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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인물

이산해(李山海)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14|조회수36 목록 댓글 0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정치인, 시인, 서예가

동인이었다가 같은 동인인 류성룡과 갈라지며 북인의 당수가 된 인물이자, 세 번이나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조선시대 서예 8대가'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2. 생애

고려 말 유학자인 목은 이색의 7대손이다. 이산해의 고조부이자 이색의 증손자인 이우는 사육신의 한 사람인 이개와 사촌 관계이다. 아버지 이지번은 청풍현감을 지냈고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 이지함이 숙부이다.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한음 이덕형의 장인인데 이산해의 둘째 딸이 이덕형의 부인이었고 임진왜란 중에 절개를 지키기 위해 죽었다. 동갑의 사촌 형제인 이산보는 이산해와 달리 서인이었는데 이이와 친구였기 때문. 게다가 사위 이덕형은 남인이 된다.

어려서 글씨에 능했으며 이산해의 총명함이 궁궐에 전해져 명종의 귀에까지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5살 때에 시를 지었고 6살 때에는 장문의 글을 지어 신동으로 알려졌다.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 그의 집안이 화를 입게 되자 고향인 충청도 보령으로 이주하였다. 숙부 이지함이 직접 글을 가르치다가 남명 조식에게 보내고 이어 이황의 서원에도 출입하여 제자가 되었다. 그 뒤 초시를 거쳐 성균관에 입학해 학문을 배우고 1561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이량과 이감의 탄핵을 받았으나 극적으로 기사회생하여 여러 관직을 지냈다. 동서 분당 때 동인에 가담하고 대사간과 이조참의를 반복해서 역임하다가 1578년 서인인 윤두수, 윤근수와 그의 조카 등의 죄를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이후 병조참판, 이조참판, 이조판서, 형조판서를 지내고 다시 이조판서가 됐으나 서인들의 반발로 순탄치 않은 관직 생활을 하면서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대제학, 판의금부사 등을 겸직하였다. 우찬성, 좌찬성, 대제학을 거쳐 1588년 우의정에 올랐고 좌의정을 거쳐서 1590년 영의정에 올라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공신에 책록되었다.

1591년 음력 1월에 정철이 류성룡과 더불어 세자 책봉을 건의하려 했으나 이때 이산해는 병을 핑계로 회의에 나오지 않았다. 때문에 세자 책봉 건의안을 올리는 게 자꾸 늦어졌는데 갑자기 음력 1월 29일에 건의안을 올리기로 했던 부제학 이성중이 충청 감사로 전임되었고 이 바람에 세자 책봉 건의안은 공중 분해가 되어버린다. 정철 또한 좌의정 지위에서 물러나고 영돈녕부사로 체직되었다가 파당을 만들어 명경, 사대부들을 모함한 죄로 유배당한다. 급작스럽게 전개된 이 사건을 보면 정철이 자행한 기축옥사로 피해를 입은 동인들이 이산해를 중심으로 치밀한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서인 세력이 몰락하고 동인이 집권했는데 서인 세력 처리 과정에서 온건파였던 류성룡 등과는 달리 이산해는 강경한 태도를 보여 이로 인해 결국 동인은 온건파인 남인과 강경파인 북인으로 분당된다. 이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지낸 뒤 영돈녕부사, 영중추부사, 대제학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한양이 함락되자 좌의정 류성룡, 우의정 이양원과 함께 파직되었으며 본인은 평해로 유배보내졌다. 영의정은 최흥원, 좌의정은 윤두수, 우의정은 유홍이 임명되었다가 이후 다시 복귀한다. 1599년 북인이 대북과 소북으로 분열되자 대북의 영수가 되었다.

1609년 병이 들어 광해군이 이이첨을 문병보내기도 하고 어의까지 내려줬으나 1609년 음력 8월 사망했다.

