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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인물

이극돈(李克墩)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13|조회수18 목록 댓글 0

1. 개요

조선 전기의 문신

2. 생애

광주 이씨로, 세조 때 우의정을 지낸 것으로 유명한 이인손의 넷째 아들. 이극돈의 할아버지는 청백리이자 참의를 지냈던 탄천 이지직, 이극돈의 증조 할아버지는 광주 이씨의 중흥조라 할 수 있는 둔촌 이집이다. 그의 집안은 위로 이집까지 3대, 아래로 5대를 문과에 합격한 명가였다. 나머지 형제 넷도 고관 대작이 되었고, 이극돈의 조카와 사촌 형제들도 모두 참판과 참의를 지냈다. 그의 광주 이씨 가문은 조선 전기 때 "팔극"이라 불렸을 정도로 상당한 이름을 날렸다.

좌찬성의 자리에서 연산군을 충동질해 무오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본질을 놓고 보면 상당히 억울한 인물. 심지어는 사화에 찬성했다는 이유로 간신이라는 이미지까지 덧씌워져 있다.

전례에 밝고 사장(=문장)에 능한 훈구파의 거물로서 사물을 처리하는 재간이 있었다 한다. 또한 관리의 행정을 환하게 습득했으며 옛일을 익숙하게 알고 모든 일을 자세히 생각해, 이르는 곳마다 업적이 있어 한 때 추앙되었다 한다. 정밀함이 월등하여 연산 1년에 죽은 형 이극배도 난처한 일을 만나면 이극돈에게 물었다고 한다. 성종 실록의 사관들은 그가 판서(숭정대부 겸 경상도 관찰사)의 자리에 오르자 이극돈 정도의 인물이 그제야 이 자리에 오르다니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라고 출중한 능력에 비해 출세하지 못한다는 상반된 평가를 내렸다.

김일손은 검증도 안된 비난성 소문을 너무 많이 실었던 사관으로, 그의 기록은 신빙성이 꽤 떨어지는 편이다. 자세한 내용은 무오사화 항목 참조. 일의 발단은 이극돈이 김일손의 이조좌랑 추천을 거부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때 그 이유로 김일손에 대해 평하기를 "사람이 경망스럽다."고 했다. 그러자 훗날 김일손은 이극돈에 대해 '정창손에 의해 불경을 잘 외워 출세했다, 그 출세한 전라도 관찰사 자리에서 정희왕후의 상중에 장흥군 기생과 놀아났다.' 등의 다분히 감정적인 비아냥거리는 기록을 사초에 남겼다.

한편 김일손은 이극돈이 이 사초를 삭제하려고 하다가 실패했다고 주장하지만 이건 그냥 철저하게 김일손의 주장이며, 이극돈의 반론과 전후관계를 살펴보면 사초의 허접한 내용이나 서로간의 껄끄러운 관계 때문에 그냥 무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김일손 본인 증언에 따르면 이 이극돈 비난기사를 두고 이극돈에게 직접 수정 요청을 받은 것도 아니고 사돈의 친구였던 홍문관 교리 손준이 카더라는 걸 들었다였지 이극돈과 김일손은 교류를 끊은지 이미 오래되었다. 거기에 이극돈은 유자광이 사태를 키운 무오 사화에서도 "임금이 사초를 보게 되면 후세에 직필이 어려워진다"면서 세조를 까는 부분만 절취하여 올렸다. 이걸 올린 것도 잘못되었다는 말도 있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미 김일손의 스캔들성 사초에 대한 소문은 퍼질대로 퍼져있었고, 연산군은 분노해서 사초를 모두 가져오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김일손이 죄를 면할 방법은 전혀 없었으며, 이극돈은 실록청 당상으로서 그나마 희생자 수를 줄이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것이다. 이극돈 사초내용도 이극돈이 발췌한 게 아니라 처음 김일손이 잡혀들어갈 때 김일손이 이극돈이 자신을 모함한다고 생각하여 전말을 분다고 이극돈과 자신의 갈등과정을 말하는 과정에서 밝혀진 사실이다.

조의제문 항목에도 나와 있듯이 무오 사화 이후로 그는 늦게 고한 죄로 파직되었으며, 이후 복권되어 광원군에 봉해졌으나, 정승은 지내지 못하고 연산 7년에 병조 판서만 지냈다. 연산 8년에 건강 악화를 이유로 사직을 청했으나 반려당했고 다음해 사직했다가 직후 절묘하게 죽었다. 연산군은 이때부터 광주 이씨 집안을 경계하게 되어 이후 갑자 사화 때 트집잡아 집안 자체를 멸문된 것과 다름없게 만들었다.

이 영향은 중종반정까지 미쳐 5대손인 이이첨까지 사림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이렇게 양쪽에서 공격받았고 중종반정 이후엔 더욱 지탄받은 불운한 인물이다.

조사관으로 부임했을 때 "백성들이 흉년이어도 쌀밥만 찾고 곡식은 풍년일 때 다 먹어치운다" 면서 개탄한 적이 있다. 그때 그때 즐기며 살기보단 지금 좀 덜 행복하더라도 미래를 생각하며 살자는 뜻이다.

남곤의 경우처럼 그의 서자들이 잡과에 응시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의외로 성종 ~ 중종 조에는 잡과에 대한 대우가 박하지 않았다"라는 하나의 증거가 된다. 물론 어디까지나 서자가 문과를 볼 수 없기에 그리 한 것이겠지만. 실제로 당시 서얼의 문과응시는 전면 금지되어 있었고, 잡과는 천민 출신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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