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선 전기의 정치가이자 외척.
2. 생애
임원준의 아들로 1445년 태어났으며 1465년(세조 11년) 알성문과, 1466년(세조 12년) 사재감사정으로서 춘시 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임사홍은 시문과 서예 솜씨로 당대에 이름을 날렸고 중국어에도 능통하여 관압사, 선위사 등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승문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쳤다. 그래서 임사홍의 능력을 높게 산 성종은 임사홍을 문관으로 등용했고 홍문관교리, 승지, 도승지, 이조판서, 대사간, 예조참의 등의 요직을 역임시켰다.
정승이라도 법령을 어기면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임사홍은 직설적인 성격 때문에 타인에 대한 비판을 자주했고 이로 인해 사림의 눈엣가시가 되었는데 장인인 보성군의 손자이고 처조카가 되는 이심원이 임사홍을 매우 싫어하여 시시콜콜 집요하게 탄핵했다. 이심원은 임사홍과 나이차가 5년이었지만 작정하고 고모부인 임사홍과 사돈어르신인 임원준을 말도 안되는 사소한 일을 가지고 성종에게 탄핵을 요청했지만 이를 들은 성종도 기가 막혀 사소한 것을 집요하게 이야기한 이심원에게 짜증을 냈다. 이를 들은 보성군 이합과 아들 이위가 성종에게 와서 이심원의 행동을 성종에게 사죄드리며 손자의 행동에 벌을 주라 청하였다. 이심원의 탄핵을 요약하자면 왕에게 고모부가 소인배이고 사돈어르신이 똑같은 부류이니 처벌해달라
하니 왕도 기가 차서 한 소리 하고, 이를 듣고 당황하고 화가 난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자기 사위이면서 처남과 사돈 양반을 탄핵한 손자에게 "고모부와 사돈어르신께 무슨 무례한 짓이냐?"하고 꾸짖었는데도 손자가 듣지 않고 제 마음대로 행동하자 안되겠다 싶어서 임금한테 고발한 것이다.
비록 (술을) 금할지라도 조사(朝士)는 적발됨이 없고 오직 소민(小民)만 죄를 받을 뿐입니다.
성종실록 91권, 성종 9년 4월 21일 임자 4번째기사
1478년(성종 9년) 4월 전국에 '흙비(황사비)'가 심하게 내렸는데 사람들은 하늘의 변괴로 여기고 두려워했다. 이에 3사(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에서는 성종에게 하늘의 경고로 받아들여 근신해야 하며 당분간 전국에 금주령을 내려야 한다고 간언하였다. 여기서 도승지였던 임사홍은 흙비는 재이(災異)가 아니며 국가의 제사가 연이어 있는 시점에서 술을 일절 금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간언하였다. 그러자 3사는 임사홍의 발언을 비판하였고 대간들 역시 임사홍을 탄핵하라는 상소를 줄줄이 올렸다. 성종은 처음에 임사홍의 편을 들면서 대간들의 탄핵을 저지했으나 대간들의 탄핵은 점점 심해졌고 결국 성종도 뜻을 거두고 대간들의 의견에 따르게 된다.
결국, 임사홍은 위의 사건과 더불어 유자광 등과 파당을 만들고 현석규를 음해했다는 죄목으로 의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임사홍이 유배를 간 이후 성종은 임사홍을 정식으로 복권시키려 여러 번 시도했지만 대간들의 반대 탓에 불발되었으며 결국 임사홍은 12년 동안이나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이후 성종은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임사홍을 유배에서 풀어주고 다시 등용한다. 성종은 1490년(성종 21년) 명나라에 파견되는 관압사에 임사홍을 임명하였으며 1491년 9월 승정원 도승지에 임사홍을 제수하면서 같은 해에 임사홍은 선위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다만 이렇게 성종이 등용을 했다고는 해도 정식으로 정계에 복귀한 것은 아니었다. 임사홍에 대한 대간들의 엄청난 탄핵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종실록>을 살펴보면 거의 2페이지 분량이 임사홍에 대한 대간들의 탄핵 상소문으로 가득찬 것을 볼 수 있다. 그만큼 반대가 심했으니 왕이라 하더라도 신하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복권을 강행하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
원자를 생각해서라도 폐비만은 불가합니다.
