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선 전기의 문관이자 유학자이다.
2. 생애
고려 말 참지문하부사를 지내다가 조선이 개국되자 양주에 은거한 남을진(南乙珍)의 증손으로, 조부는 남규(南珪)이며 아버지는 곡산군수를 지낸 남치신(南致信)이다. 개국공신 남재는 남곤의 조부 남규의 사촌 형으로서, 남곤에게는 재종조부로서 6촌 관계가 된다. 세조 대의 무신인 남이는 남곤의 사종손(四從孫)으로 10촌 관계이다. 배위는 숙천부사 이세웅의 여식인 정경부인 연안 이씨이다.
사림파의 중시조인 점필재 김종직의 직계 제자로 무오사화의 원인이 되었던 김일손과도 친했다고 한다. 김일손, 김안국과는 7살 차이, 김굉필과는 무려 17살이나 나이차가 나며 조광조와는 아래로 11살차. 다만 당시에는 나이차가 나도 망년지교를 맺는 관계가 많았다고 한다. 물론 친구를 먹었다한들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않고 상호 존대하는 것은 기본 예의였다. 어려서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했지만 이 때문에 그는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죽을 위기를 넘긴다. 조광조의 스승 김굉필은 갑자사화로 죽었지만 김굉필의 동문들이 아직 살아 있었으며 김굉필에게서 배출된 다른 제자들인 김정국, 김안국 등도 있었다. 조광조는 김굉필은 물론 반 세대 차이나는 선배인 남곤 또한 즐겨모셨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무오사화 이후 시점이면 남곤은 이미 생존자로 끝발 높은 고위 관료였을 것이다.
야사에 따르면 하루는 남곤과 조광조가 산책을 나갔는데 조광조는 어떤 젊은 아가씨들이 지나가자 계속 흘끔흘끔 쳐다보게 됐으나 남곤은 눈길 1번 안주고 그대로 앞만 보고 달려갔다. 집에 돌아온 조광조는 부끄러움에 자책하며 한탄하였으나 어머니 여흥 민씨는 이렇게 말했다.
"젊은 사내가 어떻게 여자 보고 눈이 한번도 안 돌아갈 수 있겠느냐? 그러나 남곤이란 친구는 참으로 무서운 사람이다. 그는 목석 같은 사람이라 젊은이의 피가 끓지않는 차가운 사람이다. 겉으로 보면 인격적으로 수양이 된 것처럼 보이겠으나 속으로는 그도 아가씨들에게 마음이 쏠렸을 것이다. 그것을 속으로도 참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남곤은 한눈 하나 팔지 않았다면 얼마나 차갑고 모진 사람이냐. 훗날 남곤이 정치를 한다면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사람의 약한 정, 미운 정을 헤아리지 않는 판단을 내릴 것이다. 인간이 살다보면 실수할 수도 있고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는데 남의 윗사람이 된 자는 너그러움이 있어야 된다. 죄지은 사람을 다음에 잘 하라고 용서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곤은 그런 아량이 적어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려도 외면할까봐 무섭구나."
이 말을 마친 조광조의 어머니는 짐을 싸서 남곤의 집에서 최대한 멀리 이사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출처가 불분명하고, 교차 검증하는 사료는 전혀 없는 데다가, 비슷한 레퍼토리의 이야기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야사나 민담에서는 비슷한 구조의 이야기가 인물만 바꿔서 전해지는 경우가 흔하다. 말하자면 조선 시대판 템플릿. 까놓고 말해 실제 역사로 생각하긴 어렵고, 다만 이런 이야기가 형성되던 시기 사람들의 여론 정도만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성종 때 생원 시험과 진사 시험에 모두 합격하고 1494년에는 과거에 급제했으며 검열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성종 때 외척 윤필상을 탄핵하였다가 투옥되었고 류순정, 성희안의 비리를 탄핵하였다가 또다시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 뒤 낭관, 직제학, 부제학, 좌부승지를 거쳐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연산군 초기 도승지를 지냈다. 