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현 신승희-회상(回想)
-헌시 : 일제 감정기의 강제 징용-
1.
우리는 누구인가?
한 세기의 강물을 바라보며
내가 선 이 자리에서
쇠사슬처럼 묶인 긴 – 어둠 속
한 방울의 물이 심장을 두드리고
젖은 입술에 쏟아지는 침묵의 파도는
목이 잠긴 채 날갯짓 없는 새들이여!
채찍과 쇠몽둥이, 잔인한 리듬은
뽑힌 손톱 사이로 흘러내리는 붉은 의지의 꽃
“말하라, 굴복하라” 외치는 그림자들 사이로
주먹 쥔 저항은 더욱 깊이 뿌리내리고
꺼지지 않는 등불처럼 살아 숨 쉬는 혼
발밑의 바람, 끊어진 길 위로
사라진 수많은 푸른 넋이여!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그대들의
숭고(崇高)한 발자국 그날의 역사여
한 맺힌 모국어의 아리랑이여
오늘의 이 나라, 피와 눈물로 지켜낸 땅 위에
벼 이삭 사이로 흐느끼는 저 숨어 우는 바람은
조상들의 숨결이 묻어있어 흙 내음 설움의 노래를 달고
역사(歷史)의 뒤안길에서 더욱 빛나는 별들이여
2.
아침은 와도
어둠이 사라지지 않던 그날의 시간
강물은 흐르지만, 자유는 메말랐고
흩어진 꽃잎 위로 말발굽 소리 울리던 날
누군가의 땀가 눈물로 지켜낸 논밭도
이름 모를 자들의 손에 떨어지고,
낯선 혀끝에서 우리말 모국어(母國語)가 조롱당할 때
울음 삼키며 새벽마다 숨죽여 기도하던 당신
그 암울했던 긴 – 세월 일제 강점기
사랑을, 사랑이라 말하지 못하고
분노를 분노라고 외치지 못해
가슴 도려내던 그때 그 시절
그 아픔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으리오
”우리는 조선 사람이다.“
이 말을, 절대 잊어선 아니 된다.
가슴 깊숙이 몰래 속삭이며
밤마다 붓 대신 손끝으로
바닥에 글자를 쓰시던 어머니!
당신의 목소리는 봇물처럼, 터져
이 거리에서 저 거리로 강물로 채우시더니
당신은 지금 어느 별에서
피 묻은 전설을 노래하고 계십니까
3.
마지막 숨조차 낯선 딸에 뿌려진
땀과 피로 얼룩진 아들의 손,
먼 – 타국의 바람에 흩어지고
그 손으로 지키려던 가족과 고향
소망은 번번이 꺾여 나무처럼 쓰러지고
깃발은 검은 물결에 휩쓸리며,
손목에 채워진 쇠사슬의 무게는
한세대를 짓누르는 고통의 산이었거늘
그러나 ”누군가는,
벽 뒤에서 태극기를 그렸고“
누군가는, 붉은 손으로 시를 쓰며
길을 찾았습니다.
어둠은 길었은 별빛 하나 꺼지지 않고
우리의 뿌리는 땅 깊숙이 살아 쉼 쉬며
36년의 긴 – 겨울이 끝나고 해방의 종이 울릴 때
삼천리, 금수강산 무궁화꽃이 피어났습니다.
우리는 압니다.
쓰러지지 않는 정의의 노래가
어둠을 밀어내는 봄을 부른다는 것을…
*여현 신승희-월간 ‘문학세계’ 시 낭송, 평론 등단, 올해의 신춘 작가상, 위대한 한국인 대상 외 다수 수상, 진해문인협회 회장 외 다수 역임, 시의 바다/소리 문학 발행인, 월간 ‘문학세계’ 편집위원, 공익법인 (사)한국명시낭송가협회 이사장 외 다수 활동, 시집 “어머니의 강”, “바람의 언덕에서”, 시선집 교본 “전문시낭송교실/이론과 실제”, “CD 시의 풀밭을 걸으며” 외 다수.
*위 시는 월간 ‘문학세계’ 2025년 6월호에 실려 있는 것을 올려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