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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인물

조영무(趙英茂)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12|조회수31 목록 댓글 0

1. 개요

조선의 개국공신, 정사공신, 좌명공신이다.

2. 생애

원래는 이성계의 인적 조직인 가별초 중 하나였으나 그의 무예를 눈여겨 본 이성계가 그를 키워준 덕에 크게 활약했다. 1392년 이방원의 명을 받고 조영규 등과 함께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죽였다. 이성계를 추대하고 조선의 개국에 참여해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조선 개국 이후부터는 정도전에게 불만을 품고 이방원의 심복이 되었는데 1398년 1차 왕자의 난 당시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 1등에 봉해졌다. 그 후 박포가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었다는 것을 이방원에게 알려 박포가 죽주에 유배되게 한다.

그 후 1400년 이방간이 박포의 충동질에 넘어가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이방원을 도와 좌명공신 1등에 봉해진다. 이후 태종이 사병 혁파를 실시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무기를 가지러 온 군관을 폭행해 잠시 동안 황주에 유배되기도 했다. 애초 태조의 은덕으로 출세한 조영무가 태조를 저버리고 이방원 측에 가담한 원인이 정도전의 사병 혁파 시도 때문이다.

그래도 이후 복귀하여 높은 벼슬을 누리다가 우정승까지 올랐고, 1411년 그가 추천한 무관이 "일을 엉망으로 한다"는 명분으로 관찰사 심온에게 파직당해 사헌부가 이를 탄핵함에 따라 그에게 불똥이 튀기도 했지만 사직을 청해도 태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아 계속 우정승 직위를 유지했다.

그로부터 2년 후, 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해서야 비로소 받아들여졌으며 조용히 경기도 광주로 내려간 후 그 곳에서 1414년 숨을 거두었다.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은 그의 호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3. 평가

그야말로 담백하고 우직한 전주 이씨 문중의 충성스런 가별초이지만 원래 정치적 통찰에는 좀 약한 면이 있었다. 정종 시절까지만 해도 무려 주군의 주 정책인 사병 혁파에 반대해 어명을 받들어 무장을 해제하러 온 군관을 폭행할 정도. 정도전 시절의 사병 혁파 작업이 그 현실적 필요성과 별개로 정적 숙청 성격을 띠었었던걸 떠올리고는 2차 사병 혁파를 그냥 단순히 군신간의 의리를 어기고 재산과 목숨까지 다 뺏으려는 배신스러운 토사구팽으로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시범 케이스로 귀양형에 처해졌으나, 애초에 별로 왕권에 위협이 될 만한 인물은 아니었기에 머지않아 복귀했다.

귀양생활 동안 무슨 처세의 묘리라도 깨우쳤는지 복귀한 후에는 함부로 누구와도 척을 지지 않도록 신중하게 처신했다. 하륜과 이숙번이 뭘 하려고 하면 말리고 들어서 일하기 힘들었다고 불평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 태종의 공신 중 상당수가 토사구팽의 희생양이 되어 민씨 형제는 목숨을 내놓고 가문이 몰락했으며 거만했던 이거이 부자와 이숙번은 목숨은 건졌으나 귀양지에서 야인으로 삶을 마친 반면 조영무는 이런 처신 덕분에 일생토록 영화를 누렸다. 사실 정종 때 잠깐 내쳐진 것도 태조가 세자 시절의 이방원에게 "조영무와 조온과 이무는 날 배신한 놈들인데, 나중에 너라고 배신을 안 할 것 같냐? 종사를 생각해서 쫓아내라"며 쫓아낼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사실 조영무나 조온이나 태조가 키우다시피한 이들인데 배신을 당했으니 태조 입장에서는 분노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그나마 이것도 조영무가 무고하다며 대간들이 상소를 올려서 곧 복직되었다. 다만 정종 말의 2차 사병혁파 때는 진짜로 큰일날 뻔 하긴 했었다.

재미있는 것은 역시 태종의 공신으로 조영무와 함께 정승 반열에 올랐으며 영화를 누린 하륜은 조영무와 비교하면 성격이나 처신이 완전히 반대였다는 점이다. 하륜은 능력과는 별개로 탐욕스런 인물이었고 다른 사람이었으면 당장에 목이 날아갔을 법한 실수도 여러번 저질렀으며 정적들이 많았다. 하지만 조영무는 평생동안 그냥 전주 이씨 문중의 가별초라는 입장을 고수했기 때문에 왕권을 위협할 건덕지가 아예 없었다.

정승이었음에도 정승의 권세는 부리려 하지 않아서 공직생활도 깔끔한 편이었다. 그리고 처신은 신중했으나 동시에 왕의 비위를 맞추는데 급급한 예스맨이나 표리부동과도 거리가 멀었다. 왕 앞에서도 할 말은 하는 편이었으며, 실제로 태종이 정도전을 폄하하려 할 때 당당하게 "뭐 정도전이 잘못한건 맞는데, 어쨌든 본심에는 나라를 위하는 의도도 있지 않았겠습니까?"라면서 죽은 정도전을 변호하며 이의를 제기한 일도 있었다. 실록에서 그의 졸기를 쓴 사관도 "소박하고 공정하고 바른 말을 잘했다"며 칭찬할 정도. 태종의 손자인 세조의 공신으로 본다면 청렴하고 엄숙한 구치관이라 볼 수 있다.

