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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인물

정철(鄭澈)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14|조회수36 목록 댓글 0

1. 개요

조선 중기의 정치인이자 시인이다.

문학사에 남긴 업적과는 별개로, 정치적 활동 면에서는 그다지 좋지 않은 족적을 남긴지라 매우 복잡한 평가를 받는 인물들 중 하나이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정철은 1536년 음력 윤12월 6일 권력의 중심부에 있던 집안의 자녀로 한성부에서 아버지 정유침(鄭惟沉)과 어머니 사이의 4남 3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누나는 인종의 후궁인 귀인 정씨였을 정도로 권력과 친밀한 집안이었다. 어린 시절 경원대군(명종)과 정철은 궁궐에서 함께 배동으로 뛰어다니며 크기까지 했다. 그러나 아버지 대부터 가문이 기울었다. 을사사화로 매형 계림군이 사망했는데, 정철의 가문이 계림군과도 연관되어 있던지라 정철의 친형은 곤장을 맞다가 장살(杖殺) 당해 죽었다.

그러다가 윤원형이 정치적으로 실각한 이후인 1566년에 사간원 헌납을 시작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선조 즉위 이후 1568년 이조 좌랑, 1570년 이조 정랑에 오르면서 중요 인물로 성장하는 듯하였다. 하지만 이즈음에 결국 동서 분당이 시작되고, 정철 특유의 강경한 발언이 빌미가 되어서 결국 삭탈관직되고 5년간 벼슬을 못 하게 된다. 그러다 1578년 복귀하는데 이때부터 정철은 철저하면서도 강경하게 서인의 입장에 서 있게 된다.

하지만 얼마 못 있어 강원 감사, 전라 감사, 함경 감사 등 변방의 한직과 외직을 두루 떠돌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는 정철이 오늘날까지 유명해지는 가사 문학을 많이 남긴 시기이기도 하기 때문에, 여러모로 중요한 시기라 볼 수 있겠다. 그리고 1583년 이조 판서에 있던 친구 이이의 추천으로 예조 참판으로 중앙에 복귀하고 곧바로 예조 판서가 된다. 그리고 대사헌에 우찬성까지 올랐으나 친구 이이가 죽은 이후 동인이 득세하게 되면서 결국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다. 이 시기 역시 그의 유명한 작품들이 나오는 시기가 된다.

그런 와중에 정여립의 난(1589년)에서 선조의 부탁으로 위관(尉官)이라는 수사 책임자로 활약했는데 이것이 피해를 입은 동인에게 악독한 인간으로 철저히 비난받는 데 영향이 컸다.

오죽하면 정철을 비판적으로 보는 이들은 정철을 '동인 백정'이라 칭할까.

2.2.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

"정여립이 모반을 일으키려 한다"는 상소가 있은 후 정철이 위관 자격으로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조사하게 되었다. 선조가 위관으로 선정하려 할 때 몇 번을 고사했으나 결국 수락하게 됐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엄청난 피를 묻히게 된다. 사건의 수사와 국문을 맡은 정철은 선조가 자신의 권력을 위협한 권신과 국정을 망치면서 나라를 어지럽게 할 간신으로 생각한 정언신, 김우옹, 이발, 백유양, 정개청, 최영경을 제거했다. 그러나 삼정승을 지낸 정언신을 제외하고 이발, 백유양, 정개청, 최영경은 선조가 직접 관직을 주거나 의정부에서 고위 관직에 해당한 삼정승, 찬성, 참찬이라는 벼슬을 추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비 권간(權奸)이 맞는지는 논란이 생겼고, 정철은 옥사가 지나치게 확대되자 이를 막아보려 했지만 이참에 조정을 주름잡던 신하들을 모조리 쳐내고 왕권을 강화할 마음을 단단히 먹은 선조의 의지로 소용이 없었다. 당시에는 권력이 한쪽 계파에게 쏠리게 되면 왕권이 약해지기 때문에 균형 잡는 일이 중요했으며 그럴 때마다 왕은 온갖 트집을 잡고 사소한 걸 문제 삼아 정적들을 제거하곤 했다. 정여립의 난은 지금도 선조가 만들어낸 누명이자 왕권 강화를 위한 충성심 테스트용으로 만든 친위 자작극이라 보는 역사학자들도 무척 많다.

