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정치인. 연려실기술과 갑진만록 등의 기록에 따르면 북인의 일원이라고 하나, 또 다른 기록들엔 남인의 일원이라고 명시되어 있기에 분명하지 않다. 임진왜란 때 선조를 모시고 병조판서,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잇따라 역임했으며, 사후에 호성공신 2등에 책록되고 원성부원군(原城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자는 중숙(重叔), 호는 두암(斗巖)이며,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2. 생애
1546년(명종 1년) 3월 28일 한성부 남부 훈도방 저동에서 출생했다. 원주 김씨 시조인 김거공(金巨公)의 16세손으로, 충청도 병마절도사 김말손(金末孫)의 증손, 증 좌찬성 김안우(金安祐)의 손자, 김형(金珩)의 아들이다. 어머니 서흥 김씨는 증 참판 김덕유(金德裕)의 딸이다.
1567년 생원시에 급제했고, 1568년(선조 1년) 무진 문과(文科) 증광시(增廣試) 을과(乙科)에 응시해 7위의 성적으로 급제했다. 이후 예문관·홍문관의 정자(正字) 및 박사(博士)를 역임하고, 1579년(선조12년)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 진작을 위해 유능한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한 제도)를 하였으며, 1581년(선조14) 황해도구황어사(黃海道救荒御史)를 역임하고, 1582년(선조 15년)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이르렀다.
1583년(선조 16년) 4월 17일, 경안령(慶安令) 이요(李瑤)가 선조와 면대해 조정이 안정을 잃고 동서로 갈라져서 정사가 여러 곳에서 나오고 있다면서, 류성룡, 이발, 김효원, 김응남 등이 동변(東邊)의 괴수들로서 저희들 멋대로 하는 일들이 많으니 재억(裁抑)을 가하기 바란다고 청했다. 이에 대해 양사에서는 이요가 근거없는 말로 속여서 망타(網打)의 불씨를 만들려 하고 있다고 논하여 파직을 명할 것을 청했지만, 선조는 이렇게 말하면서 윤허하지 않았다.
"요가 아뢴 내용도 자못 일리가 있는 말들이었다. 내가 비록 매우 과매(寡昧)하기는 하나 그렇다고 아주 어리석은 임금은 아니다. 이번 일은 요에게 하 등의 죄를 내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지금 이 말이 어찌하여 내 귀에 들어왔겠는가."
선조실록 17권, 선조 16년 4월 17일자 기사.
그 후 유학(幼學) 신급(申礏)이 삼사(三司)의 간특한 정상을 극론하고 또 홍혼(洪渾)·우성전(禹性傳)·김응남·박근원(朴謹元)·김첨(金瞻)·김수(金睟)·홍진(洪進)이 앞장서서 사의(邪議)를 하고 있다고 상소하자, 선조는 그를 불려서 이렇게 답했다.
"너의 상소문을 보니 참으로 충성이 대단하다. 참으로 정직한 사람이다. 지금 사기(士氣)가 이러한 것은 사실 조종(祖宗)들이 배양해 놓으신 은택인 것이다. 조정과 변비(邊鄙)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네 아우 신립(申砬)이 충성을 다해 나라에 보답하고 있어 그가 변성(邊城)을 지키면 오랑캐들이 감히 가까이 못하여 옛 양장(良將)의 풍모가 있다. 그런데 네가 또 이렇게 몸을 돌보지 않고 사(邪)를 물리치기 위해 항소(抗疏)를 하는 기절(奇節)이 있으니 어쩌면 너희 한 집안에 충(忠)과 의(義)가 함께 있어 나라 위해 정성을 바치기를 이렇게까지 하는가. 내 매우 가상히 여기는 바이다."
선조실록 17권, 선조 16년 8월 11일자 기사.
결국 김응남은 제주 목사로 좌천되었다. 이에 사간원이 이이를 탄핵한 송응개, 허봉, 박근원 등을 귀양보낸 것은 지나치다고 아뢰면서, 김응남을 제주 목사로 좌천한 것 또한 반대했다.
제주 목사(濟州牧使) 김응남은 오랫동안 경악(經幄)에서 모시고 있으면서 많은 계옥(啓沃)을 하였고, 승선(承宣)이 되어서는 부지런히 있는 힘을 다했던 자로서, 전하께서도 일찍이 믿고 총애하였던 바인데 죄명이 드러나지도 않은 것을 침윤(浸潤)의 참소만을 치우치게 믿으시고 이매(魑魅)의 고장에다 던져버리셨습니다. 근래 빈번한 척축(斥逐)으로 하여 명류(名流)는 거의 다 없어지고 참소하는 입들이 그 틈을 타서 대성(臺省)도 텅 비어 갑니다. 백료(百僚)가 겁에 질려 떨고 있고 충당(忠讜)이 기가 꺾여 있는데, 이는 사직을 위하여 결코 복된 일이 아닙니다. 응남을 제주로 보내라는 명도 거두어주소서."
선조실록 17권, 선조 16년 9월 1일자 기사.