연산군의 폐비 윤씨 추존을 성종의 유지를 어기는 일이라 비난했고 연산군의 행동에 간언을 하다가 갑자사화 때 겨우 목숨을 건지고 유배된다. 1504년의 갑자사화로 유배지에 위리안치형이 내려짐으로서 자칫하면 죽을 뻔하기도 했다.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 극적으로 목숨을 구했으며, 이후 반정 공신들에게는 밉보였지만 중종반정을 긍정하고 지지한 덕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무오사화에 죽은 김일손의 묘를 중종반정 뒤 이장할 때 추도시를 짓기도 하였다. 역모를 고변한 공로로 종2품으로 승진한 뒤 이조참판, 대사간, 대사헌, 중추부동지사, 중추부지사 등을 지냈으며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 이조판서를 지내기도 했다. 1518년에는 종계변무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서 변무를 요청했지만 실패하고 되돌아왔는데 이 문제는 나중에 홍순언이 해결하는 그 일이다. 글을 잘 써 중국 명나라와의 외교 문서를 전담했었다고 하며 당대의 대문장가였는데 애초에 조광조 측의 미움을 받은 것도 문장을 잘해서였다. 남곤은 조광조를 천거하고, 적극 밀어주면서 조광조의 벼슬까지 중종에게 올려달라 청하는 등 조광조를 지지하면서 도움을 주었지만, 시와 문장을 잘한다는 이유로 소인으로 몰리고 이후 정광필과 함께 현량과에 반대하면서 이후에 조광조는 남곤에 대해 근거없는 편협한 망상에 휩싸였다. 남곤은 조광조가 하는 행동이 지나치다고는 여겨도, 젊은 사람들이 나라를 위해서 열정적으로 해보려다가 철이 없어서 실수를 한 것으로 여기며, 축출 자체도 중종이 병력을 동원한 모습에 마지못해서 따른 모습으로 보인다.
1519년 심정, 김전 등과 함께 중종의 비밀 명령을 받고 입궐해 중종이 기묘사화를 일으키는 것을 묵인했다. 발의와 결정은 중종이 했으며 정광필 등을 설득하는 역은 남곤이 맡았다고 한다. 그 결과 조광조, 김정, 김식 등 신진 사림파와 안당 등의 친사림 재상들이 모조리 숙청됐는데, 후에는 진짜 원인 제공자인 중종을 대신해 그가 모든 죄를 쓰게 됐다. 비록 심정과 홍경주와 함께 중종의 기묘사화를 초기에는 방관했다고 해도 조광조가 잡힌 이후에는 처벌 수위를 낮게 청하며 가장 앞장서서 적극적으로 조광조를 살리려고 애썼지만 부끄러움을 느껴 귀가했다고 했고, 조광조의 사사 결정이 내려졌을 때는 슬퍼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오히려 남곤이 조광조빠라는 생각까지도 들 정도다. 이 때문에 남곤이 조광조 축출 자체에는 동의해도, 정말로 죽이기 보다는 '조광조를 파직하고 몇 년 귀양 보내서 정치에서 손떼게 하는 정도면 되겠지?' 정도로 온건하게 판단했다는 해석도 있다. 실제로 조광조를 살리기 위해 가장 노력한 것이나 조광조의 행동이 도가 지나쳐서 잠시 반성 좀 하고 오길 바라는 것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중종이 병력까지 동원하여 완전히 기세를 잡고, 조광조 세력을 모두 축출할 때 남곤은 중종에게 소극적으로 따르면서도 심적으로 괴로워하는 등 동의하지 않는데 위세에 눌려 마지못해서 따른다는 기색이 대놓고 드러난다.
그 후 좌의정을 거쳐 1523년 영의정이 되었다. 영의정이 된 이후 떠오르고 있던 김안로에 대해 위험 의식을 느끼고 그를 유배시켜 버린다. 도학 정치를 추구한 조광조를 몰아냈다는 비판을 받았으나, 후일 김안로처럼 권세를 휘두르는 간신은 아니었는데, 차림은 수수했고 뇌물을 멀리했다. 사실 심정이나 이행 등 남곤 일파들은 개인적으로는 청렴한 인물들이었으며 차라리 사림의 지지를 받은 김안로가 독재자급의 만행과 사치를 보였다. 반정 3대신이 죽은 이래 윤씨 외척들이 등장할 때까지의 관료들은 대부분 사림이며 그래서 이 시대는 훈구와 사림의 대립으로 보기보다는 되레 선조 초기 사림의 노소 분열과 유사한 강온 대립이라고 보는 게 이해에 빠르다.
