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조선의인물

정광필(鄭光弼)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13|조회수24 목록 댓글 0

1. 개요

조선의 문신이자 중종 재위기의 최장수 정승. 정승 기간이 14년이며 영의정만 2번에 걸쳐 9년을 했다.

이 사람의 직계 후손이 철종을 옹립한 정원용이다. 정창연, 정태화, 정치화, 정지화, 정존겸 역시 정광필의 후손이다.

2. 생애

아버지 정난종(鄭蘭宗, 1433~1489)은 세조 시절의 문신이자 서예가로 이시애의 난 당시 황해도 관찰사였고 난을 평정한 공으로 호조참판이 되었으며 이후 우참찬까지 한 인물로 신공신 세력 중 하나였다. 1469년 <세조실록>의 편찬에 관여하고 이후 <예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하는 등 고위 관료였다.

정광필 본인은 1492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등용되고 부제학, 이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503년 연산군에게 밤늦게 사냥하는 것이 몸에 좋지 않다고 간언했다가 '일하기 싫어서 하는 핑계'로 본 연산군에게 밉보였고, 1년 후 1504년 갑자사화 때에 그때의 간언을 이유로 아산(牙山)에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부제학에 복직해 이조참판, 병조판서, 예조판서, 대사헌을 거쳐 1510년 우참찬으로 전라도 도순찰사가 되어 삼포왜란을 수습한 뒤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516년 영의정에 올랐다. 조광조 등장 전 남곤은 차세대 정승감으로 떠올랐는데 이때 정광필도 '미래의 정승감으로는 남곤이 1순위'라고 했다.

조광조의 득세를 가장 많이 막았지만 일부 의견이 맞는 부분에 관해서는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거나 적절한 타협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1519년 기묘사화 때 조광조를 구하려다가 파직되었다. 이때 정광필은 조광조의 죄를 적어놓은 문안에(이건 중종의 명령으로 남곤이 썼다.) 딴지도 걸고 "조광조의 죄는 파직이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붕당은 큰 죄인데 함부로 할 수 없고 조광조를 앉힌 건 전하잖아요."하며 눈물을 흘리며 빌어도 봤지만 실패했다. 조광조 축출에 참여한 남곤이 중종의 밀지를 들고 정광필을 방문하나, 남곤과 이장곤 모두 조광조 축출에 동조하지 않았기에 정광필이 째려보는 것에 아무런 말도 못하고 무안해했다고 한다.

1527년 다시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이 되었으나 작서의 변 사건이 일어나고 이 일로 훗날 경빈 박씨에 이어 복성군이 사사되자 "진성군을 죽일 때는 조정이 안정되지 않아 어쩔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안 그래도 됩니다."라고 했다가 명예직인 영중추부사로 좌천되었다.

1537년 총호사로서 장경왕후의 희릉을 잘못 쓰게 하였다는 김안로의 무고로 김해에 유배되었으나 1538년 김안로의 사사로 풀려났다. 이때 영의정 윤은보, 좌의정 홍언필 등이 영의정에 추천했으나 과거 영의정 때의 실정을 이유로 중종이 거절하였다. 중추부영사로 1539년 77세 나이로 사망했고 중종의 묘정, 회덕의 숭현서원, 용궁의 완담향사에 배향되었다. 중종의 배향공신으로 오른 4명 중 1명인데 나머지 3명은 다름 아닌 중종반정의 주역인 박원종, 성희안, 류순정이므로 당대에도 정광필을 높이 평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묘소는 경기도 군포시에 있으며 문집 《정문익공유고》가 남아 있다.

2001년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배우 김호영이 연기했다.

3. 여담

중종 시절 몇 없던 강직하고 융통성 있는 신하. 목이 달아날 만한 충언을 몇 번이고 아끼지 않았고 이로 인해 좌천되기도 했다. 사상적으로도 급진적이고 극단적인 조광조와 그 개혁파들과 달리 현실적인 시각이 있었다. 현량과에 적극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한 것이 예시. 이후로도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많은 학자들이 경연에서 정광필을 높이 평가한다. 백성들도 그를 존경했는데 1527년 다시 좌의정 직에 복귀할 때 백성들이 길가에 모여 "우리 정 정승께서 돌아오신다!"라며 기뻐했다는 기록이 있다.

회현동의 은행나무길에 있는 500년 가까이 묵은 은행나무가 있는데, 순조 시대 때 간행된 <한경지략(漢京識略)>에 실린 전설에 따르면 그 나무는 정광필의 집 앞에 심어졌던 것으로, 신인(神人)이 정광필의 꿈에 나타나 정승이나 쓸 수 있는 물소의 뿔로 만든 서대(犀帶)가 12개 걸릴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이는 정승 12명이 배출된다는 얘기인데 <한경식략> 시절에 이미 정승 10명이 채워졌고 이후 고종과 순종 시절에 1명씩 더 배출되어 딱 12명을 채웠다고 한다.

진주목사까지 지낸 할아버지 정사(鄭賜)의 묘자리가 경상북도 예천군 지보면 지보리에 있다. 풍수학자들은 지보리의 지형이 여자가 다리를 벌린 형국이며 그 중심이 되는 여근에 정사의 묘가 자리를 잡았다고 하는데 이에 우리나라 8대 명당 자리에 속한다고 하며 옥녀단좌형(玉女端座形 - 옥녀가 남자와 관계를 위해 단정히 앉아 자세를 취한 모습)의 명당이라고 한다. 해당 자리에는 이미 다른 가문에서 묘자리를 쓰려고 했던 곳인데 묘자리에서 물이 계속 흘러나오자 포기하자 정사의 가문에서는 주변에 우물을 파 물길을 그 쪽으로 돌리고는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정광필의 집터와 마찬가지로 후손들이 관직에서 두각을 드러내니 이런저런 전설들이 전한다.

신숙주의 후손이자 당시 정승이었던 신용개와도 우정이 돈독했다고 한다.

정광필의 장인인 송순년은 송시열의 직계조상인데 송인수는 송시열의 종증조부였다. 말하자면 정광필은 송인수하고도 어느 정도 인척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셈이다.

유독 역모 관련으로 무고가 많았던 중종 대의 일화들 중에서도 가장 황당한 역모 소동에 연루되었다는 야사가 있다. <기재잡기(寄齋雜記)> 에 의하면 한성의 동몽교관(도성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하급관리)이 역모를 꾀한다 하여 연루된 자들을 모두 잡아들였는데 금부에 있는 수갑, 차꼬, 쇠사슬 등이 반 이상 모자랄 정도로 그 규모가 커서 모두 새끼로 목을 얽어서 종루(鐘樓) 아래에 앉혀 놓았다. 그런데 그 중에 정광필의 손자 정유길이 끼어 있었는데, 당시 나이가 불과 열 살로 또래 아이들과 공부하러 갔다가 잡혀간 것. 정광필이 이에 중종에게 '제 손자가 열 살인데 연루되었다'고 밝히자 황당해진 중종이 급히 사실을 확인해 보니 더운 날씨에 공부에 지쳐하는 아이들을 보고 선생이 기분전환 겸 편을 나눠 전쟁놀이를 한 것이 와전되었던 것이다. 결국 고변한 자가 무고로 처벌되는 해프닝으로 끝난 사건인데, 이 해프닝의 주인공인 정유길은 정광필이 가장 사랑하던 손자로 23세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였고 관운도 순조로워 당대의 명신으로 이름을 날렸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