그러나 선조는 사간원의 청원을 단호히 거부하면서, 김응남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김응남의 사람됨에 있어서는 그가 비록 유악(帷幄)에 있었으나 입시(入侍)의 기회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가 어떠한 인물인지 사실 몰랐었다. 그가 승지(承旨)가 되어 병무(兵務)를 맡겼을 때 과연 부지런하고 조심성있고 진실하여 나는 그를 믿고 의심치 않았으며, 경안(慶安)이 면대했을 때 그를 배척하였지만 그때도 나는 그를 의심하지 않았었다. 그후 임조(臨朝)하여 우연한 기회에 내가 말하기를 ‘응남이 직사(職事)를 잘 살피고 있다.’고 하자 송응개가 즉석에서 그를 극구 찬양하였는데, 지금와서 보니 응개는 바로 간사(奸邪)한 자들의 우두머리인데 응개가 응남을 극구 찬양하였으니 이는 그들끼리 붕당을 체결하였음이 너무나 분명한 것이다. 그리고 근간 경안이 면대를 청했던 것은 이이가 사주한 일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같은 부도(不道)한 말은 아마 틀림없이 응남의 무리가 자기들의 이름을 바로 들어 배척한 데 대하여 분함을 느끼고 사특한 거짓말을 만들어낸 것으로 그 죄상이 이미 드러났으니, 나는 참으로 통분해 하고 있다. 내 즉시 아울러 응분의 죄를 내리지 않고 제주를 제수한 것은 나라로서는 실형(失刑)이지만, 그 자신에게는 다행인 것이다. 응남은 떠나고 사피하지 말라고 하라. 그가 만약 면모를 새롭게 고쳐 나간다면 후일 친총(親寵)할 때가 없지 않을 것이다."
선조실록 17권, 선조 16년 9월 1일자 기사.
인조 때 김상헌이 쓴 『남정록(南程錄)』과 효종 때 이원진(李元鎭)이 쓴 『탐라지(耽羅誌)』에 따르면, 김응남은 제주 목사로 부임한 뒤 성심껏 기민을 구휼하며 교육을 진흥시키며 민속을 바로잡아 제주민의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2년 후인 1585년 우승지에 기용되었고, 이어 대사헌, 대사간, 부제학, 이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그러던 1589년(선조 22년) 12월 14일, 전라도 유생 정암수(丁巖壽) 등이 상소를 올려 이산해, 정언신, 정인홍, 류성룡 등이 역적 정여립과 연관이 있으니 조사해 봐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이때 정암수 등은 "김응남이 남몰래 모의를 주관하면서 외부로는 모르는 체 겸손을 가장하고 내부로는 시기가 심하여 현인을 헤치고 당파를 만드는 등 그 죄가 가장 무거운데, 성상께서 이를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선조는 즉시 이산해, 류성룡을 불러서 위유(慰諭)한 뒤 다음과 같이 전교했다.
"진사(進士) 정암수(丁巖壽)·박천정(朴天挺)·박대붕(朴大鵬)·임윤성(任尹聖)·김승서(金承緖)·양산룡(梁山龍)·이경남(李慶男)·김응회(金應會)·유사경(柳思敬)·유영(柳瑛) 등이 국가의 역변(逆變)을 이용하여 감히 무함하는 술책을 써서 근거 없는 말을 날조하고 사휼(邪譎)의 소(疏)를 올려 현상 명경(賢相名卿)을 모조리 지척(指斥)하여 온 나라가 텅 빈 뒤에야 그만두려고 하니, 그 속셈을 따져 보면 장차 어찌하려는 것인가. 그 흉참(兇摻)한 양상이 더욱 해괴하다. 이는 반드시 간인(奸人)의 사주를 받은 것이 단연 의심이 없으니, 잡아들여 추국하고 율에 따라 죄를 적용하라."
선조실록 23권, 선조 22년 12월 14일자 기사.
1591년(선조 24년), 김응남은 명나라로 파견되는 성절사(聖節使)에 선임되었다. 그의 임무는 일본 사신 현소(玄蘇) 등이 조선에 방문하여 ‘명나라를 치려고 하는데 조선에서 길을 인도해 달라.’라고 요청한 일을 명나라 황제에게 보고하는 것이었다. 김응남이 명나라의 수도 북경에 도착할 무렵, 마침 류큐에서도 진주사(陳奏使)가 와 있었다. 명나라 조정은 조선의 자문(咨文)과 류큐의 보고가 대략 같음을 보고 일본이 자국을 침공하려 한다는 걸 파악했다. 이에 만력제는 김응남을 비롯한 조선 사절단에게 칙서를 내려 포장하고 표리(表裏)와 은냥(銀兩)을 넉넉히 주었다.
귀국 후 병조판서에 오른 김응남은 이듬해인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뒤 신립이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패배한 후 선조가 새벽에 서울을 떠나 이동할 때 함께 따라갔다. 이후 선조가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피신하는 동안 병력을 통솔하며 왕을 호종했다. 그해에 부제학(副提學)·대사헌(大司憲)에 올랐고, 이듬해 1593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예조판서(禮曹判書)를 역임했으며, 뒤이어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다. 지중추부사를 맡고 있던 선조 26년 1월 15일, 김응남이 선조에게 나아가 임해군과 순화군이 일본군에 생포된 일에 관해 아뢰었다.
"북도(北道)에 만약 사대부가 있었다면 왕자가 어찌 사로잡히기까지 하였겠습니까. 서토(西土)의 백성들도 어리석고 지혜가 없는데 거가(車駕)가 오래 머물기에 신이 일찍이 염려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초야의 사람들을 발탁 기용하여 어리석은 백성들로 하여금 훌륭한 사람은 조정에 채용된다는 것을 알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시골 사람이 비록 야비하고 속되기는 하지만 우대하여 용납하여야 하는데 요즈음 이 지역의 사람들을 논체하였으니 또한 온당하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이 옳다."