동인 출신이면서 정철과 정적 관계였던 이발은 선조에 의해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거나 국정을 농단해서 나라를 망치는 권간으로 누명을 쓰고 붙잡혀 죽게 된다. 전라남도 함평의 광산 이씨 이발의 후손들은 제사를 지낼 때 고기를 다지면서 "(정)철, (정)철!"이라 외칠 정도라서 지금도 기일에 이 주문을 들어볼 수 있다. 하지만 기축옥사 전에 이발은 동인의 강경파로 서인인 심의겸, 박순, 송익필, 이항복 등을 탄핵하며 자신 스스로가 권신이 될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왕권 강화를 위한 선조의 경계를 잔뜩 끌었다. 이발이 죽고 80 넘은 노모와 어린 아들까지 추국장에 붙잡혀 끌려왔는데 정철은 노모는 살려주자 했지만, 선조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발의 어린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오직 의만 보고 살라는 말을 들었다 하니 선조는 대노하여 결국 이발의 노모외 아들은 모진 고문을 받고 죽게 된다.

이때 죽은 아들은 친아들이 아니라 노비의 아들이었는데 대가 끊길 것을 우려하여 미리 아들과 노비의 아들의 관복을 바꿔 입혀서 아들의 목숨을 살렸다. 이름과 집안을 숨기고 살던 후손들은 이발의 아들이 남긴 유서를 보고 이발의 후손인 걸 알게 됐고 추후 복권되어 광산 이씨들은 다시 살아갈 수 있었다.

이발과 친분이 두텁던 경상도 진주의 선비 최영경도 정여립의 체포 당시에 사망한 길삼봉이라는 것과 역시 선조에 의한 예비 권간이라는 누명을 씌우고 희생당했다. 정작 선조는 최영경에게 관직을 주거나 조정에서 출사하도록 하지 않았다. 정승까지 하고 있던 정언신은 사건 직후 “이게 다 이이의 제자들 때문이다!”라고 하다가 역시 선조의 정언신에 대한 경계와 왕의 권력을 위협하거나 나라를 망쳐 혼란스럽게 만드는 권간으로 기정사실화되자 더 이상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지 않고 조용히 찌그러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정여립과 편지를 19장이나 주고받은 사실이 들켰는데 이응표가 다 없앴다는 말을 믿은 정언신은 부인했다. 그나마 선조가 사사를 명하나 정철이 재상을 죽인 전례가 없다며 반대하여 유배로 감형됐다. 여담으로, 을사사화(1545년)로 집안이 풍비박산 났던 청년 정철은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전라도 창평현에 내려오게 되는데, 이때 김윤제의 도움으로 공부도 하고 그의 외손녀와 혼인도 하면서, 출생은 서울 태생이지만 사실상 호남 출신이나 다름없었다.

기존의 오해와 달리 정철은 옥사를 어떻게든 축소시키려 했다. 정언신과 정언지(鄭彦智) 형제에 대해서도 같은 서인인 최황은 고문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정철은 그들이 늙었음을 이유로 반대했다. 또한 그들이 단지 정여립과 편지를 주고 받았을 뿐 어찌 천하에 두 명의 여립이 있을 수 있겠냐며 변호했다. 이발 이길 형제 백유양등의 목숨도 구명하려고 하였고 이 때문에 선조에게 욕을 먹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철은 정여립의 난을 다루면서 자신의 사적인 원한으로 정개청을 역모에 묶기도 했는데, 명분은 정여립의 집터를 봐줬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정철이 젊었을 적에 훈계한 것에 대한 앙갚음이 크게 작용했다고 전해진다. 그 내용은 "정철처럼 술 마시고 노는 걸 어린애들이 보고 배운다"라고 말한 것에 앙심을 품었기 때문이라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건 정개청의 제자들의 주장이고, 사실 그보다는 정개청도 정여립 같은 철새였기 때문이다. 원래 정개청은 서인의 영수인 박순이 거두어서 가르치고 키운 인물인데 박순이 실각한 이후에 그를 배신하고 동인들과 어울렸고, 박순과 친했던 정철은 그를 예비 권간으로 여겨 가혹하게 고문하여 죽게 만든다.[반론]

한편 관계된 정언신, 김우옹, 이발, 백유양, 정개청, 최영경은 과연 선조가 지목했던 권간이라 할 수 있는지 애매했지만 처벌했다. 동향이라 아는 사람이 많았기에 엮기는 쉬웠고 심지어 전라도 유생 정암수를 사주해 이산해마저 엮으려 했으나 실패한다.

