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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인물

김안로(金安老)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13|조회수34 목록 댓글 0

1. 개요

조선 중종 시기의 권신

2. 생애

1481년 아버지 김흔(金訢)과 어머니 파평 윤씨 윤지(尹墀)의 딸 사이의 3남 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작은아버지는 영의정 김전인데 김전과 김흔 형제는 모두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이다.

중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신임 관원의 등용을 최대한 억제하고 빈자리에 자신이 필요로 하는 사람을 겸임시킴으로써 그 사람에게 권력을 몰아주고는 하였다. 첫 번째가 조광조였는데 그의 최후는 기묘사화. 조광조 다음에 남곤이 권력을 잡았지만 그때로부터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고 그의 뒤를 이은 이행, 심정, 이항 등은 사림임에도 현실적이면서 능력 있던 남곤과는 달리 쓸 만하고 청렴한 관료들이긴 해도 정치적으로 리더십이 특출난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에 중종이 이들을 대체할 인물을 물색하니 바로 김안로였다.

원래 김안로는 기묘사화 때 조광조 일파로 분류되어 유배를 가긴 했지만 풀려났다. 그 이후로 신진관료로 세간의 주목을 받으면서 대사간, 부제학, 대사헌, 이조참판, 예조참판을 거쳐 이조판서의 자리에 오르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가 화근이 될까 우려한 남곤이 김안로를 탄핵하여 김안로는 경기도로 유배를 떠났지만 남곤이 죽은 이후 아들인 부마 김희(金禧)를 통해 권신이자 간신인 이행, 중종, 대비에게 감언이설을 하여 유배에서 풀려났고 다시 대호군이라는 벼슬길에 오르면서 세력을 확대했다.

놀랍게도 그는 사림과 대간의 지지를 받아 권력을 잡았다. 훈구파 권신인 이항, 심정, 이행의 횡포에 사림들이 치를 떨었다고는 하나, 사실 기묘사화의 원흉들로 몰렸기 때문에 사림들에게 미움을 받았을 뿐 이들은 김안로와 달리 탐욕스럽지 않고 청렴했다. 오히려 사림과 대간이 지지한 김안로의 부패가 심각했다. 또한 심정과 이행은 속고내 토벌 때의 조광조와 달리 현실적인 책략에 찬성을 던지며 현장의 일에 열성적이었다. 강직한 정광필이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완벽하진 않아도 별 문제가 없이 그럭저럭 제 할 일들을 했었다.

당장 김안로 때문에 심정과 이항이 유배를 떠났을 때, 사림들이 저지른 짓이라는 비판이 생기자 사림들은 "우리 사림들을 탄압하려는 수작이다."라고 몰아붙였다. 사림들의 입장에선 사소한 수준에 불과하지 딱히 죽을 죄가 없는 심정과 이항을 죽이려고 들었기에 김안로를 위해서 죄 없는 사람들을 해치려는 비판을 듣는 상황이었으니, 앞뒤를 가리지 않고 공격하던 것이다. 세자의 지위가 불안해서 세자와 사돈지간인 김안로를 끌어들여 세자의 지위를 탄탄히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김안로는 현실주의자였지만 상대방을 잔혹하게 보복하는 냉혹한 성격이었다.

김안로는 이후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하기 시작하고 한성부판윤을 거쳐서 예조판서를 제수받았고 자신의 인맥을 바탕으로 한 사림, 대간들과 손을 잡고 공포의 숙청 정치를 휘둘렀는데 그야말로 사림의 흑역사. 대간의 지원 사격과 중종의 버프를 받은 김안로는 그와 대립한 이항, 심정을 사소한 실수를 꼬투리 잡아 숙청했다. 자신의 집권을 도왔던 이행이 실수를 깨닫고 정광필 등의 다른 대신들을 규합해 반격을 시도하자 잠시 예조판서에서 체직되면서 권세가 주춤했지만, 전열을 재정비하여 이행까지 숙청했다. 숙청된 이항, 심정은 잇달아 사사되었고 이행은 사사되기 전에 유배지에서 자연사했다.