하였다. 김응남이 아뢰기를,
"지금은 창업할 때와 다름이 없으니 낡은 생각을 씻어버리고 기강을 바로잡으며 민폐를 제거하고 인재를 발탁하며 제사(祭祀)와 공부(貢賦) 등의 일은 한결같이 전에 하던 것을 고쳐 태평성대에 향락하던 때와는 다르게 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근심하여 중흥의 대업을 열어야 합니다."
하니, 정희번이 아뢰기를,
"이 말이 매우 옳습니다. 이런 비상한 변고를 겪음으로 해서 민생(民生)을 아껴야 한다는 것과 두려워하여야 한다는 것을 모두 알 수 있습니다. 깊숙이 구중 궁궐에 계시면서 비록 간혹 민생의 고통을 듣는다 하더라도 어떻게 친히 보는 것과 같겠습니까. 성상께서 군병과 일족(一族)에 대한 폐단을 제거하려고 하시지만, 공부에 관한 일은 수령이 감히 마음대로 제하지 못하여, 침해가 그 친족에게 미치기 때문에 금년에 소와 말을 팔고 명년에는 삼밭을 또 명년에는 논을 팔아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응남에게 이르기를,
"경이 기왕에 여기에 남기로 했는데 나도 질병이 잇따라 구차하게 무릅쓰고 있을 수 없다. 내가 다시 경을 볼 날도 아득하다. 경은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선조실록 34권, 선조 26년 1월 15일자 기사.
1593년(선조 26년) 2월 1일, 명군의 호부 주사(戶部主事) 애자신(艾自新)이 군량이 계속 조달되지 않는다며 관량관(管糧官)인 지중추부사 김응남, 호조 참판 민여경(閔汝慶), 의주 목사 황진(黃璡)에게 곤장 때렸다. 이에 대해 비변사가 아뢰었다.
"삼가 윤근수 및 김응남 등의 장계를 보니 군량 운반하는 문제로 인하여 재신 두어 사람이 곤장을 맞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오늘의 사세는 지극히 민망하고 절박한데 장 도사(張都司)의 말을 참작해보면 애 주사(艾主事)가 노한 것은 오로지 이 일 때문만은 아닌 듯합니다. 전일 예물을 해조가 이미 보냈으나 다시 넉넉히 보냄이 합당할 듯하니 재신으로 하여금 적절하게 조처하게 하소서. 김응남 등은 이미 주사의 명령으로 연로를 검찰(檢察)하고 있는데, 검찰의 명을 받은 지역이 의주이기는 하더라도 한 장소만 굳게 지키다가 거듭 그 노여움을 사선 안 되니, 형세상 전진함이 마땅합니다. 이 뜻을 행이(行移)하소서."
선조실록 35권, 선조 26년 2월 7일자 기사.
이후 선조를 따라 환도하여 1594년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우의정겸(右議政兼) 세자부(世子傅)를 거쳐 1595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및 좌의정(左議政)에 임명되었다. 1594년(선조 27년) 11월 12일에 열린 조정 회의에서 이순신과 원균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고 다투는 문제에 관해 이렇게 밝혔다.
"당초 수군이 승전했을 때 원균은 스스로 공이 많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순신은 공격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선거이(宣居怡)가 힘써 거사하기를 주장하였습니다. 이순신의 공이 매우 크지도 않은데 조정에서 이순신을 원균의 웃자리에 올려놓았기 때문에 원균이 불만을 품고 서로 협조하지 않는다 합니다."
선조실록 선조 27년 11월 12일자 기사.
1594년(선조 27년) 12월 1일 도원수 권율이 일본군을 상대로 거제에서 제대로 싸우려 하지 않았고, 사후선(伺候船) 3척이 행방 불명되었는데도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아 비판이 제기되자, 김응남은 이렇게 주장했다.
"그 사람은 일찍이 행주(幸州)의 싸움에서 공을 세웠습니다. 공론이 격분한 바가 비록 이와 같기는 하나 만일 체직시킨다면 대신할 사람을 얻기가 어렵습니다."
선조도 이에 동의했다.
"대간의 말이 이와 같으나 전선에 나가 있는 상황에서 장수를 바꾸는 일은 병가(兵家)의 꺼리는 바이니, 체직시킬 수 없다."
이날 김응남은 이순신과 심한 갈등을 벌인 원균을 부득이 체직시켜야겠다며, 충청병사 선거이와 서로 바꿀 것을 권유했다. 1595년(선조 28년) 9월 24일, 중병에 걸려 요양 생활 중이던 좌의정 김응남이 사직을 청하는 차자를 올리면서 공물 작미, 훈련도감 군사의 요미(料米), 변방 방어 등에 대해 자기 생각을 밝혔다.
아, 하늘이 어려움을 내려 국사가 위태로우니, 신이 오늘날에 털끝만큼의 정력이 있어 지탱할 수 있다면 진실로 몸과 마음을 바쳐 절의를 다하여 사생을 돌보지 않고 신하의 도리를 다할 것인데, 어찌 번독함을 피하지 않고 매양 신엄(宸嚴)을 범하여 스스로 불측한 죄에 들어가겠습니까. 성상께서는 특별히 불쌍히 여겨 속히 파면시키시어 미천한 신분을 편케 해주소서. 또 신이 요즘 말미 중에 있어 오래도록 입시하지 못하였습니다. 병으로 누워 있는 중이라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어 대략 한두 가지를 아래에 기록하여 아뢰니 취택하소서.
