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2. 생애
김종직의 문인인 연헌 이의무의 아들로 그 역시 김종직의 제자인 표해록의 저자 최부의 문인으로서 김종직의 일파였으나 조광조와 달리 남곤처럼 온건 사림파에 속했다. 1545년 을사사화의 주역인 이기의 아우이며, 형은 이권으로 이들 삼형제는 모두 문(文)과 무(武)에 뛰어났다. 형인 이권과 동생인 이행이 각각 무와 문에 뛰어나 가운데 있던 이기는 늘상 샌드위치 신세였다고 불만을 토로했었다.
벗인 남곤, 박은과 함께 시문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연산군 시절 갑자사화 때 함께 화를 입어 박은은 죽고 남곤과 이행 두 사람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중종 때 관로가 비교적 순탄하여 대사간 등을 거쳐 대제학,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하다가 이후 벗인 남곤이 영의정에 있을 때에는 그의 파트너였고, 남곤 사후엔 심정, 이항과 함께 주도권을 잡았는데, 그래도 양심이 있어서 영의정 자리는 정광필에게 양보하고 심정이 좌의정을 자신이 우의정을 맡았다. 이후 김안로의 모략으로 유배를 당하고 유배지에서 객사했다. 본래는 수염이 많았던 털보였지만, 유배하는 동안 거의 뽑혀져서 죽을 때, 검사를 한 후에 확인을 했다고 한다.
그의 묘는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도문리에 자리하고 있으며, 인근 삼월리에는 그가 심었다고 천해지는 회화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3. 기타
김안로가 남곤의 탄핵으로 인해 처음 쫓겨난 이후에 작서의 변이 발생하는데, 이를 기회삼아 집권을 하려는 김안로는 아들 부마 김회(金禧)에게 대신 중에서 누구를 구워 삶으라고 지시했다. 김회의 술 선물 공세에 넘어간 것이 이행이었다. 과연 뒤에 김회가 "아버지가 다 죽어갑니다. 복권만은..." 하고 읍소하자 중종이 대신들 모아놓고 "이제 김안로를 복권시키자." 한 자리에서 "네, 전하 말씀이 옳습니다." 한 것이 이행. 당시 정광필, 심정이 반대했음에도 중종은 이행의 한마디에 반색하며 기뻐했다. 아무튼 그 덕인지, 자신과 같은 걸음을 걸었던 심정과 이항은 사약을 먹어야 했지만, 그래도 귀양에 그쳤으니 김안로 입장에선 참작한 셈. 이 일로 보면, 권신에게 필요한 결단력과 냉정함이 약한 호인에 불과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통틀어 정치력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은 김안로를 생전에 능숙하게 저지한 이행의 벗 남곤이야말로 편히 자택에서 세상을 떠나는 최상의 정치력을 보여준 것과 새삼 대비되는데, 물론 남곤 또한 조광조를 몰아낸 장본인이며 실세 영의정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니.
남곤 사후 온건사림파의 수장 자리를 이어받았다. 하지만 이행이 김안로를 내치는 데 실패하고 쫓겨난 이후 온건사림파는 약간 주춤하거나 약간 흩어지는 양상을 보이는 듯 보이다가 이후 남곤과 같이 중종의 친위쿠데타인 기묘사화에 협조했던 유관과 온건사림파의 핵심이자 학문으로 이름이 높던 성세창이 온건사림파의 새로운 수장이 된 듯하며 그 외에도 홍언필, 윤인경 등이 온건사림파의 수장이자 거물급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유관 역시 윤임의 대윤에 가담했고 인종 때 좌의정에 올랐다가 을사사화로 윤임, 유인숙과 함께 목숨을 잃었으며 성세창은 명종 때 좌의정에 오르지만 을사사화로 윤임과 연루되어 귀양에 처해졌고 귀양지에서 사망했다.
권신으로 후대인에게 평가절하되기도 하지만, '문형'을 12년간 역임하여 대제학이라는 시스템을 정비한 공로가 있다. '문형'이란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 지성균관사를 겸임해야만 일컬어지는 칭호로, 오늘날로 따지면 국립도서관장과 국가가 반포하는 공식문건의 수석 작성자 혹은 총감독관, 국립대학 이사장을 역임하는 것과 같다. 그는 문형으로서의 자의식과 자부심이 상당하여, 후임 대제학을 추천하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아, 소세양, 정사룡, 김안로 등을 키워주거나 추천하였다. 조선조 통틀어 정승으로서 문형을 겸한 몇 안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대제학은 2품직이라 1품으로 승진하면 후임 인물을 추천해야 하는데 우의정, 좌의정이었음에도 문형 직책을 겸임하였다)
그의 본관은 상술했듯이 덕수 이씨인데, 직계 후손에는 인조 때 대 문장가이던 택당 이식(李植, 1584~1647, 사후 영의정 추증)이 있으며, 방계 후손으로는 율곡 이이와 충무공 이순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