사실 임진왜란 이전까지 이순신은 당파는커녕 중앙 정쟁과는 관계없는 무관에 기축옥사 당시는 임란 대비를 위해 초고속 승진을 하던 시기라 숙청되었을 가능성은 낮다. 게다가 애초에 무장은 정치와 별 연관은 없다. 적어도 정여립과 접촉한 사실이 드러나야지 숙청감인데 그것도 아니다. 그리고 휴정, 유정 같은 인물들까지 줄줄이 엮여 숙청될 뻔했다. 만약 그것이 현실로 일어났다면 조선의 앞날은 어두울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정철의 숙청은 너무나도 심했다. 이를 두고 학계에서는 정철이 권력을 잡기 위해 체제 비판적 성향인 호남의 유력 인사 정여립이 모반을 꾸몄다고 조작하여 사건을 일으킨 게 아닌지 생각하고 있는데 이는 실제로 조선조 동인들의 시각이기도 했다.

당시 정철이 전라도로 사람을 보내 "정여립이 모반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냈다는 식의 명백한 기록 또한 남아있다. 그러나 후술하듯이 정철이 이 모든 일에 주도적으로 나섰지만 결국 최종적 지휘자는 선조였다. 정여립의 난이 과연 정말로 모반 사건이었는지 아니면 주체가 누구든 간에 조작된 정치적 사건인지 논란이 있으나, 왕권 강화를 위한 선조에 의해 권신이나 간신으로 누명을 써서 연루되어 죽은 수많은 사람들의 면모를 볼 때 조작된 사건 쪽에 좀 더 무게가 실린다. 그러나 기축옥사의 공초가 임진왜란을 거치며 불타 없어져 버렸고, 그 때문에 더 자세한 연구가 어렵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반대로 정여립이 모반을 일으킬려 했다는 것을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의견도 있다. 정여립의 형 정여복과 정여립의 사위인 김경일이 정여립의 행동을 수상하게 생각했고 정여립과 친하게 지내던 승려인 도잠과 설청 등은 정여립이 반역을 한다고 생각해 도망치기도 했는데 정여립의 행동이 수상쩍기는 했던 모양이다. 게다가 조정에서도 처음에는 정여립이 무고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정언신은 정여립의 무고를 확신해 처음에 역모 고변이 들어왔을 때 웃었으며 오히려 고변을 한 사람들을 베어 죽이려고 했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정여립은 순순히 붙잡히지 않고 금부도사를 피해 도주하였기에 정여립 본인의 행동은 엄연히 문제 있는 행동이었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무고의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었던 조정에서도 정여립을 확실히 역적으로 여기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정여립의 역모 주장을 서인측에서만 주장한 것이 아닌 것이 동인의 영수 이발의 동생인 이길이 정여립과 만난 후에 정여립의 역모를 확신하게 되었고 형과 상의하여 정여립을 처리하기 위해 이발에게 정여립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며 편지를 보냈으며 아우의 편지를 본 이발이 달려가다가 삼례역(參禮驛)에 도착하고 나서 역변(逆變)을 들었다고 한다 때가 늦어 동인측에서 고변을 하기 이전에 서인측에서 먼저 선수를 쳐 역모고변을 한 것이지 동인측인 이발형제도 정여립을 고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렇듯 당시 동인측에서도 정여립이 역모를 꾀한 것은 사실로 보았다.

그리고 기존의 서인 주도론은 별로 설득력이 없는 것이, "노인과 아이를 법에 따라 고문할 수 없다"는 서인 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발 가문을 세도 정치를 일으킬 가문으로 생각해서 개박살 내고 아이와 노인까지 고문해서 죽인 장본인이 선조다.