1. 각읍의 공물을 작미(作米)하는 일은 한편으로는 민막(民瘼)을 제거하려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군량을 도우려는 것이니 그 뜻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 법을 시행하는 데는 형편상 불편한 점이 있습니다. 태평 시대에는 혹 시행할 수 있으나 오늘날에는 시행할 수 없습니다. 대개 전지 1결(結)에 미곡 2두씩을 내게 하면 그 내는 것이 적어서 백성에게 편리한 듯합니다. 그러나 상란(喪亂) 이후로 전야(田野)가 버려지고 묵어서, 한 장정이 경작하는 바는 겨우 식구의 식량을 이을 수 있을 뿐이므로 공사(公私)의 빚, 호역(戶役)의 수용(需用), 전세(田稅)의 미곡을 마련해 내기도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또 이 때에 공물의 작미까지 아울러 징수하면 결코 소민(小民)이 감당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전부터 공물의 댓가를 모두 토산(土産) 잡물을 편의에 따라 마련하여 바치게 하였으니 그 사이에 비록 각사(各司)의 하인이 폐단을 일으키는 일이 있기는 하였으나 구례(舊例)가 이미 이루어지고 민정(民情)도 익숙하여졌으므로 지금 갑자기 변경할 수 없습니다. 또 정해진 2두 이외에 이관(吏官)의 농간질과 갯가로 가지고 가서 배로 운반하고 경창(京倉)에 납입하는 비용이 있으니, 소민이 내는 바가 어찌 2두에 그칠 뿐이겠습니까.
올해 수납해야 할 미곡이 5만여 석인데 현재 경창에 도착한 수효는 4천 석도 되지 않아 온갖 경용(經用)을 장차 이을 수가 없으니 앞으로 백관의 요미(料米)를 무엇으로 반급하고 중국군의 양식을 무엇으로 방출하며, 제색(諸色)의 군병을 무엇으로 먹이겠습니까. 이것이 절박한 근심입니다. 설사 5만 석의 미곡을 다 징수하여 경창으로 실어온다 하더라도 공물을 교역할 때 또한 불편한 일이 있습니다. 지금 서울이 잔파(殘破)되어 여러 가게가 썰렁하고 물력이 탕진하여 각색의 공물을 사들이고자 해도 얻을 수가 없으며, 또 물가의 경중이 무상하여 쌀값의 높낮이를 공평히 하기 어려우므로 해사(該司)는 억제하려 하지만 백성들은 비싼 값을 받으려는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억제하면 소민이 이익을 중히 여겨 조금만 더 취해도 원망이 무더기로 일어나고, 비싼 값을 주고 구입하면 관용(官用)이 매우 급하여 그 값이 몇 갑절이 되어 경비를 대기 어려우니, 이 또한 심히 공평하지 못합니다.
이로써 살펴보면, 밖으로는 소민의 불편함이 이와 같고 안으로는 시행하기 어려운 형편이 이와 같아 당초 군량을 도우려던 계책마저 허사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설령 외방의 백성에게 편리한 바가 있고 군병의 양식에 도움되는 바가 있다 하더라도 안으로 시행하기 어려운 사세가 이처럼 극심하다면 끝내 시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해사(該司)로 하여금 올해 수납할 작미(作米)의 원수(元數)를 얼음이 얼기 전에 각별히 납입하도록 독촉하게 하소서. 경창에 실어들인 것이 비록 5만 석에 차지 않더라도 그 수량이 3∼4만 석에 이르면 그래도 용도에 충족할 수는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으면 명년의 국계(國計)는 결코 지공할 방도가 없으니 일찍 계획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훈련도감에 소속된 군사는 당초 한때 굶어 죽게 된 상황에서 절박한 요식(料食)을 위하여 지원하는 자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금년은 약간 풍년이 들어 여염 사이에 곡식이 천한 듯하니 비록 유리(流離)하여 생업을 잃은 백성도 다 살아갈 방도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도감의 군사는 모두 날마다 분주하여 역(役)의 괴로움이 갑절이나 심한데도 요미(料米)의 박함은 전과 같으니 자신의 의식도 오히려 부족한데, 하물며 위로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 아내와 자식을 기르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기 때문에 다 싫어하고 괴로와하는 마음을 품고 모두 도피할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속오군(束伍軍)의 초병(哨兵) 중에도 이미 차츰 도망해 가는 자가 있습니다. 이러한 군사를 급한 때에 쓸 수 있다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양료(糧料)를 더 지급하여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자니 국가의 저축이 고갈되어 이어나갈 길이 없고 약속한 명령을 그대로 지켜 전처럼 부리자니 군인이 살아갈 수 없어 원망만 날로 심해질 것입니다. 그런데도 백방으로 생각해봐도 좋은 방책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신의 소견으로는 먼저 호조(戶曹)로 하여금 올해 수납한 미곡(米穀)이 얼마인가를 조관(照管)하게 하여, 1년 경비를 덜어내고 그 나머지로 군량을 삼아 군량의 다소에 따라 군의 원액(元額)을 정하고, 무예가 성취되어 쓸 만한 자는 가려서 올려주고 무예가 용렬하여 쓸모없는 자는 살펴서 내리며, 내린 자의 요미(料米)를 올라간 자에게 더 주어 위로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 아내와 자식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게 한다면 군정(軍情)의 원망이 반드시 오늘날처럼 심한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조종조(祖宗朝)에서 금군(禁軍)을 설치한 것은 그 법이 아름답습니다. 궁시(弓矢)와 기창(騎槍)으로 그 무예를 취하고 도시(都試)의 등제(等第)로 그 능함을 권장하였으므로 금군에 소속된 자는 모두 무용이 있는 군사로서 용잡한 근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미 취재(取才)하여 입속(入屬)시키는 절차가 없고 또 등제(等第)로 과업을 권장하는 일도 없어서 재능이 있는 자나 재능이 없는 자가 혼동되어 하나로 되었습니다. 기예가 매우 뛰어난 자도 훌륭한 상을 받지 못하고 활을 잡을 줄 모르는 자도 벌을 받지 않으니, 어떻게 장사(將士)의 사기를 복돋우고 무부(武夫)의 마음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옛 법전을 거듭 밝혀 훈련 도감과 서로 표리(表裏)가 되어 장상(奬賞)이나 권면하는 일이 조금도 피차의 다름이 없게 하면 숙위(宿衛)하는 군사가 앞을 다투어 스스로 분려(奮勵)하여 모두 정예롭게 될 것입니다.
