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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인물

이거이(李居易)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12|조회수19 목록 댓글 0

1. 개요

여말선초의 관료, 조선의 정승

2. 생애

조선 건국 후 우산기상시, 평안도병마도절제사, 참지문하부사 등 여러 벼슬을 거쳤다. 이후 1차 왕자의 난에 개입해 정사공신에 이름을 올렸으며 태종 즉위 후 좌명공신에 올랐다. 아들과 함께 양 왕자의 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공신 중의 공신이다. 아들 이저는 태조의 적차녀인 경신공주와 결혼했으며 또 다른 아들인 이백강은 태종의 적장녀인 정순공주와 결혼했다. 즉, 태조와 겹사돈이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 보면 정말 많은 탄핵을 당했는데도 용케 살아남는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한다. 탄핵된 내용을 보면 살려두는 게 용한 수준. 왕실과의 혼인 관계와 태종의 즉위를 도운 공신이라는 점이 작용했던 것 같다. 먼저 정종 때 사병 혁파 정책이 시행되자 사병을 내놓지 않고 버티다가 사병 혁파를 주장한 사람들을 가리켜 "한 두 놈이 한 덩어리 고기와 같다."고 불평하였다. 대간에서는 이거이가 왕실과 인척 관계이기에 조영무 등만 탄핵하고 넘어가려 했지만 이거이의 도를 지나친 언행에 정종이 받아주지 않았음에도 계속 상소를 올려 이거이의 처벌을 청했다. 이후 정종이 이거이 부자를 불러 탄핵의 내용과 같은 말을 했는지 묻자 그런 일이 없다고 답해 이를 불쌍하게 여긴 정종이 이거이를 계림부윤으로 좌천시키고 적당히 넘어가 주었다. 이러고도 이거이는 정신을 못 차렸는지 부임지로 가는 행차를 아주 화려하게 하여 또 비판받았다.

이후 태종 때 또 한 건이 터졌는데 조영무에게 "태종의 아들들이 왕 되면 권력에서 밀려날 것 같으니 만만한 상왕을 다시 앉히자"고 한 것. 이는 대놓고 역모를 모의한 것이다.

처음에 임금이 의안 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ㆍ완산군(完山君) 이천우(李天祐) 등을 불러 밀교(密敎)하였다.

“신사년에 조영무(趙英茂)가 나에게 고하기를, ‘신(臣)이 이거이의 집에 가니, 이거이가 신에게 이르기를, 「우리들의 부귀한 것이 이미 지극하나, 종시(終始) 보존하기는 옛부터 어려우니, 마땅히 일찍이 도모해야 한다. 상왕(上王)은 사건을 만들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금상(今上)은 아들이 많지만, 어찌 다 우리들을 연휼(憐恤)하겠는가? 마땅히 이를 베어 없애고 상왕을 섬기는 것이 가하다.」하였습니다.’하였다. 내가 이를 듣고, 조영무에게 경계하여 누설하지 말도록 한 지 이제 이미 4년이다. 이거이도 이미 늙었고, 조영무도 또한 곧 늙을 것이다. 만약 한 사람이라도 유고(有故)하면, 이 말은 변별(辨別)하기가 어렵다.”

임금이 이거이를 궐내(闕內)에 비밀히 불러 조영무(趙英茂)와 대질(對質)하여 변명(辨明)하게 하고, 유사(攸司)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였다. 종친 이화(李和)와 공신 상락 부원군(上洛府院君) 김사형(金士衡) 등 35인이 예궐(詣闕)하여, 이거이의 말을 변별(辨別)하여 밝히도록 하고, 또 유사(攸司)로 하여금 이를 알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종친ㆍ공신ㆍ삼부(三府)ㆍ대간(臺諫)에게 명하여 대궐의 뜰에 모여 증거(證據)하여 듣도록 하였다.