또한 정철은 두 명의 정여립을 만들 수 없다며 백유양을 살려주려고 했는데 숙종실록과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따르면 선조가 정철에게 크게 분노 했다고 하며 결국 백유양의 집안 역시 이발 가문 못지않게 멸문의 화를 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최영경도 조정에서 출사하지 않거나 벼슬을 내어주지 않았음에도 그를 권간으로 지목해 정철이 풀어주자고 한 것을 선조가 거부했다. 정언신의 경우, 그래도 삼정승까지 지냈기 때문에 선조가 지목한 권간을 될 생각까지 모르나 선조는 처형시키려 했으며, 정철이 "재상을 함부로 죽여선 안 된다"고 말려서 유배로 감형한다. 후일 선조가 정철을 버린 과정을 볼 때, 서인 강경파 정철을 희생양으로 삼고 조정의 절대다수였던 동인의 세력을 축소하기 위해 선조가 술수를 부린 것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2.3. 건저의 사건으로 몰락과 최후

권력의 중심에 다시 오른 정철은 세자 책봉 문제에서 결정적인 판단 미스를 하고 만다. 후사 논의를 조심스러워하는 선조의 의중을 모르고 서둘러 광해군으로 세자 책봉을 해야 마땅하다는 읍소를 올린 것.(송강연보의 기록) 이를 정철의 건저의 사건(建儲議事件)이라고 한다.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 박씨는 자녀를 낳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 선조는 총애하는 후궁 인빈 김씨에게서 낳은 아들인 신성군을 세자로 마음에 두고 있었다. 신료들의 입장에서는 빨리 후사를 명확히 해 두지 않으면, 불상사가 일어날 소지가 있었다. 이에 동인의 대표인 이산해와 서인의 대표인 정철이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철과 원한이 있었던 동인 측이 도중에 빠지는 바람에, 정철만 혼자 나서는 모양새가 되어 정치생명에서 가장 큰 위기에 직면한다. 이산해는 아예 나서지 않았고 류성룡은 나섰어도 입을 다물어 버렸는데, 정철만 홀로 후계 책봉의 정당성을 열을 내며 주장했던 것이다. 엉뚱하게도 선조는 "내 나이 젊거늘 경은 내가 빨리 죽길 바라는 게요?" 라는 식으로 얘기했다는 말이 있는데, 진짜 선조가 이런 말을 했다면 왕 자격이 정말 없다고 봐야 옳다. 우선 세자는 왕이 젊은지 늙은지와는 연관 없이 책봉된다. 대개 원자의 나이 8살이면 성균관 입학례와 세자 책봉례를 치러 세자가 된다. 즉 나이랑 책봉은 관계없는데, 억지 쓴 것. 당장 세종대왕만 해도 26세에 세자를 책봉했다.

물론 대군이 아닌 군을 책봉하는 첫 사례인 만큼 조심스레 할 필요도 있었지만, 40대에 접어든 선조가 할 말은 아니었다. 이 과정이 이산해의 계산이라는 설도 있다. 건저의 문제에 대해 선조의 의중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정철의 성격이 급한 반면 류성룡의 성격은 침착해서 절대 입을 먼저 열지 않을 것이므로 이산해마저 입을 다물어 버리면 성격이 급한 정철이 먼저 입을 여는, 즉 총대를 메는 상황이 올 것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정여립 모반 사건 당시 큰 피해를 입었던 동인은 정철에게 카운터로 '신성군 목숨이 오락가락' 드립을 날린다. 물론 이전의 정여립 모반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사실 그 자체에 주안점을 두기보다 정계의 밉상인 정철을 탄핵시키려는 의도였다고 볼 수 있겠다.

