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34) - "진흙을 이겨"
(요9:6~12)
6 이렇게 말씀하신 후에 주께서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 소경의 눈에 바르시고
7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가서 실로암 못에서 씻으라.”고 하시니라.(실로암은 해석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그러므로 그가 가서 씻고 보면서 왔더라.
8 그때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소경이었던 것을 본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그 사람이 아니냐?”고 하더라.
9 어떤 사람들은 “그 사람이라.”고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을 닮았다.”고도 하는데
그가 말하기를 “내가 그 사람이라.”고 하더라.
10 사람들이 그에게 말하기를 “어떻게 해서 네 눈이 떠졌느냐?”고 하니
11 그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예수라는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내게 말하기를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고 하더라.
12 그 사람들이 “그가 어디 있느냐?”고 하니, 그가 말하기를 “나는 모르노라.”고 하더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을 특별한 방법으로 고치십니다.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선뜻 이해하기 힘든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죽게 되었을 때, 단지 바다를 향해 "잠잠하라" 꾸짖으심으로 끓어오르던 광란의 바다를 잠재운 분이십니다. 죽은 나사로의 시체가 나흘이 지나 이미 썩은 냄새가 진동을 하건만, 무덤을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 명령하심으로 죽은 나사로가 수의를 입은채 무덤에서 걸어 나오게 하신 분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주님께서 말씀 한마디 하시지 않았음에도,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고통 받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지고서도 깨끗하게 나음을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 오는 본문에서는 "소경아, 눈을 떠라"고 명령하심으로 고치지 않으시고,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주는 일을 하고 계십니까? 주님께서는 간단하게 고치실 수도 있었지만 소경과 인격적인 만남, 인격적인 사귐을 갖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경이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을 볼 수 없지만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셔서 진흙을 이기시는 손놀림을 영혼으로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가까이 서 계시는 숨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성껏 이긴 진흙을 나의 눈에 발라주시는 예수님의 손길과 따스한 주님의 체온을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온유한 음성을 들었을 것입니다.
사회학자이자 목사인 토니 캄폴로는 '당신이 이제껏 들어 온 모든 것은 다릅니다' 라는 책에서, 자신의 경험에 의하면, 사람이 죽을 때에 못다 이룬 자기 사업이나 업적을 후회하면서 죽는 자를 본 적이 없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돈을 좀더 벌지 못했다든지, 좀더 큰 사업을 이루지 못했다든지, 더 높은 직책에 오르지 못했음을 후회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죽기전에 무엇을 후회하는가? 바른 삶을 살지 못했음을 후회합니다. 이를테면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못했음을 후회합니다.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다하지 못했음을 후회합니다. 사랑하는 자식과 아내에게 더 많은 시간을 내어 주지 못했음을 후회합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분과 인격적으로 사귀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분의 인격 앞에 내 인격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 삶속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신앙에 있어서 한 가지 핵심은 관계입니다. 인간이라는 한자를 보아도 그렇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합니다. 인간의 행복도 관계에서 오고 삶의 의미도 관계에서 옵니다. 이 세상에서 나 혼자 산다면, 아무리 많은 황금을 가지고 있든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우리는 항상 관계 속에서 존재합니다.
주님과의 참다운 관계, 또 주님이 허락하신 사람들과의 참다운 관계를 통해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사시기를 기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