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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인물

박은(朴訔)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12|조회수19 목록 댓글 0

1. 개요

여말선초의 관료, 조선의 정승으로 부친은 고려 말의 문신 박상충이고, 외삼촌이 목은 이색이다.

2. 생애

2.1. 조선 개국 초반

1385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1391년 개성부 소윤이 된다. 하지만 조선 개국 후에는 관직에 오르기는 했으나 주로 지방관을 전전하게 되는데, 아무래도 외삼촌이 되는 이색이 정도전 일파에 의해 내쫓겨지고 외사촌들은 죽기까지 한 상황에다 아버지인 박상충이 죽은 지도 20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이었던지라 중앙 관직에 오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집안의 배경을 본다면 오히려 조선 개국에 반대하던 정몽주를 비롯한 고려잔존파와 더 가까웠을 확률이 높다.

다만 졸기 등 실록에 기록된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본인의 대쪽 같은 성품 탓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태조 6년에 그와 안 좋은 사이였던 유양이라는 이가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게 되었고, 당시 집정이었던 이가 그를 사헌시사로 임명하여 처벌을 하게끔 만들었는데, 오히려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주장하여 유양이 벌을 받지 않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집정으로부터 미움을 받아서 지춘주사로 좌천되기도 했고, 태종 때에는 박은이 전라도 관찰사로 있었을 때 명나라에서 황엄이란 환관이 사신으로 왔는데, 그의 횡포에 시키는 대로 따랐던 다른 지방관들과는 달리 오로지 박은만이 규정에 맞게 대접하여 황엄이 이런 그에게 노하면서도 태종에게 그의 충신은 박은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든지, 대사헌이 되었을 당시에는 당시 좌정승이었던 하륜이 잘못한 바가 있으면 지적하였고, 그의 말을 하륜이 듣지 않으면 서명하지 않았다는 등의 일화가 남아있을 정도였다.

2.2. 이방원과 가깝게 지내다

어쨌든 그런 주변 상황 때문이었는지 이방원 측과 함께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1398년에 이방원이 무인정사를 일으켰을 당시 상술한 대로 지춘주사로 있었다가 상경하여 무인정사에 참가한 공으로 이방원에 의해 도성에 남아 사헌중승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중앙 관직에도 오르기 시작했고, 2차 왕자의 난 때도 이방원을 도와서 그가 태종으로 즉위했을 때 좌명공신에 책봉되었으며, 육조의 판서직을 두루 거치는 등 중앙의 중요 관직을 두루 거치며 승승장구하여, 결국 1416년 우의정에 올랐고, 뒤이어 좌의정에 임명된다.

2.3. 심온을 몰락시키다

그런데 좌의정 시절 때 태종의 외척 숙청 계획에 가담해 세종의 처가인 심온의 가문을 몰락시키는데 한몫을 하였고, 심온이 절대 반남 박씨와는 결혼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일화가 야사인 연려실기술이나 기재잡기 등에 남았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전제군주정인 당시 조선의 상황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만백성의 어버이인 국왕을 탓할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심온의 죽음에 대해서 태종에게 책임을 지우기보다는 박은을 원망하는 것이 당시로서는 합당했다.

이후 박은은 세종 때에도 좌의정 자리를 유지하지만, 태종이 죽기 하루 전에 죽게 된다.

3. 여담

대중들에게는 태종의 외척 숙청에 적극 가담하고 한술 더 떠서 소헌왕후 폐위까지 주청한 전적 때문에 아첨꾼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나 이는 세종의 개인적인 감정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앞서 서술했듯이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국왕을 비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들인 세종의 입장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음은 분명하다. 이를 뒷받침하듯이 세종은 박은의 명예를 추탈하는 등의 처벌을 일절 내리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실록 속 사례나 전해져 오는 야사에 따르면 박은은 대중적인 이미지와 달리 오히려 대쪽 같고 검소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소헌왕후의 가문과는 다르게 원경왕후의 친정 가문과는 꽤나 친분이 돈독했던 사이였고, 이 때문에 민무구, 민무질 형제 숙청에 가담하지 않았고 친분이 있었다는 이유로 간언들에게 탄핵을 당했을 정도. 그리고 비슷한 행보를 보였던 선배 하륜과는 달리 청빈하고 검소하게 살았다고 한다. 전해져오는 야사에 따르면 우의정으로 임명되고나서도 낙산 밑에 조그만 집을 짓고 심지어 밥도 비교적 거친 조밥을 먹고 살았다가 미행을 나왔다가 박은의 집에 들린 태종 이방원이 이를 보고 의아하게 여겼을 정도였다고. 이 야사의 경우 박은의 본관인 반남 박씨 집안에서 전해져오는 반남록에 실린 야사라 다소 집안 인물을 의도적으로 미화하고 띄우는 성향도 없지 않아 있긴 하지만, 실록에서도 박은이 치부와 뇌물로 물의를 일으켰단 기록은 전무하다.

4. 후손

조선 ~ 근대 대다수 반남 박씨 역사인물의 조상이다. 차남 박강의 증손, 즉 조은 박은의 현손인 인종비 인성왕후와 삼남 박훤의 아들인 박숭질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장남인 박규 쪽인데, 구체적으로는 박규의 현손인 5대손 야천 박소에서 갈라진다.

박소의 장남 박응천의 후손이 소론의 박세당(박은 기준 9대손)과 그 아들 박태보(10대손) 부자,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14대손), 구한말의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박정양(17대손)이고, 박소의 차남 박응순의 딸이 선조비 의인왕후(7대손)이며, 박소의 4남 박응복의 후손이 소론의 박세채(9대손), 부마 박필성(11대손)ㆍ박명원(13대손), 연암 박지원(13대손)과 그 손자 박규수(15대손), 부마이자 갑신정변의 주역이며 이후 친일이 된 박영효(18대손), 구한말 친일반민족행위자(을사오적·경술국적) 박제순(16대손)과 그 손자인 독립운동가 박승유(18대손)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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