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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부르는 흥보가 한 대목을 들으면 현실을 떠나 어느새 그 마당에 흥건히 몸과 마음을 적시게 된다. 애고 애고 안타깝다가 껄껄껄 웃음이 났다가... 한마디로 그는 청중을 쥐락펴락 한다. 지난 11월19일 서울 국립극장에서 '흥보가' 완창 공연을 가진 전인삼(39)씨. 공연실황 테이프만 들어도 객석의 후끈한 열기와 추임새가 그대로 전달된다.
그가 부르는 흥보가는 동편제 명창 강도근이 즐겨부르던 흥보가이다. 좋은 체구와 풍부한 성량을 지닌 그는 특별한 기교 부리지 않고 대신 쭉쭉 뻗는 우렁찬 소리로 무대를 휘어잡는다. '목으로 우기는 소리'라는 동편제의 매력이 그속에 그대로 살아있다. 소리하는 그의 얼굴을 보면 온몸의 기와 힘을 모아 시방 한꺼번에 쏟아내고 있는 양이다. 청을 높게 잡아 힘으로 밀어부치는 소리. 꾸밈없고 우직하다. 거짓이 들어설 틈이 없다. 가볍고 화려하고 치장이 많은 소리들에선 찾을 수 없는 깊은 맛이 우러난다.
-흥보가의 매력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재밌고 해학적이지 않은가.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흥보가가 지닌 매력은 빛이 바래지 않는다. 벌써 완창무대만도 여러번이지만 창자(唱者)에게도 결코 질리지 않는다. 매번 새롭다. 권선징악이란 주제 자체를 넘어 대목대목이 그렇게 절절하고 재미질 수가 없다. 가난 뿐 아니라 사느라 생기는 온갖 우여곡절을 어쩌면 그렇게 웃음나게 눈물나게 잘 풀어낼 수 있을까, 늘 감탄한다.
특히 그가 부르는 박타는 대목은 언제 들어도 신명이 오른다. 흥부네 식구들이 첫째박을 탄 다음 밥을 많이 해먹고 나서 재담과 함께 부르는 대목 "받아먹고 되야내고 받아먹고 되야내고" 하는 대목은 늘 청중들이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는 대목이다.
-소리와의 인연은 언제부터 =글메, 그것이 이야기하자면 길다. 노래 하면 동네 어른들도 모두 "인새미(인삼이)"를 첫손꼽을 만큼 어렸을 적부터 노래를 잘했다. 동네에서 화전놀이가면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네다섯살 쬐끄만 놈이 양은쟁반을 숟가락으로 치며 놀았다더라. 국민학교적에 맨날 듣던 라디오 프로그램도 '민요백일장' '할머니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같은 민요 국악 프로그램이었다.
동네에 기생출신 아주머니가 살았는데 소리가 어찌나 좋던지 어느날엔가는 그집 처마밑에서 비를 줄줄 맞으며 저녁내내 그 아주머니 소리를 들었던 적도 있었다. 내가 살던 동네 노암동에 국악원이 있었는데 학교갔다 올 때도 늘 자전거 받쳐놓고 넋을 빼고 그 소리를 들었다.
-본격적인 소리공부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춘향제 열릴 때 우리 학교(남원 성원고)도 가장행렬에 나서게 됐다. 그때 연극반 선생님이 판 틀 것 없이 네가 직접 춘향가 한 대목을 부르라 했다. 박초월이 부르는 '춘향가' 중 이별가를 몇시간 연습해서 겁도 없이 흉내를 냈는데 그것이 그야말로 히트를 쳐부렀다. 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오메, 그 학상 좀 보자"며 나를 줄줄 따라왔다. 그 다음날 교장선생님이 나를 불러 "너는 아무래도 소리를 해야 할 것 같다" 했다. 어머니까지 학교로 부르셨다. 자식이 '면서기'나 '학교선생' 하는 게 간절한 꿈이었던 어머니지만 교장선생님이 그리 말씀하시니 포기를 하셨다. 그래서 열일곱살에 꿈에 그리던 국악원에 다니게 됐다. 거기서 강도근 선생을 만났다. 그때 선생이 내가 부르는 농부가를 듣고 하신 말씀이 "이 녀석 어디서 몇 년 배우고 왔그만"이었다.
