 주임이기도 했다. 다른 신하들은 왕자의 난 등 관련자가 살아 있는 사람이 많아서 이르다고 반박했지만 오히려 하륜은 "노성한 신하가 살아있을 때 마땅히 기록해야 되는 거 아니냐"며 얼굴을 붉혀가면서까지 실록 편찬을 실행했다고 한다. 이렇게 보이듯이 처세술의 달인이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정치 스타일은 전형적인 불도저 타입으로 일 처리가 빠르고 거침없었다고 한다. 일 처리 방식은 태종의 장인이자 친구인 민제까지 화나게 하여 민제가 "저러다가 정도전 꼴나지"라고 디스하게 된다. 이에 하륜은 이렇게 받아쳤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오. 옛사람들도 바른 도리를 가지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요행이 죽음을 면한 사람도 있소. 후인들이 스스로 공론이 있을 것이니, 내 무엇을 두려워하겠소?"
이후 민씨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하고 하륜은 천수를 누렸다. 태종을 섬기며 정승 반열에도 올랐고 능력과 이상을 마음껏 펼쳤다. 태조 때 이루지 못한 무악 천도까지 재추진했으나 이것만은 결국 이루지 못했다. 여론도 무악이 나쁘지 않다는 분위기고 태종이 무악을 재답사하는 단계까지는 갔으나, 답사 며칠 후 태종은 "한양·개성·무악 셋을 놓고 점을 쳐서 결정하자"라고 하며 종묘에 들어가 돈으로 점을 쳐 봤는데 무악이 한양보다 더 낮게 나오고 만 것이다.
2번이나 운하 건설을 주장한 적이 있다. 본래 삼남에서 세금으로 걷혀 올라오는 곡식을 실은 조운선은 당시에는 섬이 아니었던 안면곶 앞바다를 지나 태안 반도를 돌아 올라가는 항로를 거쳐갔는데 안면곶과 태안 안흥항 앞바다, 강화도 일대의 물살이 거셌기 때문에 배 수십 척이 한꺼번에 침몰하면서 손실되거나 바닷물에 젖어 못 쓰게 되는 곡식들의 피해량이 결코 무시하지 못할 정도였다. 때문에 고려 시대 때부터 태안 반도의 좁은 지협을 굴착해 만과 만 사이로 항로를 만들고자 노력하였으나 도중에 중지된 것을 하륜이 이때 완공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1412년 충청도 안흥량에 운하를 팔 것을 건의했는데 태종이 사람을 보내 주변을 확인하자 다녀온 이들은 운하를 파는 것이 어렵겠다고 보고했다. 하륜은 5,000명의 병사를 동원하여 운하 건설을 강행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고 1413년 한강과 면해 있는 용산 포구에서 숭례문까지 운하를 파자고 또 주장했지만 1412년 운하 건설 시도가 발린 것을 생각했는지 이번에는 태종이 나서서 의견을 기각했다.
서얼금고법 제정에 크게 기여했는데, 하륜은 이자춘의 첩의 자손은 현직에 등용하지 말자고 주장했고 재혼한 여자의 아들과 손자도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할 것을 건의했다. 참고로 하륜과 함께 무인정사에 가담하여 태종을 왕으로 만든 이숙번도 재가녀의 아들이고 태종을 지지한 의안대군 이화, 완산부원군 이천우, 완원부원군 이양우도 첩의 자손인데 쿠데타 동지들에게 불이익을 주자는 저런 주장을 당당하게 한 것이다. 무모하다고 봐야 할지 아니면 용기가 가상하다고 봐야 할지. 당연히 의안대군, 완산부원군, 완원부원군이 하륜에게 눈총을 주었으나 태종이 비호해 주었다. 다만 그래도 태종은 왕족에게는 적용대상으로 보는 게 언짢았는지 결국 왕족에게는 예외적으로 서출이라 해도 왕족 취급과 계승권은 주어졌다.
2.4. 탐욕스러운 호정대감
태종 휘하에서 신생 국가 조선의 확립을 주도했던 인물이고 행정을 처리하거나 정책을 입안하거나 정치적 판세를 짜는 부문에서는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큰 단점이 하나 있으니 바로 권문세족 시절의 버릇을 못 고쳤는지 물욕이 강한 인물이었다는 것. 일례로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이 도성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어 불편하다는 이유로 능 100보까지는 집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상소가 올라오자 태종이 이를 받아들였는데 하륜은 사위들까지 동원해서 가장 먼저 노른자위 땅들을 날름 집어삼켰다. 물론 하륜은 소유욕이 강했어도 어그로는 끌지 않을 각을 보는 능력은 탁월해서 고려 시절 몸담았던 권문세족 파당이 일삼던 소작민 수탈이나 사유지 강탈 같은 것은 태종이 추구하던 중앙집권에 정면으로 반하는 지라 하지 않았고 피해자가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금품 수수와 부동산 개발로 재산을 모았다.
예를 들면 친인척들과 함께 백성을 부역 명목으로 동원하여 국유지를 개간해 전답을 조성한 후 그냥 꿀꺽했다가 들켜서 탄핵당하기도 했고 고려 시절 이인임 일파가 하던 뇌물에도 손을 댔는지 노비들에게까지 벼슬을 팔아먹는다는 욕도 먹었다. 인재를 추천하라는 명을 받자 일도 제대로 모르는 관리들을 추천했다가 태종에게 질책당하기도 했다. 대간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지만, 그때마다 태종이 극구 하륜을 비호해 줘서 무사히 넘어갔다.