남곤의 입장은 현실적인 업무에 치중하는 쪽으로 정광필과 비슷한 업무자였지만, 권력을 쟁취할 생각도 없었고 조광조를 살리는 일이 아니라면 중종에게는 대들지도 못하기도 했다. 조광조 측에서 '시나 문장 같은 거 모조리 없애야 됩니다!' 식의 발언을 하자 '그럼 중국과의 외교는 무엇으로 하겠습니까!'하고 반대했다. 물론 한계도 있었는데 사화 이후 땅으로 떨어진 학풍과 권신들의 행보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 등에 대해서는 해결책을 내놓지 않았다. 기묘사림이 남곤을 포용하지 못하건 사실이며, 심지어 조광조의 경우는 특별 고과에서 장원급제 때 감독관이 남곤이었다. 그저 시를 잘 한다고 공격하면서 소인배로 몰아세우는 등 조광조는 자신을 밀어주고 줄곧 지지해 준 선배를 통수친 것. 그러나 아무나 소인으로 몰면서 공격하는 조광조의 행동은 결국 오만함과 독선이 되었고, 본인은 나름 개혁을 생각했지만 독선적이고 잘못된 방향으로서 수많은 폐단을 낳기도 했었다. 남곤은 과격한 개혁은 없이, 안정적을 중시했다지만 현실적인 업무를 해왔었고 조광조와 딱히 척을 질 생각도 없었으며 오히려 조광조가 뽑힌 특별히 주최한 고과에서 감독관이 남곤이었다.. 인물임에도 지나치게 사림이 꼬장꼬장하게 굴었던 것도 사실이며, 조광조는 죽기 전에도 남곤이 자신을 구하려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남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할 것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있었다. 정작 조광조를 살리려고 중종에게 앞장서서 정면으로 대든 것이나, 조광조가 죽자 가장 슬퍼한 사람이 남곤이었다고 기록됐다. 중종에게도 젊은 사람이 잘 해보려다가 실수를 했을 뿐이라며 죽을 죄가 절대 아니라는 것 외에도 수없이 중종과 언쟁까지 벌이며 앞장서서 조광조를 살리려고 했던 것이나, 조광조가 고과에 장원 급제 때 감독관을 했던 것, 그리고 조광조가 죽은 후에 사관들도 다 알 정도로 가장 슬퍼했다는 것을 보면 남곤은 조광조를 독선적인 면과 잘못된 부분이 있어도 경험이 부족한 젊은 후배가 실수를 할 뿐이라 생각하며 조광조가 장원급제할 때 자신이 감독관이었에도 자신을 정치적으로 공격하며 온갖 음해망상을 품고 있던 조광조를 원망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 중종이 조광조를 죽인다고 할 줄도 모를 때도 중종이 조광조를 찍어내기 하루 전, 남곤에게 밀지를 내려서 정광필을 설득하라 지시했지만 남곤은 정광필을 찾아가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정광필이 쏘아보자 무안해하면서 이장곤더러 대신 말해달라고 하는 등 조광조를 찍어내는 것조차 찬성하지 않고 거부감을 느꼈으나 중종이 두려워서 중종의 억지에 따르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종이 아예 조광조를 죽이려는 순간, 조광조를 살리려고 필사적이 된 것을 보면 중종이 무서워서 파직 정도는 굴복했었으나, 아예 죽이려고 하니 결사적으로 반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인이 기묘사화의 주범으로 몰리고 개혁을 지지하던 사림에게 주적으로 찍히면서 복지부동 성향이 더욱 강해졌다. 남곤은 조광조를 죽음까지 몰고 갈 생각이 아니었으나, 결국 자신이 악명을 뒤집어썼고 결과적으로 젊은 선비들 사이에서 사림파의 차세대 리더라는 명망을 완전히 상실해버렸다. 세력도, 명망도 모두 잃은 허울 좋은 영의정 남곤에겐 하던 대로 하면서 누리던 영달을 계속 누리는 길만 남는다.
중종 18년에는 이미 남곤이 누명을 쓴 것을 그대로 믿는 사관들도 나오고 있었지만, 이런 사관도 이계맹이 기묘사화에 피해를 본 자들을 구하려고 하는 것을 두고 기묘인들이 사람을 볼 줄 모른다고 비판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남곤을 간사하다고 비난하면서 남곤이 기묘사화를 주도했다는 잘못된 사실을 언급하는데 이때 조광조를 발탁하여 천거한 건을 언급하기도 한다. 감독관이었던 남곤이 조광조를 발탁하여 천거한 장본인인 것. 사실 중종만 사사를 외쳤지, 신하들 모두가 소극적으로 반대하거나, 남곤과 정광필이 필사적으로 반대한 것을 보면 "젊은 사람들이 뭘 모르고 열정적으로 일하다가 실수 좀 한 것 갖고 너무한다."라는 인식은 다들 공유하던 것으로 보인다.