-소리하면서 힘들었던 때는 =소리연습을 하다보면 목이 쫘악 깨져갖고 목뒤에 큰바위덩어리를 눌러놓은 것 같이 답답하고 막히는 상태가 온다. 건목이 통성화되는 과정이다. 그 목을 트기 위해 무진장 애썼다. 날마다 동네 금앙봉 뒷산에서 달이 훤히 떠오르도록 연습했다. 어찌나 소리가 안 트이던지 손에 쥐고 있던 부채로 목을 콱 찔러부러서 목을 터치고 싶을 때도 많았다.
-소리스승으로서 강도근 선생이 준 가르침은 =스승님은 60세 넘도록 직접 농사를 지으셨다. 농사지어 제 밥은 스스로 챙길 수 있어야 세상에 아부 안하고 더런 꼴 안 보고 타협 안하고 살 수 있다고 믿으셨던 분이다. 정직한 노동과 정직한 소리, 그 두가지 가르침을 주셨다. 스승님은 내가 서울로 대학갈 때 제일 서운해하셨다. "나는 학교문앞에도 가본 적 없어 하늘천따지도 모르고 겨우 언문깨쳐 이름석자 정도나 쓰지만 내가 공력들여 소리하니께 명창 소리 듣고 산다" 하시며 서울가면 사람버린다고 말리셨다. 제자가 고향 남원을 영영 떠버릴까, 세상의 헛된 명리를 좇을까 염려하셨던 것 같다.
"소리를 밥먹듯이 하라. 시간이 없으면 궁시렁거리기라도 하라. 너는 동편제 6대다. 이말 명심하고 남원 뜨지 말고 니가 이땅을 지켜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다.
그 가르침이 있었기에 그는 서울에서 추계예술대를 다닐 때도, 또 군대 가서도 "너 나중에 뭐할거냐"라는 물음을 받으면 "저는 고향갑니다"라는 우직하고 뜽금없는 답을 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별명은 어디서든 '촌놈'이고 '외통수'였다. 고향가서 스승 뒤를 잇는 것…서울에서 학교다닐 적 성창순 선생의 집에 머물며 소리공부를 할 때도, 군대시절 남들보다 한시간 빨리 일어나 벙커에서 소리연습을 할 때도 그 생각은 한시도 그를 떠나지 않았다.
-좋은 소리꾼이란 무엇인가 =득음을 위해 정진하는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가장 인간적인 목소리, 가장 자연적인 목소리를 얻는 것, 그 경지에 다가서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 데서 사람도 소리도 거듭난다.
처자식 딸린 몸이었으면서도 96년 1월 세상과 인연끊듯 독하게 마음먹고 전북 봉화산 아래 들어가 '독공'한 것도 세속에 이리저리 물든 자신의 몸과 마음을 씻고 한사람의 진정한 소리꾼으로 거듭나고자 한 몸부림이었다. 췌장암으로 투병하던 스승은 그해 돌아가셨다. 이듬해인 97년 전주대사습에서 장원하고 그가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은 스승의 묘였다.
스승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니 스스로 그리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해 그는 고향 남원을 지키며 동편제 소리를 이어오고 있다. "내가 사는 땅 남원의 골목골목에 판소리가 들리고 집집마다 북 하나쯤 두고 사는 세상이 왔으면" 그런 야무진 꿈을 갖고 산다.
오로지 소리로 채워진 그의 삶. 딴 데 눈돌린 적도 해찰한 적도 없다. 소리 안에서 웃고 울었다. 돌아보면 흥보처럼 "아이고 마누라~" "아이고 어머니~" 억장 무너져 통곡할 일들이 그라고 없었으랴. 하지만 그는 그 구비구비들을 넘고넘어 '제 길'을 찾아 흔들림없이 걸어가는, 소리 안에서 깊어가는, 행복한 사람이다.
*전인삼씨 약력 -추계예술대 국악과, 용인대 예술대학원 국악과 졸업 -대전시립 연정국악원, 전북도립국악단, 광주시립국극단, 국립민속국악원 단원, 남원 시립국악원 국악장 -제23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명창부 장원(1997) -국립극장 완창 판소리 '전인삼의 흥보가' 외 독창회 다수 -사사:강도근 박봉술 성창순 이일주 조상현 성우향 -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흥보가 이수자, 전인삼 동편제 판소리 연구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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