이후 김안로는 지중추부사로 복귀하여 대제학을 겸하면서 권력을 독점하기 시작했고 다시 예조판서에 제수된 뒤 이조판서로 옮겨서 거의 전권을 틀어쥐면서 최강의 권신으로 자리잡았으며 김안로는 대규모 옥사를 일으키는 등의 폭력 정치를 행하였다. 심지어 자기의 친인척들도 자기와 뜻이 맞지 않으면 숙청을 해버렸다. 권력을 잡은 그 역시 다른 권신들처럼 부정축재를 하면서 권세를 부렸는데 김안로의 사치는 집에 단청을 칠하고 각종 서화를 수집하는 등 상당한 수준이었다. 또한 김안로는 호조판서도 했다. 사헌부 문에 다음과 같은 익명서가 붙을 정도였다.

"國국柄병倒도落락安안老로手수, 百백年년社사稷직, 誰수爲칭主주?"

국권이 안로의 손에 떨어지고야 말았으니, 백년 사직의 주인이 누구라 하겠는가?

중종실록 중종 26년(1531) 12월 10일자 3번째 기사

하지만 이후에도 좌찬성을 거쳐 6년간 우의정, 좌의정에 오르며 승승장구했다. 중종 32년(1537) 5월에는 자신을 따르지 않는 정광필 역시 공격해서 유배를 보냈고, 살아 생전에 자신을 경계했던 남곤에게도 앙심을 품어 같은 달에는 남곤이 장경왕후의 묘를 잘못 쓴 죄를 뒤늦게 물어 그의 관작을 추탈하게 했다. 정광필을 유배 보냈을 때가 김안로의 마지막 위세였다.

말년에는 경원대군을 등에 업은 문정왕후와 윤원형, 윤원로 형제들이 급부상하는 것에 위기를 느껴 이들을 숙청하려는 선을 넘게 되자 이러다가는 가만히 냅두면 안 되겠다 싶고 자신에게도 위협적인 인물이 될 가능성도 있어 중종은 도승지 양연에게 '김안로를 없애야겠으니 여론을 조성하라.'는 밀지를 내렸다. 양연은 대사헌으로 옮겨서 "왕의 기대에 부응해 대간들과 함께 김안로의 횡포가 심해 주벌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하고 당시 우의정이던 윤은보에게 비망기를 내려 조정에 사람이 없음을 걱정한다는 극론하였다. 또한 도승지 임백령도 중종의 뜻을 받들어서 김안로를 축출하는 데 동참했다. 또한 김안로의 측근이던 권예와 김안로와 친분이 높던 김인손과 김안로를 복권시키는 데 앞장섰던 심언광, 심언경 형제도 김안로에게서 등을 돌리면서 김안로를 축출하는 데 동참했다.

윤원로가 김안로의 죄상을 몰래 중종에게 아뢰니, 중종은 무사를 시켜 김안로의 무리를 박살내려 했다. 윤임과 초친 윤안인과 함께 서로 의논하여 그렇게 하지 않고 윤임이 중종의 뜻을 양연에게 전달했고 최보한, 윤안인이 받아온 밀지를 양연에게 말해 서로 의논하고 결정하여 김안로를 탄핵시켰다가 사사하고 직첩 회수와 삭탈관직을 하는 선에서 끝냈다. 이때 함께 죽은 허항, 채무택과 함께 정유삼흉으로 불린다.

집안의 상황 때문인지 아들 김시는 과거에 응하지 않고 서화에만 전념했는데 당시 최립(崔笠)의 문장, 한석봉의 글씨, 김시의 그림을 일컬어 '삼절(三絶)'이라 했을 정도로 명망이 높았다고 한다.

3. 기타

윤휴의 <백호전서>에 따르면 김안로는 생전 사사당하는 정적이 죽었는지 죽은 체 하는지 의심스러워 코에 불을 붙여 확인을 하고는 했다. 김안로가 사약을 마시던 날 사약을 마셔도 죽지 않고 입이 써 생밤을 찾다가 금부나졸들이 달려들어 목을 졸라 죽였고 김안로가 평소에 하던 대로 코에 불을 붙여 시신을 모욕했다.