한편 사상적 측면에선 하륜 본인이 이토록 탐욕스러웠음에도 이(理)와 인간의 본성을 하나라고 보았으며 인간의 본성은 선량하다고 생각했다. 저서 <호정집>에서 인간의 본성은 인의예지신이라고 했는데 하륜의 주장은 후대의 이기론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2.5. 말년
이처럼 여러모로 머리가 비상하고 처세술이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말년에는 나이가 들어서인지 판단력이 떨어지고 말실수를 자주 하여 태종에게 핀잔을 들을 정도로 정치력이 떨어진 모습을 보인다. 민무구, 민무질 형제를 처리할 때는 가볍게 벌해야 한다고 말했다가 "그건 옳지 못하다"는 태종의 지적에 기겁했던 적이 있고 이후에도 정신을 못 차려 "세자도 아니고 겨우 왕자를 죽이려 한거니까 죄가 크지 않다"고 했다가 태종이 "그런 말은 두 번 다시 입 밖에 내지 말고 생각없이 말하지 마라”고 하자,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라며 꼬리를 내린 적도 있는데 정말 하륜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목이 날아갔을 대역죄다. 선위 파동 때는 민제를 찾아가 "전하의 뜻이 정 그렇다면 선위하시라 합시다"라고 했다가 들킨 적도 있다. 스승인 이색의 비문을 지을 때 조선의 건국 과정을 부정적으로 쓴 것이 들통이 나서 이번에도 목이 달아날 뻔했지만, 태종은 끝내 하륜을 지켜 주었다. 영의정을 지냈던 이직이 안치되는 일이 있자, 하륜이 대놓고 태종의 면전에서 말 그대로 피식 웃었다. 이직이 외방에 보내질 죄가 어딨느냐고 디스를 하자, 태종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추문에도 친구 민제의 자식들이나 이숙번, 이거이 등과는 달리 공신으로서 부귀영화와 천수를 모두 누렸다. 고금의 예를 보면 보통 개국공신은 장자방처럼 아예 정치와 부귀영화에서 손을 떼지 않는 이상은 토사구팽 되는 숙명을 피하기 어려운 법인데 하륜은 토사구팽을 피함을 물론, 부귀영화까지 누렸다는 점에서 이상적인 모사 라이프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1416년쯤 되면 앞서 말한 대로 늙어서 정치 감각도 떨어지고 몸도 안 좋아서 냉큼 은퇴하여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나 부원군 작위를 받고 함길도에 있는 조선 왕가 시조들의 무덤을 살피러 다닌다. 그러다가 거기서 향년 70세로 죽었다. 하륜의 부고를 들은 태종은 몹시 슬퍼하며 3일간 조회를 하지 않고 7일 동안 고기 반찬을 먹지 않았으며, 직접 애절한 조사를 지어 애도했다. 묘는 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에 있는데 하륜의 묘 뿐만 아니라 하륜의 부친과 조부의 묘도 있다. 이 묘들을 '오방리 팔각형 고분군'이라 하는데 특이하게도 봉분이 8각형으로 되어 있는 형태라서 여말선초의 장례나 묘지 연구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묘들이다.
3. 평가
<조선왕조실록>은 하륜에 대해 "천성적 자질이 중후하고 온화하며 말수가 적어 평생 빠른 말과 급한 빛이 없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서는 의심을 결단하고 계책을 정함에는 조금도 헐뜯거나 칭송한다고 해서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태종의 후계자인 세종은 하륜을 그렇게 좋게 보지 않았다. 세종은 하륜에 대해 이렇게 평을 내리고 있다. 요약하자면 '아버지가 단수가 높으셔서 하륜을 데리고 일하셨지 나였으면 진작에 박살 냈다' 정도의 의미다.
"하륜은 학문이 해박하고 정사에 재주가 있어 재상으로서의 체모는 있지만, 청렴결백하지 못하고 일을 아뢸 때도 여염의 청탁까지 시간을 끌며 두루 말하곤 했다. 내 생각으로는 보전하기 어려울 것인데도 태종께서는 능히 보전하시었다."
<세종실록> 세종 20년(1438년) 12월 7일
임용한은 저서 <조선국왕 이야기>에서 하륜은 선을 지키면서 욕심을 부렸다고 평가했다. 물론 하륜이 절제력이 뛰어나서 그런 건 아니고 당시 관료에게 용인되는 수준이었거나 더 욕심을 부리면 목이 달아날 수준까지는 넘지 않을 정도까지만 해먹었다는 의미다. 하륜은 살면서 온갖 스캔들에 휘말렸지만, 주로 재물을 해쳐먹은 일과 늙어서 태종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실언 하는 일을 제외하면, 혈연으로 연결되어 관련성을 피할 길이 없었던 민씨 형제나, 세자와 어울리고 뇌물을 바친 구종수 형제에게 얽히고 양녕대군 면전에서 태종의 정책을 비판한 이숙번과 달리 태종이 극도로 혐오하던 외척 짓거리, 귀족 짓거리와는 끝까지 담을 쌓았다. 비록 실언은 했어도 태종이 숙청한 외척과 공신들의 주 레퍼토리이던 '네가 누구 덕에 보위에 올랐느냐?' 같은 발언을 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다른 공신들과 달리 오래도록 태종의 정치적 실무를 주도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펼쳤다. 말년에 몇 번 태종의 심기를 건드리기는 했지만, 역린을 자극하는 것은 끝까지 피하는 데 성공했다. 태종이 핀잔을 주는 선에서 끝냈던 이유도 상술한 대로 탐욕은 많아도 왕권에 위협은 가하지 않았고 태조-정종-태종 3대를 보필하며 세운 공훈이 많은 원로대신인 데다 태종보다 나이가 20살이나 더 많아서 세자가 왕위에 오를 때쯤이면 이미 죽거나 은퇴했을 테니, 굳이 일부러 숙청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하륜은 일흔이 넘자,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함경도에서 조선 왕조 시조들의 무덤 살피는 일을 하다가 그 해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