대체로 우리 나라의 장기(長技)는 궁시(弓矢)만한 것이 없으니 오늘날 군사 훈련하는 요점은 궁시(弓矢)가 으뜸이고 조총이 그 다음이며 도창(刀槍)이 그 다음입니다. 이 세가지는 진실로 한 가지라도 폐해서는 안 되며 또한 치우치게 후대하고 박대함이 있어서도 안 됩니다. 근래 위에서 포상(褒賞)하는 은전이 대체로 포수(砲手)·살수(殺手)에게 많이 내려지고 궁시(弓矢)에게는 소홀한 듯하므로 중외의 무사가 모두 실망하여 말하기를 ‘성상께서 무사를 봄이 포수·살수만 못하다.’ 합니다. 아, 저 무사들이 어찌 성상의 뜻이 있는 바를 알겠습니까. 성상께서 포수·살수를 우대하여 상주시는 것은, 대개 새로 창설한 군사는 이렇게 하지 않고는 그들을 용동(聳動)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무사의 마음도 격려 권면해야 하니, 동일하게 보고 균등하게 시행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1. 신이 근일 서쪽 변경의 치보(馳報)를 보니, 근심이 또한 큽니다. 대개 이 호인(胡人)들은 요(遼)·금(金)의 옛 강토에서 일어나 거느린 군대가 10만 명이고 훈련이 원래 잘되어 있으므로 그 사납고 웅강(雄强)함은 중국도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변신(邊臣)이 잘 처리하지 못하여 불화의 실마리를 터놓은 것이 이미 많으니 만일 얼음이 언 뒤에 분한 마음을 품고서 그 부락을 거느리고 백만의 무리로 떼를 지어 우리 경계를 침벌해 온다면 하찮은 한줄기 강물은 이미 그 요새의 구실을 할 수 없을 것으로, 대단한 기세로 곧장 쳐들어오는 환란이 없다고 어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이 우리 나라를 돕는다면 저들이 반드시 그런 마음을 내지 않을 것이지만 불행히 저들의 흉모가 혹 이러한 데에서 나온다면, 우리의 형세로는 반드시 패할 근심만 있고 구제할 수 있는 방책은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사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앉아서 기다릴 수 만은 없고 방어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일찍이 듣건대, 강계에서부터 아래로 위원(渭原)·이산(理山)에 이르기까지 무려 4백∼5백 리 사이에 높은 산, 험한 재가 막고 있는데, 그 사이에 비록 몇 갈래의 통행하는 길이 있으나 그 지방 사람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다 합니다. 그 험고한 곳에 의거하여 나무와 돌로 기정(機穽)을 설치하고 혹은 화총(火銃)을 가지고 방어하면, 한사람이 만 명의 군사가 오는 것을 당할 수 있어서 내지의 희천(熙川)·운산(雲山)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벽동(碧潼)에서부터 창성(昌城) 이하까지는 저들과 우리 양쪽의 산세가 점차 평평해지고 강물이 점차 넓어져서 얼음이 얼어 육지와 이어지면 넘나들지 못할 곳이 없으므로 비록 무사가 천 명이 있다 하더라도 진실로 치돌(馳突)하는 형세를 막기 어려워 내지의 구성(龜城)·정주(定州) 땅도 지킬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란·몽고가 전조(前朝) 때에 뜻을 얻게 된 까닭입니다. 비록 서방의 군사를 다 동원하여 힘을 합해 지킨다 하더라도 백에 하나도 당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본도 출신의 무사는 이미 내려보냈습니다만 병력이 적고 약해서 당해 낼 방책이 없을까 염려됩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서울의 포수와 해서(海西)의 무사 중에서 정예한 자 약간을 뽑아서 방어에 첨가시키지 않을 수 없다고 사료됩니다. 안주·정주도 내지의 지극히 요긴한 고을이니, 군사를 잘 거느리고 품계가 높으며 지려(智慮)가 있는 사람을 엄선하여 급속히 차견(差遣)해서 뜻밖의 변고에 대비하게 하는 것이 아마도 마땅할 듯합니다. 또 강화부(江華府)는 경성에서 겨우 1백 리 거리로서 서쪽으로는 황해와 이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호서·호남과 이어져 있으며, 다만 일면만이 동북(東北)으로 통하여 8방을 견제하는 형세가 있으니, 참으로 이른바 천부(天府)297) 의 땅이고 요해의 곳입니다. 지난해에 강도(江都)를 수축(修築)하자는 계책을 올리는 사람이 있자 묘당(廟堂)에서도 그의 말에 따라 수령을 바꾸어 상한 백성들을 수습하고 양곡을 저축하며 주선(舟船)을 모으고 군병을 훈련시켜 보장(保障)의 지역으로 삼게 하였는데 지금 실행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모두 변변찮은 신의 사사로운 근심과 지나친 염려이지만, 이미 생각이 있는 이상 아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만일 채택할 만한 것이 있을 경우 다른 대신에게 하문하여 시행하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선조실록 67권, 선조 28년 9월 24일자 기사.