어우야담에는 김안로가 파멸하는 징조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 아들 김시의 결혼식날, 김안로 역시 아비로서 사모관대하고 혼인을 주관하고 있었는데 이때 솔개 한 마리가 날아와 김안로가 쓴 사모를 낚아채갔다. 모두 그것을 보고 기이하게 여기던 찰나, 어명을 받고 온 나졸들이 들이닥쳐 김안로를 잡아갔고 하객들 모두 혼비백산 놀라 도망치다가 같이 변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실록에는 혼례를 노려 체포했다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지만, 김안로를 잡아들인 후 어떤 벌을 내릴지 중종이 신하들과 의논하던 중, 윤안인이라는 신하가 "김안로를 잡아가던 날 저녁이 마침 그의 아들 초례(醮禮)여서 손들이 좌석에 가득하였습니다."라고 말한 일이 기록된 기사는 있다. 아들의 혼례 즈음해서 실각한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중종실록 중종 32년(1537) 10월 27일자 4번째 기사

김안로가 축출당한 이후에도 당시 영의정이자 그의 측근이던 김근사라는 인물은 김안로와 허항, 채무택이 바로 쫓겨나간 것과 다르게 영의정 자리를 며칠 더 유지했으나 이후 영의정에서 물러난 뒤에 유배를 떠났다. 다만 김안로와는 달리 사약을 마시지 않고 편안하게 사망했다.

퇴계 이황의 인품과 덕망을 보고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해서 이황을 미워했다고 한다.

이황의 형인 이해도 김안로가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사실 이해는 김안로와 먼 인척 관계이기도 하다. 김안로의 팔촌 누이가 이해와 혼인했다. 두 사람의 고향이 영주로 동향 사람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해의 고향이 영주인 것은 맞지만, 실록에는 김안로의 고향은 한성이고 영주에 농장이 있다고 적혀있으므로 이건 확실하지 않다. 말하자면 이황도 김안로와 먼 인척이라는 것이다.

부친의 영향을 받아 본인도 시서화에 능했고 얼굴도 굉장히 잘생겨 명나라에 갔을때 명나라 사람들도 감탄했다고 한다.

세자 시절 인종이 어느 정도 김안로의 덕 아닌 덕을 보기도 했다. 인종의 누나이자 유일한 동복남매인 효혜공주가 김안로의 며느리였기 때문이다. 작서의 변 등을 통해 중종의 서장자였던 복성군과 그의 어머니 경빈 박씨가 제거되어, 세자의 지위가 어느 정도 안정될 수 있었다. 물론 인종의 탓은 절대 아니었지만, 유학에 충실했던 인종이 정치관도 전혀 맞지 않은 희대의 권신 덕을 보았음은 정말 역사의 얄궂음이라 할 것이다.

최초의 서원 백운동서원을 세운 주세붕과 악연이 있다. 김안로가 중종 때 직제학을 지내면서 항상 임금의 의견에 영합하고는 했다. 옆에서 보던 주세붕이 김안로의 간교함에 노해 김안로는 곧을 직(直)자를 쓰는 직제학이 아니라 굽을 곡(曲)자를 쓰는 곡제학이라고 비꼬았다. 김안로는 여기에 앙심을 품어 훗날 주세붕을 탄핵했다.

실록에 따르면 김안로가 개고기를 굉장히 즐겼다고 한다. 그래서 개고기를 뇌물로 벼슬 청탁도 들어주었다고 한다.(정확히는 사관의 의견에 가깝다.) 그래서 그 전까지는 선비들도 개고기를 즐기고는 했는데, 김안로가 죽은 뒤에는 '개고기는 김안로 같은 간사한 자나 먹는 음식'이라는 말이 나돌아서 선비들이 개고기를 기피하게 되었다는 말이 있는데 훗날 개고기 관련 기록이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그냥 설화이거나 사실이더라도 잠깐의 유행이었을 것이다.

그의 고조부가 바로 김자지이다. 생전에 세도가들의 부패를 정면으로 비판한 상소를 여럿 올린 인재였던 고조부와는 참 다른 인생을 산 인물.

