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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보(杜甫)-빈교행(貧交行)(가난할 때의 사귐)

작성자한병곤(네이버 블로그)|작성시간21.05.06|조회수296 목록 댓글 2

두보(杜甫)-빈교행(貧交行)(가난할 때의 사귐)

飜手作雲覆手雨(번수작운복수우)        손 뒤집어 구름 만들고 손 엎어 비를 만드노니

紛紛輕薄何須數(분분경박하수수)        이렇듯 경박한 무리들을 어찌 다 헤아리겠는가

君不見管鮑貧時交(군불견관포빈시교)  그대는 관중과 포숙의 가난할 때의 사귐을 알리니

此道今人棄如土(차도금인기여토)        현대인들은 이 도리를 흙처럼 버리는구나

 

*두보[杜甫, 712~770,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少陵), 동정호(둥팅호)에서 사망] 시인은 중국의 성당시대(盛唐時代)의 시인인데, 시성(詩聖)이라 불리는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시선(詩仙)이라 불린 이백과 쌍벽을 이루었습니다.

 

*주로 낭만적이고 호방한 시를 쓴 이백과 달리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두보는 인간의 심리를 자연과 절묘하게 조화시키면서 현실을 반영한 서사시와 서정시를 주로 썼는데, 안녹산의 난 등으로 피폐해진 백성의 삶과 산하를 노래하여 역사적인 현실을 반영하는 시를 많이 쓰기도 하였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북정(北征)”,“추흥(秋興)” 등이 있습니다.

 

*두보는 비록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하였지만 전란이 끝난 후 친구 엄무(嚴武)의 도움으로 사천성(쓰촨성) 성도(청두)에 완화초당을 짓고 농사지으며 전원생활을 하며 오랜만에 여유가 생기는 생활을 즐기기도 하였습니다.

 

*위 시는 문학비평가이신 ‘김희보’님의 편저 ‘중국의 명시’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본 것인데, 위 시는 작자 41세 때의 작품으로 과거에 낙방하고 잠시 서울 장안에 머물며 옛 친구들을 찾았으나 모두 냉정하여 당시 야박한 인정을 읊은 시라 합니다.

 

*형식 : 칠언고시(七言古詩)

 

*貧交行(빈교행) : 行은 노래의 뜻, 악부제(樂府題)

雲, 雨 : 인심이 곧 바뀌는 것을 비유

何須數(하수수) : 하나 하나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君(군) : 세상 사람들

管鮑(관포) :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관중과 포숙아, 관포지교로 유명, 사기 열전(史記 列傳), 관안열전 관자열전 중에는 관중이 술회한 부분과 관중과 포숙아에 대한 후세의 평이 기록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公子糾敗, 召忽死之, 吾幽因受辱, 飽叔不以我爲無恥, 知我不羞小節而恥功名不顯于天下也, 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 飽叔旣進管仲, 以身下之, 子孫世祿於齊, 有封邑者十餘世, 常爲名大夫, 天下不多管仲之賢而多飽叔能知人也(“공자규패, 소홀사지, 오유인수욕, 포숙불이아위무치, 지아불수소절이치공명불현우천하야, 생아자부모, 지아자포자야”, 포숙기진관중, 이신하지, 자손세록어제, 유봉읍자십여세, 상위명대부, 천하불다관중지현이다포숙능지인야).

“공자 규가 보위를 놓고 다투다가 패사했을 때 소홀(召忽)은 자진했으나 나는 붙잡혀 굴욕을 당하는 쪽을 택했다.

그러나 그(포숙아)는 나를 후안무치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내가 사적인 의리(小節)는 부끄러워하지 않으나 천하에 공명을 떨치지 못하는 것은 부끄러워 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준 것은 부모이고, 나를 알아준 것은 포숙아다.”

‘포숙아는 관중을 천거한 후 아랫자리에 있으면서 그(관중)를 받들었다.

포숙아의 후손은 대대로 제나라의 녹봉을 받으면서 봉지를 10여 대 동안 보유했고, 늘 명문 사대부 집안으로 명성을 떨쳤다.

천하 사람들이 관중의 현명함보다 사람을 잘 알아보는 포숙아의 지인지감(知人之鑑)을 더욱 칭송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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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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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james | 작성시간 21.05.13 어려울때 함께 하면 그 어려움도 나뉜다고 하지요....
    하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은듯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노력해야겠지요~~~~~
  • 답댓글 작성자한병곤(네이버 블로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05.17 좋은 말씀과 배려에 깊이 감사드리고,
    늘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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