이에 선조는 "이처럼 어려운 때에 대신이 어찌 사퇴할 수 있는가. 어서 조리하고 출사하라."고 하면서, 김응남의 차자를 비변사에 내려 의논하도록 했다. 그 후 조정에 복귀하여 좌의정으로서 국정을 운영하던 1596년(선조 29년) 6월 26일, 선조가 회의 중에 물었다.
"이순신은 밖에서 의논하기를 어떠한 사람이라고들 하는가?"
김응남이 답했다.
"이순신은 쓸 만한 장수입니다. 원균으로 말하면 병폐가 있기는 하나 몸가짐이 청백하고 용력(勇力)으로 선전(善戰)하는 점도 있습니다."
그러자 선조는 이순신에 대해 부정적인 발언을 했다.
"이순신은 처음에는 힘껏 싸웠으나 그 뒤에는 작은 적일지라도 잡는데 성실하지 않았고, 또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는 일이 없으므로 내가 늘 의심하였다. 동궁(東宮)이 남으로 내려갔을 때에 여러 번 사람을 보내어 불러도 오지 않았다."
이에 김응남이 선조의 주장에 힘을 싣는 발언을 했다.
"원균이 당초에 사람을 시켜 이순신을 불렀으나 이순신이 오지 않자 원균은 통곡을 하였다 합니다. 원균은 이순신에게 군사를 청하여 성공하였는데, 도리어 공이 순신보다 위에 있게 되자, 두 장수 사이가 서로 벌어졌다 합니다."
이후 선조가 "이순신의 사람됨으로 볼 때 결국 성공할 수 있는 자인가? 어떠할는지 모르겠다."라고 묻자, 김응남이 답했다.
"알 수 없습니다마는, 장사(將士)들은 이순신이 조용하고 중도에 맞는다 합니다. 그러나 지금 거제(巨濟)의 진(鎭)에는 원균을 보내야 하니, 거제를 지키는 일이라면 이 사람이 아니고 누가 하겠습니까."
선조실록 76권, 선조 29년 6월 26일자 기사.
1597년(선조 30년) 1월 27일, 가토 기요마사가 대마도에서 부산으로 건너오는 걸 중간에서 습격하여 처치하라는 조정의 명령을 이행하지 못한 이순신에게 분노한 선조가 그를 용서할 수 없다며 파직할 뜻을 밝히자, 김응남이 원균으로 그를 대신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군으로서는 원균만한 사람이 없으니, 이제 버릴 수 없습니다."
이에 선조가 원균을 수군의 선봉으로 삼겠다고 밝히자, 김응남은 "지당하십니다."라고 찬성하면서도, 어사(御史)를 보내 그로 하여금 규찰하게 하자고 권유했다.
1597년(선조 30년) 5월 29일, 정유재란이 발발한 일과 관련해 선조에게 서계초(書啓草)를 꺼내어 올렸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천하 국가는 반드시 먼저 큰 계책을 정해 놓아야 합니다. 큰 계책이 정해지지 않으면 여러 의견이 멋대로 나오고, 여러 의견이 멋대로 나오면 사람들의 마음이 의심스러워지고, 사람들의 마음이 의심스러워지면 모든 일이 확립되지 못하여 멸망이 닥쳐오게 됩니다. 지금 많은 적군이 국경에 있어 국가의 형세가 위급하니, 상하가 걱정하여 밤낮으로 생각하는 것은 모두 적을 막는 한 가지 일입니다.
그런데 싸울 것인지 수비할 것인지 강화할 것인지를 아직도 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은 오늘날의 계책이 싸울 것인지 지킬 것인지 강화할 것인지를 모르겠습니다. 고금 천하에 적진을 대하고 있으면서 싸우지도 않고 수비하지도 않고 강화하지도 않고서 끝까지 그 나라를 보전한 것은 있지 않았습니다.