죽기 전 자신이 쓴 글들을 꺼내면서 "나는 허명으로 세상을 속였으니 이 글들을 모두 불태워 나의 죄가 더해지지 않도록해라. 나의 무덤에는 비석도 세우지 말고 시호도 청하지 말거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향년 57세에 세상을 떠났다. 조광조가 죽은지 8년 만의 조금 빠른 죽음이었다. 자신의 글들 대부분을 태우지 않고 남겼더라면 당시 문학과 시대, 남곤이라는 인물에 대해 어느 정도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자료가 될 수도 있기에 아쉬울 수 있는 부분이다.
세상을 떠난 뒤 '문경(文景)'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나 김안로의 복귀로 그의 동지들은 4년 만에 풍비박산이 났으며 당장 중종 말년부터 조광조 일파인 김안국이 복권되었다. 김안로의 축출로 잠깐 관작이 회복되었으나, 조광조의 후학의 세력이 강해지자 그들의 탄핵을 받아 1558년(명종 13년) 도로 관작과 함께 삭탈당하였고 선조 초년에는 결국 관작을 추삭(追削)당하였다.
사후에 그가 역적으로 몰려서 가계가 몰락했으므로 그의 가계는 연대도 맞지 않고 정확하지 않다. 본처 정경부인 연안 이씨 사이에서는 딸만 3명이지 아들이 없고 서자로 1570년(선조 3) 식년시 의과에 급제하여 직장(直長)을 지낸 남승사(南承嗣) 한 사람을 두어 겨우 후손을 이어갔으므로 누구 하나 그에 대해 정확하게 재조명하려는 사람도 없었다. 서자인 남승사는 의과에 급제했는데 이극돈의 서자들의 케이스와 같으며 이건 사실 서얼은 당시 문과 응시 자체가 금지되어 있었고 진급에도 제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조선사에서 서자로 고관에 오른 류자광 같은 사람은 씨가 마르게 되고 당상관에 오른 허준은 족보에 서자라고 되어 있음에도 알고 보면 적자일지도 모른다는 말이 돌 정도가 된다. 사실 허준의 경우는 파격적인 행보를 거듭했던 선조의 영향이 더욱 크겠지만 말이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도 잘 썼으나 사화를 일으킨 인물이라는 누명을 쓰는 바람에 후대 사림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당장 이 누명은 중종 시대 때부터 벌어지는 징조가 있는데, 정광필이 아랫사람들은 억울하게도 남곤과 홍경주가 저지른 일인 줄 알고 있으니, 중종이 한 일이라는 것을 널리 알려서 이것은 두 사람이 한 게 아니라 임금의 뜻이라는 것을 널리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얼마나 욕먹었는지 후에 현종 때 김만중이 허적을 남곤과 심정에 빗대어 탄핵했다. 탄핵 과정은 서인인 김만중이 좁게는 탁남, 넓게는 남인의 영수였던 허적을 견제하려고 한 것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허적은 서인 세력들과도 인척으로 엮어져 있었고 서인에게도 온건히 대했으며 송준길, 민정중, 민유중, 김익훈, 김석주와 인척이었으므로 허적은 김만중, 김만기와도 인척이 된다. 그래서 허적이 경신환국 이후 사약을 받을 때 서인 세력에서도 반대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의외로 송시열이나 김수항, 김수흥, 민정중, 민유중, 이단하, 홍처량, 이정영, 정지화, 이상진 등은 허적을 살리려고 했다.
3. 기타
그의 문장은 거의 사라지고 유일하게 시 "신광사" 1수만이 전한다.
庭前柏樹儼成行(정전백수엄성행) / 뜰앞의 잣나무는 삼엄하게 늘어서
朝暮蕭森影轉廊(조모소삼영전랑) / 아침저녁 우뚝한 그림자가 회랑을 돈다
欲問西來祖師意(욕문서래조사의) / 서쪽에서 온 조사의 뜻 물으려 하니
北山靈風送凄凉(북산령풍송처량) / 북산의 신령한 바람 서늘한 기운 보내온다
훈구파로 잘못 알려져 왔지만 실제 그는 사림파로 김종직(金宗直)의 제자이고 조광조의 스승인 김굉필과는 동문이자 친한 사이였다. 그는 훈구파가 아니라 실은 임사홍과 함께 사림파에 의해 오점으로 기록된 인물이었던 것이다.
남곤의 묘는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봉암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