물론 선조는 이 절호의 찬스를 적극 활용, 세자 책봉 논의 자체를 막는 한편 정여립 모반 사건 이후 지나치게 입지가 커진 서인 세력을 손보기 위해 모르는 척 받아들인다. 이것 역시 정여립 모반 사건 때와 완전히 동일한 수순이다. 정철을 밟아 버리기로 결심을 굳힌 선조는 정여립의 난에서 정여립의 체포 당시에 죽었던 길삼봉이라는 것과 선조에 의해 예비 권간으로 지목당해서 누명을 쓰고 죽은 남명 조식의 제자 최영경의 죽음을 애도하며 정철을 비난했다. 선조는 이 구실로 정철을 지근지근 밟아 버렸는데, 실록에는 조회에서 정철을 가리켜 "간철(간사한 정철), 흉철(흉악한 정철), 독철(독한 정철)"이라고 대놓고 비난했을 정도였다. 참고로 이때 같이 까인 인물이 정철과 함께 당시 서인을 이끌었던 성혼이었다. 때문에 간혼독철이라고 같이 붙어서 표현된다.

건저의 사건으로 정철, 성혼, 윤두수, 윤근수, 이해수, 홍성민, 이산보, 박점, 황정욱, 백유함, 유공진, 장운익 등 서인들은 죄다 유배형에 처해졌으며 동인이었던 이성중과 동인 영수 허엽의 사위인 우성전도 건저의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형에 처해졌다. 양천경, 양천회 등 최영경 등을 무고한 자들도 국문을 받다가 죽었다. 웃긴 것은 양천회, 양천경 등의 무고를 보고 선조는 처음엔 "이런 상소를 이렇게 늦게 올리다니!"라고 한탄할 정도로 띄워 줬다는 것이다. 선조도 최후의 양심인진 몰라도, 역모 조작자로 몰릴 수도 있는 정철에게 추가적인 죄를 내리진 않았다. 어쩌면 또 기축옥사 같은 일이 생기면 써먹으려고 남겨놨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선조는 대신이라 해도 가차 없이 쳐버렸지만 각 세력의 핵심 인물들은 뭐가 되든지 간에 보호했다. 어느 정도냐 하면 기축옥사 때 심문받던 이들에게서 류성룡의 이름이 나오자 류성룡이 피혐을 했는데, 선조가 "금옥 같은 선비"라 부르면서 옹호했다.

이는 결국 정여립의 난의 참혹한 옥사의 배후에는 선조가 있었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지나치게 세력이 커진 동인을 정철을 내세워서 제거한 다음, 그 죄는 모두 정철에게 뒤집어씌운 것이었다. 후일 기축옥사의 고변자들이었던 양천회 형제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정철이 건저 사건으로 몰락한 이후에 잡혀 와서 정철의 사주를 받아 그랬다고 자복하곤 곤장을 맞다 죽었는데, 정작 정철에겐 죄가 더해지지 않았다. 정철은 그냥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반증이다. 당시 동인이 정철의 처리를 놓고 갈등하던 것은 이산해의 강경파이자 광해군의 지지 기반인 북인, 류성룡의 온건파인 남인으로 갈라지는 한 계기가 되었다.

북인의 인맥은 조식의 근거지였던 지리산 일대(호남 + 영남 서부)였고 남인의 인맥은 그보다 동쪽인 경상도 일대였는데 정철이 주도한 기축옥사가 호남 동인 인사들의 씨를 말렸던 만큼 크게 피해를 보았고 심하게 당한 북인이 정철을 더 괘씸하게 여겼음은 어쩌면 당연하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을 간 사람들도 풀어주어 활용하기 위한 결정들에 의해 복직되었지만, 임진왜란 중 몽진 중이었던 선조를 보필하는 과정에서도 니나노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술 처먹고 긴급 작전 회의에 불참하는 등 막장 짓을 많이 저지르는 바람에 또 미움을 샀다.

그나마 선조의 신뢰가 워낙 컸기 때문에 일련의 헛짓에도 불구하고 자리는 어렵게나마 지켰다. 1593년 5월에 명나라에 사은사로 갔는데, 정철이 명나라 정부에 일본군이 모두 철군했다는 거짓 문서를 올렸다는 초특급 사고를 터뜨렸다는 보고를 권율이 받게 된다.

