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415년 ~ 1482년
전라도 남원 출생. 호는 눌재(訥齋), 시호는 문양(文襄)이다. 16세기 초 중종 때의 인물인 박상(朴祥)도 호가 눌재(訥齋)이고 저서 역시 '눌재집'이다. 로마법 학자인 최병조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도 호가 눌재인데, 양성지나 박상의 호를 따라서 지은 것은 아니고 짓고 보니 우연의 일치로 호가 같았다고 한다.
양성지는 같은 훈구파의 한명회, 신숙주, 권람에 비해 인지도는 낮지만 당대에 '세조의 제갈량'이라고 불린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2. 생애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초기 집현전 학자들 중 하나이다. 세조 ~ 성종 시기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와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완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앞의 서적들에서 보듯 지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병학에도 조예가 있었다. 명나라에 대한 사대에 신중하게 생각하여 자주적인 국가를 만들자는 사상을 지녔다. 세조에게 상소를 올려 환구단에서 제사를 올리게 한 인물이며, 세조를 시작으로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환구단에서 제사 지내지 않은 왕이 없을 정도다. 특히 이는 국방 사상에 영향을 주어, 조선 전기의 대표적 군사 체계인 진관 체제를 만들게 된다. 이는 조선 후기의 실학과 맞닿아 정조의 개혁에 영향을 주었다. 집현전 학사 시절에는 고려사 편찬에도 참여하였으며, 의학서인 《의방유취(醫方類聚)》를 편찬하는데도 기여한 조선 전기의 전형적인 다재다능 문신이다.
특히 그의 사상은 시대를 앞서나간 면이 있었는데, 백정이 양민이 되는 길을 열어주자거나, 의창과 같은 사회 복지 제도를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사고를 관청 옆이 아니라 산간 깊숙한 곳으로 옮겨 외적의 침입으로 소실되는 사태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130년 후 그의 주장이 현실화되고 말았다. 이후 지방에 새로 설치된 사고는 모두 산속에 자리했다.
다만 조선 중기에는 폄하되는 면이 있었는데, 그의 가문이 이후 훈구파로 분류되기도 하였으며, 이 때문에 사육신의 충절을 존숭하는 분위기의 조선 중후기에는 사림파에 의해 비난받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세조에게 아부했다는 이유로 자주 탄핵되곤 했으며 청백리라고 볼 수 없는 인물이었다.
한명회, 신숙주, 권람 같은 네임드들을 제치고 바로 제갈량에 비유된 흠좀무한 인물임에도 어째 사극에서는 다른 세조의 공신들의 이미지에 밀려서인지 코빼기도 안 보인다.
그의 손자인 양연도 좌찬성을 지냈는데 대사헌을 할 때 중종의 밀명을 받아서 조선 최강의 권신이자 간신이던 김안로를 탄핵하여 실각시키고 사사하게 만들었으며 척신이자 대윤의 수장이던 윤임과 가깝게 지냈다.
후손은 조선후기 삼군부사, 공조판서, 독련사 등을 역임한 무신으로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서 정족산성 전투를 지휘한 충장공(忠莊公) 양헌수이다. 문양공의 13대손이다.
3. 손자
적장남: 양원(梁瑗)(1438~忌11.29) 참의
손자: 양치(梁治)(1458~1520.05.23) 삭녕군수 (양성지의 장손)
손자: 양제(梁濟)(1462~1519) 신창현감
적차남: 양수(梁琇)(생졸 미상) 정선군수
손자: 양윤(梁潤)(생졸 미상) 맹산현감
적삼남: 양찬(梁瓚)(1443~1496) 동부승지
손자: 양형(梁泂)(1468~1528) 숙천부사
손자: 양숙(梁淑)(1451~1528.10.13) (증)병조참판
적사남: 양호(梁琥)(생졸 미상) 증산현감, 좌찬성
손자: 양결(梁潔)(생졸 미상) 호군
손자: 양활(梁活)(생졸 미상) 사과
손자: 양연(梁淵)[11](1485~1542.07.26) 좌찬성, 판의금부사
손자: 양담(梁淡)(생졸 미상) 1자
4. 사후
임진왜란 때의 장군이었던 원균은 양성지의 후손이다. 외가 4대손이다. 즉, 원균의 모친이 남원 양씨이며, 외가 외조부는 양희증(梁希曾)으로 세조, 성종때의 학자이다.
중종 때 권신이자 간신인 김안로를 실각시킨 양연도 양성지의 손자이다.
한편, 대포서원은 김포시 양촌읍 대포리에 있는 서원으로 1973년 조선시대의 문신·학자 양성지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매년 양력 4월 25일에 춘향제가 봉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