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선의 중기의 문신, 학자이다. 좌참찬, 대사헌 등을 지냈다. 사후 좌의정에 추증되었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2. 생애
아버지 성수침은 조광조에게 학문을 배웠고, 기묘사화 이후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성혼은 이런 아버지 밑에서 학문을 배우다가 역시 조광조의 제자인 백인걸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이때 이이를 만나게 되어 평생의 친구로 지내게 된다.
친구 이이의 추천으로 벼슬길에 나갔으며 이이의 절친한 친구이자 서인의 대표적인 정치인이었으나 정작 이이와 학문적인 면에서는 서로 다른 면을 보였다. 특히 이이와 1572년부터 6년간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한 왕복 서신에서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하였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비판하였다.
이이가 죽자 낙향했지만 정여립의 난으로 인해 기축옥사가 일어나고 이후 서인이 집권하자 이조 참판에 이르렀다. 서인의 영수로서 정철과 함께 정계를 이끌었다. 하지만 1590년 곧바로 은퇴했으며 1591년 ≪율곡집(栗谷集)≫을 저술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계에 복귀하였으나 동인 강경파로부터 끊임없이 공격당했다. 1594년 의정부 좌참찬까지 올랐으나 은퇴하고 1598년 병으로 사망하였다.
3. 사후
1602년(선조 35) 기축옥사에 연루되었던 연유로 북인들에 의해 삭탈관직되었다가, 1623년(광해 15) 3월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한 직후인 1623년(인조 1) 3월 복권되었다. 인조실록 1629년(인조 7) 좌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인조실록 현종실록 1682년(숙종 8) 이이와 함께 문묘 종사되었으나, 1689년(숙종 15) 남인이 집권한 기사환국으로 이이와 함께 출향되었고, 1694년(숙종 20) 서인이 재집권한 갑술환국으로 이이와 함께 복향되었다.
4. 학맥과 학파
본래 성혼은 이이의 학문에 끼워져 다루어지는 게 일반적이었으며 율곡학파의 종조 중 한 명으로서만 여겨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성혼 본인의 사상이 연구되면서 성혼의 학맥과 사상이 주목받기 시작했고, 지금은 그의 학맥이 우계학파라고 불린다. 우계학파는 김굉필-조광조-성수침-성혼을 거쳐 윤황-윤선거-윤증으로 이어진다. 즉 성혼의 학맥이 소론으로 연결되는 셈이다. 한편으로 조헌, 김자점, 안방준 등이 그의 문하로서 학문을 익혔으며, 김류와 이귀 등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특이점이라면 인조반정을 이끈 공신 세력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인데, 김장생-김집으로 이어지는 율곡 학맥이 현실 참여를 거부하며 은둔한 것에 비해 우계학파의 일원들이 조금 더 현실 참여에 적극적이었던 것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김장생을 가르친 인연으로 인해 성혼은 노론 계통 율곡학파에서도 종주로 떠받들게 된다. 한편 성혼의 학문이 독자적인 영역에서 다루어지기 시작함에 따라 율곡학파의 사상적 종주로 새롭게 송익필이 주목받게 된다. 송익필은 이이, 성혼과 친하며 김장생을 가르쳐 노론 학맥의 종주 중 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5. 기타
훗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질 때 소론에 속하는 사대부들은 대부분 성혼의 이론을 지지했기 때문에 소론의 시조 격으로 본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사위가 윤황으로 그 아들인 윤선거, 윤문거는 성혼의 외손자가 되고, 윤선거의 장남으로 소론의 중추인 윤증은 성혼의 진외증손이다. 따라서 윤문거의 직계 후손인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도 조상이 된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향양리에 있으며 2011년에는 가까운 거리에 기념관도 생겼는데 인근 도로의 이름도 우계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