도원수 권율(權慄)이 치계하기를, "지난번 유 총병(劉總兵)이 신에게 ‘송 경략이 왜적이 모두 바다를 건너간 것으로 속여서 조정에 신보(申報)했으니 당신이 이런 뜻으로 국왕에게 전달(轉達)하여 천조(天朝)에 주문(奏聞)하게 해야 한다.’ 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저녁에는 또 접반사(接伴使) 김찬(金瓚)에게 통보(通報)한 것을 내보였는데, 그 내용에 ‘성지(聖旨)를 받들건대 「어제 조선 국왕이 진사(陳謝)한 표문(表文)을 보고 관군(官軍)이 적을 물리치고 성공한 것을 알고서 짐(朕)의 마음이 기뻤다. 다만 나라가 새로 진정되었으니 후환을 막아야 한다.」 했고, 병부(兵部)의 제본(題本)에는 또 「진주(晉州)의 포위가 풀렸고 부산(釜山)의 왜적이 물러갔다는 것에 대해 들은 사람들이 오히려 믿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신(臣)도 오히려 근심과 의아가 간절했습니다. 지금 해국(該國)에서 진사하러 들어온 사신이 본부(本部)에 도착하여 대면하여 한 말에 의거하건대, 해국의 지경 안에 남아 있는 왜적이 하나도 없고 강토를 모두 수복하였으며 사로잡혔던 왕자(王子)와 배신(陪臣)도 도로 돌아오고 무너진 종묘(宗廟)와 시직도 도로 세웠다 하니 이는 모두 황제의 은덕이 크게 펴지고 천심(天心)이 협조함을 힘입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장(諸將)들이 공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 했습니다.’ 신은 어떻게 회보(回報)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유 총병의 뜻을 헤아려 보건대, 처음에는 송 경략이 속여서 신보한 것으로 여겼었으나 이제야 우리 나라에서 터무니없이 속인 것임을 안 것 같으니 미안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이것 때문에 조선 정부와 명나라 파견군에서 난리가 났으나 류성룡의 조사로 알고 보니 정철은 일본군이 퇴각했다는 거짓 문서를 올린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송응창은 정철이 삼도를 수복했다는 문서만 올리게 하였고, 조선이 아직 위급하다는 문서를 올리는 것을 저지하여 들여보내지 않으면서 일본군이 조선에 없다며 거짓을 꾸며냈다. 그러나 명나라 정부에 일본군이 퇴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들통나자 송응창은 자신의 허물을 정철에게 돌렸다. 정철 본인도 거짓 문서 건에 대하여 선조에게 해명을 하였다. 서인 시각이기는 하지만 수정실록에서도 모함이라고 언급되었다.