김안로의 친구 중에는 기묘사화 때 파직당한 김안국이 있다. 물론 김안국은 김안로와 행보를 같이 하지 않아 후대까지 천수를 누렸으나 김안국을 복권시키는데 힘을 쓴 것이 바로 김안로이다. 김안국은 김안로가 실각하고 사형당한 후에도 그의 나쁜 점을 말하지 않고 김안로의 가족들을 돌봐줬다고 한다. 기묘사화를 일으킨 것은 중종이지만 중종에 의해 기묘사화를 주도했다고 억울한 누명을 쓴 먼저 죽은 남곤 일파인 심정, 이행 등을 박살낸 것도 김안로가 아닌가? 대간들 다수는 김안로에게 환호까지는 아니더라도 동조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비슷한 사례인데 기묘사화 때 조광조의 추종자였던 이들은 각각 대윤과 소윤에 들어가 서로 물어 뜯고 사약을 건넸다. 그래서 선조 즉위기가 되면 재야에 묻힌 이를 제외하고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딱히 없는 진흙탕 판이 되었다.

한때는 조선 전기 최강의 권력을 휘둘렀던 사나이로 그가 겸직했던 직함만 치면 한명회도 능가했다. 동지경연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춘추관사, 성균관사, 이조판서, 지의금부사, 도총부 도총관을 동시에 겸직했던 사람이다. 또한 그 외에도 김안로는 한성부판윤, 예조판서, 호조판서, 세자시강원 좌빈객, 내의원제조, 판의금부사, 좌찬성, 지중추부사 등도 했으며 과거 시관도 겸하면서 과거 급제자를 선발하기도 했다. 조선 시대는 지금의 정부 구성과는 달라서 위의 겸직 중 일부는 당연히 겸직하는 직책이다.

예를 들어 학문연구기관인 홍문관 대제학은 원래 같은 뿌리에서 나온 기관인 예문관 대제학을 겸직하며 홍문관의 종2품 제학 이상과 예문관의 정4품 응교 이상은 모두 타관이 겸직하는 직책이다. 홍문관의 대제학은 경연에 참석하기 때문에 '동지경연사'라는 직함을 받았다. 성균관 대사성은 법제상 전임직이지만 겸임하는 경우도 많아 홍문관 대제학 겸 예문관 대제학 겸 성균관 대사성 혹은 지성균관사를 문형이라고 불렀다. 춘추관은 100% 겸직으로만 이루어지는 기관으로 정2품이 겸직하는 지춘추관사 위에는 영의정과 좌의정 또는 우의정이 겸직하는 직책이 둘이나 있다.

오위도총부도 본래 소임 없는 문무당상관을 대우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으로 대체로 문신이 겸임하였고, 정2품인 도총관은 종실이나 외척이 담당하는 것이 관례였으며 군사를 움직이는 실권은 병조에 귀속되었다. 마지막으로 의금부 또한 종2품 동지의금부사 이상은 겸직이었다. 따라서 위를 정리하면 김안로는 1. (이조판서)로서, 다른 정2품관이 겸직하는 a.(홍문관 대제학 + 예문관 대제학 + 춘추관사 + 성균관사 + 동지경연사)를 맡고, b. 마찬가지로 겸직 직책인 지의금부사를 겸직, c. 외척으로서 마찬가지로 겸직 직책인 도총부 도총관을 맡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용천담적기에서 귀태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실록에 의하면 김안로에게는 눈이 멀고 못생긴 딸 하나가 있었다. 김안로가 그 딸을 미워하여 어떻게든 죽이려고 했는데, 죽이려고 굶기면 울부짖으며 밥을 달라고 하여 이웃이 들을까 두려워 못 굶기고, 칼로 찔러 죽이면 시체에 칼자국이 나서 친척들이 살해당한 것을 알게 될까 두려워서 못하였다. 그 흔적을 감추려고 독사(毒蛇)를 항아리 속에다 넣고 뚜껑을 덮어서 나오지 못하게 하여 독이 잔뜩 오르게 한 다음 뚜껑을 열고 그 딸로 하여금 항아리에 발을 넣게 하니 한 번 물자 그 자리에서 죽었다. 김안로는 속으로는 매우 기뻤으나 겉으로는 슬픈 척하면서 이웃 일가들에게 둘러대기를 ‘내 딸이 변소에 가다가 독사에 물려 죽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중종실록 85권, 중종 32년 10월 27일 정원에 비망기를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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