조영무 이후 세종 시기에 최윤덕이 그 뒤를 이은 무관 출신 정승이 되는데, 최윤덕을 정승에 앉히기 몇 년 전 세종대왕은 김종서에게 초기에 무관 출신으로 정승을 지낸 자가 있다는데 '어찌 윤덕보다 훌륭한 자이겠는가?'라고 말했는데 아마 조영무를 가리킨 듯하다. 그러면서 세종은 "하륜이 정무를 처리할 때 조영무가 이렇다 할 의견을 말하지 않았다"며, "최윤덕도 무인 출신이라 학문이 부족해 조영무처럼 의견을 말하지 않을까봐 우려된다"는 아쉬움을 덧붙이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조영무가 마냥 끌려다니듯 예스맨스러운 공직생활을 한 것은 아니다. 실록에 적혀 있듯이 의외로 필요할 때는 바른말도 곧잘 하는 편이었고, 태종 재위기 중에 갑사들이 모욕을 받아 사헌부와 격돌했을 때는 갑사들의 편에 서서 원인을 제공한 범인을 처벌해 달라고 강하게 태종에게 간언을 하기도 했다. 게다가 하륜이 불도저마냥 정책을 추진할 때 신중론을 펴며 브레이크를 자주 걸었던 게 조영무였을 정도.

4. 여담

바둑과 관련해 흑역사를 가지고 있다. 아래 직급이던 상호군 권희달이 총제 이밀과 내기 바둑을 두고 있는 상황이었고, 당시 영승추부사였던 조영무가 이것을 보다가 옆에서 훈수를 둔 것. 이것 때문에 시비가 붙자 아래 직급의 반항에 노한 조영무는 이밀의 종리(從吏)를 가두고, 권희달에게 베 100필을 징수했는데 이쯤 되자 이것을 부당하다고 여긴 권희달이 조영무와 말싸움을 하다가 관대를 풀어 조영무 앞에 던져버리고 조영무의 집무실에 들어가 욕설을 퍼붓고 깽판을 친 것. 이에 태종도 크게 노해서 조영무를 꾸짖고 권희달을 파면시켰다고 한다. 이 일화는 <용의 눈물>에서 코믹하게 각색되어 등장한다.

태종 2년에 기생 소생이었기에 입궁한 지 5달 만에 10세의 나이로 출궁한 궁녀 관음을 첩으로 삼았다가 태종 12년에 탄핵을 당하게 되지만 태종이 비호해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사건 또한 <용의 눈물>에서 다뤄졌는데, 전직이 아니라 현직 궁녀로 나오며 기록보다 나이가 다소 많게 나온다.

조영무가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에 봉해져 본적을 한양으로 옮기게 되면서 조영무의 아들인 조서 대부터 한양으로 본관을 개관하였다. 한편으로 조영무의 후손은 조영무가 한양 조씨의 시조 조지수(趙之壽)의 장자 조인재(趙麟才)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데 한양 조씨 측에서는 모든 주장을 부인하여 조인재의 후손을 일족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또한 조영무의 후손이 본관만 같은 다른 한양 조씨라 보고 있다. 1894년 편찬된 관북읍지 영흥군 부분에도 조영무와 그 아들인 조서는 나오는데 조지수는 나오지 않는다.

세상을 떠난 이후 태종의 묘정에 배향된 배향공신인데도 <조선왕조실록> 조영무의 졸기에는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의 나이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조영무의 아들 조서(1370-1429)가 1399년(정종 1년) 식년문과에 동진사로 급제(당시 과거를 주관한 이는 지공거 여흥백 민제, 동지공거 청성군 정탁임)했으며 민제는 이때 급제한 자신의 문생들을 집으로 불러 잔치를 베풀었고 정종 임금도 술을 하사하였다. 조서 역시 <조선왕조실록>에 졸기가 기록되었고 60세에 세상을 떠났다는 나이가 기록되어 있다. '안정'이라는 시호도 받았다. 이로 미루어 1370년생인 아들을 둔 조영무는 이방원(1367년생)의 아버지뻘 나이임은 확실하다 하겠다. 아울러 족보 기록의 정확성 여부는 재고의 여지도 있겠지만 1338년생이 맞을 가능성도 있다.

조영무의 넷째 아들 조윤은 아버지 조영무가 사망한 뒤 1달이 채 되지 않아 "부친상 중 기생과 동침을 했다"라는 죄목으로 탄핵당했다. 그러자 태종은 "아비를 배신한 놈이니 아비의 음덕을 베풀 수는 없다"며 법에 따라 처벌하라고 명령했으며 조윤은 장 100대를 맞는다. 조윤은 4년 후 "저는 그런 적이 없다"며 등문고까지 쳐가며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세종은 "그 때 뭘 했다가 이제 와서 억울하다고 함부로 등문고까지 치고 난리냐"고 조윤을 또 처벌하려고 했다. 그러자 상왕이 된 태종은 세종에게 "쟤 아빠 봐서 봐달라"고 말했고 세종은 "등문고를 함부로 친 것을 처벌해야 되지만 네 아비 봐서 봐준다"고 조윤을 용서했다. 참고로 <용의 눈물>에서 신문고 제도를 설명하는 장면 중 신문고를 시험삼아 치며 신문고를 찬양하던 사람이 바로 조영무였다. 실제로 신문고가 설치된 날 태종이 하륜, 이무와 신문고에 대해 이야기하던 자리에 조영무도 함께 있었다.

조선 최초로 충무라는 시호를 받은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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