성종이 죽고 그의 아들인 연산군이 즉위하였다. 연산군은 많은 이복 여동생 중 휘숙옹주를 많이 아꼈는데 휘숙옹주의 남편이 바로 임사홍의 4남인 임숭재였기 때문에 연산군은 임숭재를 각별하게 생각하였다. 1500년(연산군 6년) 임숭재는 연산군에게 자신의 아버지 임사홍에 대한 탄핵이 부당함을 탄원하였고 연산군은 이를 받아들여 임사홍을 정식으로 복권시킨다. 그 뒤 갑자사화 때 이극균과의 친분 탓에 참수당할 뻔하나 과거 성종 시절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의 폐비를 반대한 일로 모면한다. 이후 1505년(연산군 11년) 조선 8도의 아름다운 여자를 뽑아 연산군에게 바치는 채홍사로 임명된다.
하지만 연산군의 폭군 행위에 반발한 대신들은 1506년(연산군 12년 / 중종 1년) 9월 2일에 중종반정을 일으켰고 임사홍은 이날 자택에서 동생인 임사영과 함께 반정군에 의해 살해된다. 이때 그의 나이 62세였다. 살해된 후 그의 시신은 가족들이 매장했으나 이후 20일 뒤에 의금부가 중종에게 "임사홍을 부관참시하고 적몰 가산해야 한다"고 하였고 중종이 이를 윤허하여 임사홍은 부관참시되어 효수된다.
3. 평가
중종반정에서 처형된 후 성종과 연산군 시절의 행적을 말미암아 간신과 소인(小人)의 대명사가 된 인물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폐비 윤씨에 대한 사실을 연산군에게 알려서 갑자사화를 일으키게 하는 주동자로 묘사되어 있지만 사실 연산군이 애초부터 계획하며 주도적으로 일으킨 사화였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핍박했던 사대부들을 숙청하고 부관참시 했다는 점, 이렇게 경쟁자들을 제거한 후 연산군의 측근으로 아부하면서 은총을 믿고 사욕을 채우는 등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는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현대까지 이어져왔다.
그런데 이러한 평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임사홍을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관련 사료들을 검토한 결과 임사홍이 갑자사화에 적극 가담했다는 증거가 부족하고 그의 행실 또한 간신으로 보기에는 부족하다고 한다. 특히 임사홍이 갑자사화를 주도했다는 주장의 근거들이 대부분 야사거나 사관 개인의 의견이고 오히려 임사홍은 이극균과 친분 때문에 참수당할 뻔한 인물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내용도 반정을 일으킨 중종 대의 내용이 대부분이어서 신빙성이 떨어지며 갑자사화 당시의 <연산군일기>에는 임사홍이 갑자사화를 적극적으로 주도했다는 내용을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임사홍을 간신으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임사홍은 채홍사 일을 할 때 연산군에게 일을 제대로 못 한다고 크게 지적을 당한 일이 있다. 심지어 이때 임사홍을 평생 동안 괴롭히던 소인배 소리까지 연산군에게 들어야 했다. 특히 연산군은 임사홍의 2남인 임희재가 자신을 비판한 시를 썼다며 임희재를 죽여버리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임사홍을 재평가하려는 측에서는 이러한 사료를 근거로 임사홍이 연산군에게 크게 신뢰를 받은 관료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4. 여담
글씨를 잘 썼으며 상술했듯이 중국어도 잘해서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담당하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임사홍이 미복 차림으로 자신의 집에 찾아온 연산군에게 폐비 윤씨의 이야기를 알리는 이야기가 적혀있다.
5. 가족 관계
증조부 : 임거경(任巨卿)
조부 : 임견(任肩)
부 : 임원준(任元濬)
모 : 정경부인 의령 남씨(貞敬夫人 宜寧 南氏) - 남규의 딸, 남곤의 고모
동생 : 임사영
부인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보성군(寶城君)의 딸
장남 : 풍천위 임광재(豊川尉 任光載, 1464 - 1495) - 현숙공주와 혼인
차남 : 임희재(任熙載, 1472년 - 1504년)
삼남 : 임문재(任文載, 1473 - ?)
사남 : 풍원위 임숭재(豊原尉 任崇載, 1475년 - 1505년) - 휘숙옹주와 혼인
장녀 : 풍천 임씨(豊川 任氏, 1468년 - ?)
차녀 : 풍천 임씨(豊川 任氏, 1479년 - ?)
사위 : 노종(盧種) - 노공유(盧公裕)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