신이 지금의 의논들을 보니, 싸우자는 자, 수비하자는 자, 강화하자는 자들이 각기 자기 주장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우리 나라가 피폐해진 뒤여서 병력이 매우 약한데, 적들은 이미 험지를 차지하여 소굴이 매우 튼튼하니, 함께 싸우기 어렵다.’고 합니다. 혹자는 ‘적이 다시 왔으니, 그 뜻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와 적은 형편상 함께 존재할 수 없으니, 싸워도 망하고 싸우지 않아도 망한다.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기보다는 공격하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이것은 싸우자는 의논이 각기 다른 것입니다.
혹자는 ‘적이 이미 오래 버틸 계책을 하고 있으니 우리도 오래 버틸 계책을 세워야 한다. 여러 도의 군읍에 성을 쌓고 목책을 세워 적이 오면 들어가 있고, 적이 물러나면 나와 농사를 지어 각기 맡은 지역을 지키면서 적을 이길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하며, 혹자는 ‘변경은 울타리이고 내륙은 안방과 같다. 울타리가 튼튼하지 않고서 안방이 보존되는 일은 있지 않으니, 적경과 가까운 곳에 서너 개의 큰 진을 세우고 팔도의 정예병을 불러모아 적의 충돌을 막아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수비하자는 의논이 각기 다른 것입니다. 강화하자는 한 가지 일에도 혹은 옳다 하고 혹은 그르다 하여 이설이 있습니다. 지금 이 세 가지 계책을 일찍 결정하지 않을 수 없는데 여러 의논이 이처럼 각기 다르기 때문에 머뭇거리며 지연하여 지금에 이르렀으니, 못내 한심스럽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화의하기 위하여 뒤따라갔던 자들이 적의 괴수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되돌아왔으며, 청적(淸賊)이 나와서는 협박하고 요구하는 것이 한이 없으니, 이런 때에 견마(犬馬)와 피폐(皮幣)를 가지고 적인(狄人)들과 우호(友好)하기를 바란들 되지 않을 것입니다. 강화가 이미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면 지금의 계책으로는 수비와 싸움만이 있을 뿐입니다. 중국군이 때마침 도착하였으니, 이는 우리 나라의 존망이 달려 있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저 왜적들이 이것을 듣는다면 반드시 꺼리는 마음이 있을 것이고, 국내의 민심도 이미 다소 진정되어 싸우려는 마음이 자못 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정예병을 거둬들여 진격해서 적을 도모하려는 계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천하의 일은 그르쳐지고 말 것입니다.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옛사람들의 말에 ‘험한 곳을 의지해 수비하면 수비가 견고해지기 쉽고, 견고한 수비를 의지해 싸움을 하면 싸움에 이기기 쉽다.’ 했습니다. 이것은 용병(用兵)하는 방법이 견고하게 수비할 수 있는 다음에야 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이 들으니, 울산(蔚山)과 양산(梁山) 등지에는 점령할 만한 많은 요새가 있다고 합니다. 여러 장수들에게 이러한 곳으로 나아가 진영과 성벽을 설치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밖으로는 중국군으로 후원을 삼고, 안으로는 우리의 군사로 스스로를 강하게 한 다음, 적병이 증원되기 전에 혹은 출병하여 도전하기도 하고 혹은 적들을 불러내어 공격하기도 하며 혹은 그들이 심어 놓은 곡식을 쓸어버리기도 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한 주사(舟師)를 번갈아 쉬면서 오가게 하여 적의 군량 수송로를 차단한다면 적이 비록 강성하더라도 그 형세가 저절로 꺾일 것입니다. 오늘의 계책으로는 아마 이보다 좋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중국군이 속속 나오고 있어 그 수가 만여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 나라의 양식은 이 해를 넘길 만한 것이 없습니다. 군량이 떨어지면 군사가 돌아가는 것은 공명(孔明)도 면하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만일 오랫동안 지구전을 벌여 적과 교전하지 않고 있다가 하루아침에 군량이 떨어지면, 중국군은 앞에서 흩어지고 우리 군사는 뒤에서 무너질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닥쳐올 환란은 임진년과 같을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밤낮으로 염려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바입니다.
요즈음 동렬(同列)들의 생각을 보니, 역시 신과 같았습니다. 지난번 소대(召對)할 때에 각기 아뢴 바가 있었으니, 전하께서 이미 통촉하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다만 소신은 말이 어눌하여 신의 소회를 엄숙한 자리에서 다 말씀드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번거로움을 피하지 않고 대략 아뢰니, 성명(聖明)께서는 살피소서."
선조실록 88권, 선조 30년 5월 29일자 기사.
비변사는 김응남의 서계를 선조로부터 받아서 의논한 뒤 6월 1일에 보고했다.
"김응남의 서계(書啓)를 보건대, 금일의 형세를 논한 것이 매우 생각이 깊었습니다. 우리 나라가 전수(戰守) 계획을 일찍이 정하지 않은 바는 아니나, 전수의 방책을 아직까지 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중국 군사가 이미 나왔는데 양향(糧餉)을 잇지 못하니, 형세상 오래 버틸 수가 없습니다. 김응남이 이른바 ‘장래의 화(禍)는 임진년 때의 정도가 아닐 것이다.’ 한 것도 많은 사람들이 함께 걱정하는 것입니다. 울산(蔚山)과 양산(梁山)의 지경에는 웅거할 만한 요해지가 많으니, 제장(諸將)들로 하여금 이곳에 진주(進駐)케 하고 수륙 양면으로 공격하여 적의 형세가 저절로 줄어들게 하면서 잘 조치해 나가면 참으로 좋은 계책이 될 것입니다. 대략 안으로는 중국 군사로 성세(聲勢)를 삼고 밖으로는 적병의 성쇠(盛衰)를 살피다가 증원병이 모이기 전을 틈타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기공(奇功)을 거두는 것은 장관(將官)들이 어떻게 임기 응변하여 결책(決策)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야말로 존망 생사(存亡生死)의 갈림길이니 자세히 살펴 처리하지 않을 수 없고 단안을 내려 결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급히 선전관(宣傳官)을 보내 서계(書啓)의 사연을 유지(有旨) 가운데 갖추 기재해 도체찰사(都體察使)와 도원수(都元帥)에게 치유(馳諭)하되 십분 자세히 살펴 시행함으로써 기회를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이 일이 비록 해볼 만하기는 하나, 중국 장수에게 물어보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니, 다시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선조실록 89권, 선조 30년 6월 1일자 기사.