34. 여담

붕당의 시조 중에는 후세에 다소 인지도가 낮은 편에 속하나, 정철이건 류성룡이건 율곡이건 붕당의 당수들이 어릴 때부터 공부 잘 해서 책 한번만 정독하면 다 외운다고 소문나고 그러했듯이, 이산해도 어릴 때부터 머리가 하도 좋아서 공부를 특출나게 잘한다고 전국에 소문났던 사람이다. 책 한번만 읽으면 그냥 다 외운다고 하는 절정의 선비 스타일. 숙부 토정에게 배운 뒤, 경상도로 떠나 남명의 문하에 있을 때도 남명에게 머리좋다고 칭찬받았고, 퇴계의 문하에 있었을 때도 따로 칭찬받았을만큼 지능 하나는 매우 뛰어났기에, 나중에도 본인처럼 어릴 때부터 공부 잘한다고 소문나서 거기까지 올라온 정철과 맞설때도 지식배틀하듯 의견충돌한 적이 많았다. 심지어 무려 5세라는, 사실상 아기에서 벗어날까 말까할 때 가을 밤나무에서 벌어진 밤송이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지었다는 시가 전해지는데, 아래와 같다.

一腹生三子 中者兩面平(일복생삼자 중자양면평)

한 배에서 셋이 태어났는데, 가운데 거는 양면이 평평하구나

秋來先後落 難弟又難兄(추래선후락 난제우난형)

가을이 와 앞뒤로 떨어져 구르는데, 그 중 누가 형일지 동생일지 알기가 어렵구나

하루는 조정에서 큰 연회가 있어서 모든 대신들이 간 일이 있었는데 이산해는 다른 일이 있어서 참석하지 못하고 시를 지어 보냈다. 끝에 자기 호인 '아계'를 변형해서 '아옹(鵝翁)'이라고 호를 적었는데 이를 본 정철이 "이산해가 오늘은 제대로 자기 소리를 냈군!"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옹'의 읽는 음이 고양이 우는 소리와 비슷한 것에서 이산해를 고양이 같은 사람이라고 디스한 것이다. 이를 들은 이산해도 정철에게 유감을 품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건저 문제 유발 등 선조 대의 당쟁이라는 불에 기름을 부은 간신이라는 평가가 있다. 정철을 띄우고 이산해를 지나치게 비하한 박종화의 '자고 가는 저 구름아' 및 여기에 영향을 많이 받은 위인전 때문에 이런 인식이 더욱 심해졌다가 최근에 와서야 개선되고 있다.

이산해 역시 임진왜란 때문에 가족을 잃는 참척을 두 번이나 당했다. 이덕형의 부인인 둘째 딸은 왜군에게 욕보일 수 없다며 자결했고 사촌인 의병장 이산겸(숙부 이지함의 서자)은 송유진의 난에 휘말려 옥사를 했다. 이 일 모두 이산해가 유배간 와중에 벌어진 일들이다.

이이와 류성룡 그리고 이산해는 뛰어난 인재로 평가 받은 건 비슷하나 정치 활동이 다른데 이이는 거침 없는 직설과 직언으로 선조와 애증 관계를 가졌다면 류성룡은 직언보다 반대를 간접적으로 의견을 표현하며 이산해는 선조가 원하는 대답과 행동을 했다고 한다.

정치모략에 능했던 노회한 정객이었지만 의외로 개인 비리나 부정축재로 탄핵된 적은 없고 청렴했다. 사망했던 곳도 세들어 살던 집이었을 정도. 무려 영의정이라는 최고위 공무원까지 했던 사람이 자기 집이 없었던 것이다.

남인의 영수 류성룡이 일본과 화친을 주장했다며 주화오국의 죄를 주장하며 류성룡을 탄핵하여 파직시킨 북인들의 영수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산해의 손자인 이무(李袤)와 증손자 이인빈(李寅賓)은 남인이었기 때문에 이산해의 후손들은 북인에서 남인으로 전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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