"척 총병의 문서에 ‘행인(行人)이 나온다.’고 한 것은 정철(鄭澈)의 장계(狀啓) 중에 행인이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평양까지 왔다가 돌아갈 것이라고 한 그 사람을 가리키는 듯싶습니다. 그런데 칙서(勅書)를 가지고 와 선유(宣諭)한다면 서울까지 올 듯합니다. 신(臣)이 지금 홍인상을 통하여 중국에서는 왜적이 모두 물러간 것으로 여긴다는 말을 듣고, 비로소 전후의 문서를 가져다가 보니, 정철이 가지고 간 문서에 ‘삼도(三都)를 수복(收復)했고 강역을 재건했다.’고 한 말이 있었고, 황제도 ‘해국(該國)의 주문(奏文)을 보고 짐(朕)의 마음이 기뻤다.’는 말이 있으니, 지금 이렇게 군사를 유치시켜 놓은 것은 왜적이 재차 올까 싶어서인 것입니다. 이제 송 경략의 말대로 사은(謝恩)만 하소서. 다만 위급을 고하는 주문을 경략이 저지하고 들여보내지 않으면서 왜적이 없다고 중국 조정에 꾸며 대다가 마침내는 허물을 우리에게 돌릴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경략의 말대로 사은만 했다가 만에 하나라도 뒤에 다시 다른 말을 하면 어찌할 것인가? 경략과 상지(相持)하는 사이에 국사가 이미 기울어질 것이니, 이는 옛사람의 이른바 ‘너희들의 의논이 결정되는 동안에 나는 이미 황하(黃河)를 건넜다.’고 한 것과 같은 일이다. 중국에서 경략을 체직시킨다면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렇지 않다면 국사가 잘못될 것이다." - 45권, 선조 26년 윤11월 18일 무술 6번째 기사 1593년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 정철(鄭澈)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생각하옵건대, 상서(尙書)의 제본(題本)에 이른바 남은 왜가 없다는 것을 신들의 입에서 나온 것처럼 의심하니, 신은 멍하니 두렵고 의혹되어 그 까닭을 잘 모르겠습니다. 신이 그때 계비(界碑)의 일로 말을 다하여 깊이 변명하였는데, 신이 병부(兵部)에 바친 글 중의 한두 가지를 시험 삼아 들어서 말하면 ‘내려간 적이 동래(東萊)와 부산(釜山) 사이에 모였다.’ 한 것이 있고, 또 ‘적이 이미 부산과 동래 일대를 제 땅으로 삼고 또 전라도 등지를 침탈하려 한다.’ 하였으며, 그 허다한 말이 모두 흉적(兇賊)이 둔거(屯據)하고 횡탈(橫奪)하며 멋대로 노략하는 형상을 말한 것이었는데, 적이 물러갔다는 말이 어느 겨를에 입에서 나왔겠습니까. 바야흐로 대병(大兵)을 철수하는 것을 답답하게 여기는 판국에 가볍게 적이 물러갔다는 말을 내어 사기(事機)를 그르친다는 것은 더욱 인정에 근사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석 상서(石尙書)가 경략(經略)의 신보(申報)한 바를 신들에게 말하고 복청(覆請)할 즈음에 그대로 사연으로 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어찌 신들이 말하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면대하여 알아보았다고 핑계할 수 있단 말입니까. 또 이 제본을 가장 늦게 얻어 보고 처음에는 매우 놀라서 극력 변명하려고도 하였으나, 상서가 이미 경략의 신보에 의거하여 적이 물러갔다고 하였으니, 신이 만리 밖에 있으면서 어떻게 적이 아직 물러가지 않은 것을 알고 감히 그 말을 확실하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길에서 허진(許晉)을 만났을 때에 비로소 진주(晉州)가 이미 함락되었고 적이 아직 바다에 웅거하여 있다는 사실을 들었는데, 천정(天庭)에서 머리를 부수고 피눈물을 흘리려 하여도 이미 미칠 수 없었습니다. 고명(誥命)과 면복(冕服)을 경망하게 미리 청한 것으로 말하면 그 경거망동으로 큰일을 그르친 죄는 만 번 죽어도 갚기 어렵습니다. 신이 잘 봉명(奉命)치 못하여 이런 가지가지 죄과가 있으니, 삼가 천견(天譴)을 기다립니다. 지극히 불안하고 위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선조실록> 45권, 선조 26년(1593년) 윤11월 13일 계사 4번째 기사 1593년

과거에 정철이 부사(副使) 유근(柳根)과 함께 사은사(謝恩使)로 경사에 갔다가 돌아왔다. 이때 동로군문(東路軍門)이 화의(和議)를 주장하여 ‘왜적이 이미 군사를 철수하여 바다를 건너갔다.’고 속여 말했으므로, 본국의 주문(奏文)과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정철(鄭澈) 등이 돌아온 뒤에 병부(兵部)가 주문(奏文)하기를, "전에 온 사신에게 물었더니 역시 ‘왜적이 이미 철수해 돌아갔다.’고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랐는데, 유근이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기를, "이것은 실로 병부에서 속임수로 꾸며 낸 말입니다. 사신 일행이 어찌 그런 말을 했겠습니까." 하였다. 이때에 조정의 의논이 이미 변하여 먼저 정철을 제거하려고 하여 대간(臺諫)이 이를 인해 정철을 탄핵하였다. 그러나 상은 다만 체직시키고 추고하도록 명하였는데, 유근 및 서장관(書狀官) 이민각(李民覺)과 역관(譯官) 등은 모두 연루되지 않았다. -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12월 1일 경술 4번째 기사 1593년

그러나 어찌 되었든 외교사신으로 간 사람이 명나라 쪽에서 일본군이 조선에서 모두 철수했다고 잘못 알고 있는데도 정철이 제대로 변명을 못한 건 사실이라 동인들에게 그책임을 물어 탄핵을 받아 체직하였고 강화도로 낙향했다가 몇 달 만에 58세로 술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사후 1594년에 기축옥사 때 최영경 옥사 건으로 책임 공방을 두고 서인과 북인이 다투었는데 선조가 북인들의 편을 들면서 정철의 관작이 추탈당했다 1624년(인조 2년)에 관작이 복구되었다.