1597년(선조 30년) 7월 22일,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참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선조는 긴급 회의를 소집했다. 김응남은 우의정으로서 이 회의에 참석했지만, 일본군의 배가 전보다 대단히 크냐고 묻는 선조의 물음에 "그렇습니다."라고 말한 것 외에는 별다른 발언을 하지 않았다. 일주일 후인 7월 29일 일본군이 진격하는 것에 대한 대책 회의에서도 참석했지만, 역시나 아무런 발언도 하지 않았다. 이후 명군 도독 마귀가 남산에 올라 도성의 형세를 살펴본 후 서둘러 내성을 수축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김응남은 "협소한 데다가 배후에 높은 산이 있으니 적이 먼저 점거하고서 대포를 쏘아대면 형세상 지탱하지 못할 것이고, 또 성중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수용하기 어려운데 만약 외방에서 징집된 병사들이 모두 모이게 된다면 더욱 수용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경리와 노야의 지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즉시 그에 따르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의아심이 있었기 때문이다."라며 반대했다.
1597년(선조 30년) 8월 18일 남원성이 함락당하고 그곳을 지키던 명군과 조선군이 전멸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선조는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이때 김응남은 "남원이 함락되었다니 이런 망극한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라며, "대체로 총병은 호병을 막을 줄만 알았지 왜병을 막을 줄은 몰랐기 때문에 이 지경에까지 이른 것입니다."라고 평했다. 이후 대신들과 함께 왕비 일행을 수로(水路)로 황해도로 피신시키는 걸 건의했지만, 선조는 "전일에는 한산(閑山)에서 주사(舟師)가 해로를 차단하였으므로 든든히 믿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갈 수 없다. 더욱이 요즘은 늦가을이어서 바람이 세차게 부는데 중류에서 바람을 만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는가. 이는 위험한 길이니 만전을 기한 계책이 못 된다."라며 거부했다.
난중일기 1597년 9월 8일자 기록에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한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김억추가 겨우 만호감이며 대장으로 쓰일 재목은 못 되는데도, 좌의정 김응남이 서로 친밀한 사이라고 해서 억지로 임명하여 보냈다면서, 이렇게 한탄했다.
"이러고서야 조정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다만 때를 못 만난 것뿐이다.
그 후 안무사(按撫使)로 선임되어 영남 지방에 내려갔다가, 풍기(豊基)에서 병이 위독해져서 귀경 후 사직 의사를 밝혔고, 선조는 이를 즉시 수락했다. 이에 지평 장만, 장령 성이문, 정언 이이첨 등이 김응남의 제칙을 재고할 것을 청했지만, 선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후 한양으로 돌아와서 병고를 치르다가 1598년(선조 31년) 11월 24일에 향년 52세로 사망했다. 당시 김응남의 집은 매우 궁핍해 장사를 치를 수 없었다. 이에 예조에서 장례 비용을 대주게 하자고 청했고 선조는 이를 받아들였다.
"난리가 일어난 뒤로 예장(禮葬)에 관계된 일을 일체 정폐(停廢)하여 대신의 상사(喪事)가 있더라도 관에서 도와주는 일이 아예 없었던 것은 형편이 그러했던 것입니다. 지난해부터 간혹 절박한 상사가 있을 경우 점차 예장의 전례를 시행하기도 하는데, 유독 대신의 상사에 있어서는 그대로 폐지하여 거행하지 않아 소소한 관원들과 다를 바 없으니 미안한 듯합니다. 김응남의 집은 너무도 빈한하고 궁핍하여 장사를 치를 수 없으므로 듣는 이들이 불쌍하게 여깁니다. 본도로 하여금 조금이나마 묘군(墓軍) 및 장례 비용을 대주게 한다면 국가에서 후대해 주는 은전에도 손실이 없을 것입니다."
선조 실록 107권, 선조 31원 12월 6일자 기사.
이때 사관은 김응남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그는 관대하고 근신하며 청렴하고 검소하였다. 전조(銓曹)의 장관으로 있었을 때에도 문정(門庭)이 쓸쓸하여 뇌물을 바치는 자가 아무도 없었고 현재(賢才)를 추천하여 등용하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았다. 다만 언론을 전개할 때에 고집스러움을 면치 못하여 사론(士論)이 단점으로 여겼다.
1604년(선조 37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봉되고 원성부원군(原城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충정(忠靖)을 하사받았다. 2012년 <김응남 호성공신교서 및 관련 고문서>가 대한민국의 보물 1756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