태종실록 태종 4년 갑신(1404) 10월 18일

탄핵을 받은 후 태종이 이거이와 조영무를 불러 그러한 일이 있느냐고 묻자 이거이는 눈물을 흘리며 "두 아들이 부마이고 저도 과분한 자리에 있는데 어찌 딴 생각 품었겠습니까? (조영무가 진짜 그런 일이 있다고 말하자) 조 대감! 내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나를 해하려 하오?"라고 변명을 했다. 이에 조영무는 "그대가 있고 없음이 내게 무슨 손익이 있겠소? 난 단지 신하 간의 의리보다는 군신 간의 의리가 중하다고 생각해 말한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점잖게 표현은 됐지만 "당신에게 원한은 없지만 주상께서 사실대로 털어놓으라 명하셨으니 어쩌겠소." 정도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태종이 이거이는 공신이니 봐주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천명해 본인의 아들들과 함께 고향인 진주(鎭州)으로 유배를 갔고 이후로도 "이거이를 죽여야 한다"는 대간의 탄핵이 들어왔지만 태종은 무시한 채로 태종 12년(1412년) 고향에서 죽었다. 공신이니 봐주겠다는 것도 있지만 아버지의 언질도 약간의 영향이 있어 보인다. <태종실록>을 보면 태종이 태조와 만나서 "이거이 부자가 이런저런 혐의가 있어서 죽음으로 다스릴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태조에게 말을 하는데 왕위에서 물러난데다가 조사의의 난 이후 남은 권력마저도 모두 사라져 뒷방 늙은이가 된 태조가 "그래도 사돈지간에 주상을 도와서 같이 일했던 공신이니 목숨만은 살려주라"고 언질을 한다. 이거이는 무인정사의 주역으로 자기 자식들과 총애하던 신하들을 도륙낸 사돈인데도 말이다. 아무래도 이성계는 피비린내에 진저리가 나 피보는 건 피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물론 태종이 유래가 없을 정도로 숙청의 강도가 온건한 편이기는 했다.

이거이가 정말로 저런 말을 했다면 이건 역모죄를 넘어 국가전복죄나 내란죄이며 왕과 왕자들을 내친다는 것은 왕족 자체를 불신하거나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은 정도전의 죄목인 종친 모해죄보다 더욱 막중한 죄다. 그런데 신하들이 사형하라고 계속 상소를 올리는데도 끝까지 처벌하지 않은 것을 보면 애초에 정계 축출을 목적으로 적당히 쑈를 한 것으로 봐야할 듯. 웃긴 건 양위 쇼에서 웃은 민무구와 민무질은 유배 후 사형, 형들의 억울한 죽음을 세자에게 넌지시 토로한 민무휼과 민무회도 사형에 처했다는 것. 이거이는 사돈에 불과하지만 민씨 4형제는 자신의 처남들인데 말이다. 사실 태종이 이거이에게 천수를 누리게 할 의지가 강했다고 봐야 한다. 태종이 이거이를 진짜 죽이려고 생각했다면 정황 증거가 모호한 발언보다는 어디까지나 1차 왕자의 난 당시 표면적으로 임의로 무안대군을 살해한 죄를 묻는 것도 가능했지만 반란 당시에만 '내가 화가 매우 났지만 정국이 불안하니 참는다'고 말했을 뿐 단 한 번도 무안대군 살해 치죄문제를 물은 적이 없다. 그리고 같은 유배라도 이거이 부자의 경우는 본관이 있는 고을인데다 좌천 당시 구설수에 오른 정황 등으로 미루어 당시 기준으로 재산 규모도 상당할 가능성도 높은지라 '중앙정치참여 금지' 성격에 가깝다. 하륜의 설화 당시 이미 죽은 정도전이 이숭인 장살문제를 혼자 뒤집어 쓴 것과는 대조된다. 역설적으로 민씨 4형제는 고려시대부터 중앙 정계에 연이 많은 명문가 외척이라 더 처분을 가혹하게 한 측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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