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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인물

박순(朴淳)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14|조회수21 목록 댓글 0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관. 영의정과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으며 청백리이다. 눌재 박상의 조카이다.

2. 생애

젊을 적 서경덕의 밑에서 학문을 배웠고 이황, 기대승과도 교분이 있었다. 글씨는 송설체(松雪體)를 잘 썼다. 당송 시대 문학에 조예가 깊어 최경창, 이달(조선), 백광훈같은 서예, 시문학의 기라성같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명종이 '그를 대하면 마치 얼음을 대하는 것 같이 정신이 시원해진다'라고 직접 말했다. 명종 대에 을사사화의 원흉 중 한 명인 임백령이 죽자 그의 시호 짓는 일을 맡았는데, 충(忠)자를 넣지 않고 공소(恭昭)라고 깎아내렸다가 죽을 뻔하고 광주로 낙향했다. 훗날 조정에 돌아와 윤원형과 보우 등의 탄핵에 앞장섰다. 당시 조정에 사림들의 진출을 이끌어 조선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훈구파에서 사림파로 교체됐다.

명나라에 사은사로 가 조공국 사신들이 자금성의 쪽문으로 입장해야 했던 관행을 황제에게 말해 고쳤다. 이후 이조판서, 한성부판윤을 거쳐 조선 유교의 종장인 홍문관 대제학을 역임했다. 내리 14년을 정승을 지냈고 영의정만 7년을 했다. 선조는 박순에 대하여 ‘송균절조 수월정신(松筠節操 水月精神)’ 즉 '소나무와 대나무와 같은 곧은 절의와 지조에, 맑은 물과 밝은 달과 같은 깨끗한 정신의 소유자'라는 찬사를 한 바 있다.

이이를 매우 높이 평가해 까마득한 후배임에도 율곡을 지지했다. 동서분당 당시 분당을 반대했고, 같은 의견을 가진 이이와 성혼을 두둔해 탄핵됐다. 본래 동문으로 친분이 두터웠던 동인의 영수 허엽과 이때 갈라졌다. 정여립 등 대다수의 후배 사림들에게 공박을 받았다.

정승 자리에서 내려와 외동딸이 시집간 경기도 포천에 정자를 짓고 은둔했다. 박순은 딸 하나, 서자 하나가 있었는데 서자에게 정을 주지 않았고 그렇다고 집안에서 다른 양자를 들이지도 않았다. 다른 권세가들처럼 봉사손을 둬 부와 권력을 대물림하는 대신 포천에서 조용히 여생을 마쳤다. 재물 면에도 깨끗해 청백리에 녹선됐다.

박순의 제사는 사위 이희간이 지냈고 그 뒤로도 외손자 이택 및 포천 전주 이씨들이 대를 이어 지냈다.

저서로는 《사암집》이 있는데 사암이 타계 얼마 후 임진왜란으로 유작들이 묻혀있다가, 인조반정 후인 1644년에야 모아서 만들어진 것이다. 시호인 문충(文忠) 역시 그때 받았다. 외손주 이택이 애를 많이 썼는데 외조부의 시호를 받은 3일 후 그도 세상을 떠난다.

3. 여담

그에게는 평양에 부임했다가 얻은 박응서라는 서자가 하나 있었는데, 본처를 의식한 것인지 아니면 아이의 됨됨이를 보고 그런 것인지 정을 주지 않았다.

박응서는 그래도 글을 곧잘 했는데 평소 자신의 처지와 같은 명문가 서자들과 강변칠우를 자처하고 어울려 다녔다. 박응서의 무리들은 관직에 나갈 수 없는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했다. 서자도 과거 시험을 보게해 달라는 상소도 올렸으나 번번이 무시됐다. 절망과 무력감에 빠진 그들의 비행은 점점 대담해져 강도짓을 하고 살인까지 저지르기 시작했다. 당시 대북의 영수 이이첨은 이걸 꼬투리 잡아 서인을 제거할 빌미로 삼게 된다. 결국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난다. 박응서는 다른 패거리들이 죽어나갈 때도 살아남았는데,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권이 바뀌자 사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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