위급을 고하는 주문을 경략이 저지하고 들여보내지 않으면서 왜적이 없다고 중국 조정에 꾸며 대다가 마침내는 허물을 우리에게 돌릴 것입니다." 어지럽고 어려운 일을 푸는 것이 전대(專對)에 달려 있는데, 지난번 사은(謝恩)의 사행(使行)은 병부(兵部)가 경략(經略)의 신보에 따라 적이 죄다 바다를 건너갔다는 설(說)을 물었으면, 사신으로서는 삼경(三京)은 회복되었으나 흉악한 적이 아직도 변경을 점거하고 있어서 사나운 수리가 날개를 움츠리고 있는 형세라는 것을 힘껏 말했어야 할 것인데, 위급한 정상을 호소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상서(尙書)의 제본을 보게 되어서는 ‘사신을 면대하여 물으니 남은 왜적이 없다고 하였다.’는 말이 있는데도 그렇지 않다고 통렬히 변명하지 않았으니, 기회에 따라 잘 대처하지 못한 실책이 뚜렷합니다. 사은사(謝恩使) 정철(鄭澈), 부사(副使) 유근(柳根), 서장관(書狀官) 이민각(李民覺)을 모두 추고(推考)하도록 명하소서. " - 45권, 선조실록 44권, 선조 26년 11월 28일 무인 3번째 기사 1593년

대사헌 이헌국(李憲國), 집의 이수광(李睟光), 장령 이덕렬(李德悅), 지평 박승종(朴承宗)이 아뢰기를, "사은사 정철 등은 전대(專對)의 임무를 받고 남은 왜적이 없다는 설(說)을 힘껏 변명하지 못하였는데도, 신들은 모두 변변치 못한 사람으로 언지(言地)에 있으면서 곧 논핵(論劾)하지 않았으니, 그 죄가 이미 큽니다. 이제 뻔뻔스레 직에 있으면서 남을 조처할 수 없으니, 신들의 벼슬을 파면하여 주소서." - 선조실록 45권, 선조 26년 윤11월 19일 기해 4번째 기사 1593년

사헌부가 아뢰었다. "사은사 정철, 부사(副使) 유근(柳根)은 남은 왜적이 없다는 설이 자기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제본(題本)에 면대하여 심의하였다는 말이 있는 것을 보았으면 자기가 말하지 않은 연유를 변명했어야 할 것인데, 잠자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아 왜적이 없다는 것을 미덥게 하였으니, 파직하도록 명하소서." - 선조실록 45권, 선조 26년 윤11월 19일 기해 7번째 기사 1593년

 

선조를 예찬한 작품들은 임진왜란 전에 쓰여졌고, 선조도 임진왜란 전에는 그렇게까지 문제가 두드러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원래 유교권 국가에서 왕을 예찬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터지고 선조가 각종 추태를 보이자 정철도 선조의 추태를 말리다 못해 (상대가 왕인 만큼 돌려 말하기는 했지만) 핀잔주는 행동이 많아진다. 정철만 아니라 신료 전체가 그랬다.

관료로서의 무능함과 인성과는 별도로 유배지에서 굶어 죽어가며 구걸을 할 정도로 궁핍했다는 것은 그가 조선의 다른 권신들과는 달리 별로 치부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정철을 무능한 인물로 평가하면서도 '간신'으로 보지는 않는 경우가 많다. 실록을 보면 이런저런 잘못으로 여러 번 비난받고 탄핵당했지만, 딱히 부정 축재 문제로 비난을 받은 적은 없다.

정철의 묘는 원래 경기도 고양군(現 경기도 고양특례시) 원당면에 있던 것을 조선 현종 6년(1665년)에 송시열이 친히 풍수를 보고 묫자리를 정한 뒤, 후손 정양이 이장해 현재는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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