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사무엘의 성장과정
“그 사람 엘가나와 그의 온 집이 여호와께 매년제와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에 오직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그의 남편에게 이르되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뵙게 하고 거기에 영원히 있게 하리이다(삼상1:21~28).”
사사시대가 끝나고 왕국시대로 들어가기 위해서 사무엘이라는 한 사람이 필요했다. 사무엘은 왕국을 이스라엘 안으로 이끌어온 사람이다. 이는 결국 영원한 왕국을 이끌어 오신 그리스도의 예표라고 할 수 있다.
가. 나실인적인 어머니의 기도와 그 인격 안에서 자람
사무엘의 성장 과정을 보도록 하자. 예수님도 낳아졌을 뿐만 아니라 자라났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2:52).”고 했다. 사무엘도 낳기만 한 게 아니고 성장해서 어른이 되었을 것이다.
그의 성장이 우리에게 왜 중요한가? 그의 어머니 한나는 결국 나실인이 되어서 나실인을 낳은 것이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이라야 자식도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경륜에 협력하는 것이 즐거운 사람이라야 자식도 하나님의 경륜에 협력하는 것이 즐거운 사람이 된다.
나실인으로 서원한 것은 사무엘이 아니고 그의 어머니였다. 그의 어머니가 자기 아들을 나실인이 되게 하겠다고 하나님 앞에 서원했던 것이다. 나실인은 자기를 위해 살지 아니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이다. 이미 한나는 사무엘을 낳기 위해서 나실인이 된 것이다. 나실인 안에서 사무엘을 낳았고, 그를 나실인으로 하나님께 바쳤던 것이다. 나실인인 어머니의 기도 속에, 그 인격 안에서 사무엘은 자라게 되었다.
자신의 욕심 안에서 자녀를 키우는 것과 하나님께 드리는 나실인의 마음 안에서 자녀를 키우는 것은 아주 다르다. 오늘날 잘못된 자식들의 많은 문제는 부모가 너무 욕심을 부려서 그렇다. 수학능력시험을 봤는데 기대치만큼의 점수가 나오지 않았다 해서 자살해 버렸다면 그것은 결국 부모의 마음속에서 나온 것이다. 만약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너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전부다.’라고 했으면 적어도 자살은 안 했을 것이다.
부모의 그릇된 욕심 때문에 자녀를 버리는 경우가 많다. 아담의 욕심은 다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기의 자랑과 영광을 위해서 자녀가 뭔가 되기를 기대하고, 자식은 해봐도 안 되니까 절망하고 좌절해서 빗나가게 된다.
결국 부모의 소원이 어디 있냐에 따라서 자녀들이 이렇게 될 수도 있고 저렇게 될 수도 있다. 무조건 자녀를 위한다고만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욕심을 부린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그 자녀가 자라서 무엇이 될 것인지, 무엇을 위해서 살 것인지, 그것도 없이 무조건 욕심만 부리면 안 된다. 심지어는 자녀에 대해서도 명목은 자식을 위해서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 하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 예배당에서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들이 많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본능이다. 그러나 기도하는 어머니가 없어서 문제되는 것이 아니고 나실인이 없어서 문제다. 한나도 여자니까 다른 여자가 아들을 낳아서 자랑하니까 얼마나 속이 상했겠는가! 그것은 어머니의 마음이다. 그 마음이 나쁘다는 게 아니고 어떻게 하나님께 드려지냐? 그것이 문제다. 한나는 나실인이 되어 자녀를 낳고 키웠으니까 거기서 나실인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나. 나실인의 마음 안에서 양육함
사무엘은 나실인의 마음 안에서 양육을 받았기 때문에 나실인으로서 평생을 하나님께 봉사하게 되었다. 한나는 번민으로 인해서 마음을 비웠다. 그래서 그 근원이 성별되어 하나님에게만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
사람에게 번민이 있다고 해서 다 마음이 비워진다면 세상에 마음 비울 사람이 많지 않겠는가? 그런데 번민 때문에 마음이 비워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번민이 있을수록 마음에 한이 더 맺힌 사람이 있다. 이것이 문제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성령이 임하심으로 그 근원이 비워졌다고 하였다. 신약에는 마리아가 어떤 여자인지, 어떻게 살았는지 기록되지 않았다. 그것은 구약에 어떤 근거가 있었고 이미 그 이야기를 다 해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째서 마리아에게 성령이 임했느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한나에게 어떻게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었는가 하는 것에 있다.
신약은 다 이렇게 기술되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갑자기 성령이 어디서 와서 잉태할 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또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해도 큰 오산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과정을 거쳐서 비우게 하고, 성결케 하고, 하나님을 받아드리도록 하고 있다. 그 과정들은 각자 다르더라도 원리는 하나다. 우리의 마음을 번민케 하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비워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씨를 뿌리신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한나는 마리아로, 마리아는 오늘 교회로 이렇게 이어진다. 교회는 모두 한나이고 마리아다. 계시록 12장에 해를 입은 한 여자의 이상이 나오는데 그 여자를 마리아, 이스라엘, 교회라고도 한다. 다 해당된다.
우리는 교회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사무엘을 생산하고 있는지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한나를 보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하나님의 아들을 낳게 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신성한 근원이 되기 위해 우리는 비워지는 것이 필요하였다. 우리는 모두 아담으로부터 났다. 아담은 사탄으로부터 속은바 되어 불확실하고 부정하고 거룩하지 않는 근원, 즉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부터 출발했다. 결국 근원부터 잘못되었다.
그것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근본부터 비우지 아니하면 항상 밑바닥에 뭔가 남아서 그것이 찌꺼기로 있다가 계속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존심을 위해 자녀를 희생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결코 자녀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하와로부터 들어온 근원이 잘못돼서 그렇다.
우리는 하와를 떠나서 한나에게로, 그리고 마리아에게로 옮겨가야 한다. 우리의 근원이 비워져서 원천의 신성한 근원이 준비될 때, 참된 기도를 할 수 있고 참된 자식을 얻을 수가 있다. 사무엘은 어머니가 근원부터 성결해진 자리에서 태어났고, 그 자리에서 간구하는 간구에 의해 자라났다.
다. 성전에서 자람
온 집이 매년제와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 사무엘의 어머니는 올라가지 않았다. 사무엘이 젖을 떼면 여호와께 영영 드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좀 이해하기 어렵다. 젖 뗀 아기를 어떻게 성전에 갖다 놓았을까? 늙은 엘리 제사장에게 맡겼다고 했는데 그는 젖 뗀 애기를 어떻게 키웠을까?
이것은 아마 그런 말씀일 것이다. 젖을 뗐다는 것은 어머니가 없어도 자랄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 같다. 한나는 자기가 양육하는 것이 끝나면 ‘그 애를 영영히 여호와 앞에 드리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사무엘은 어머니를 떠나서 제사장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제사장 밑에 들어가니까 자연히 성전에서 자라는 아이가 되었다. 거기서 밥을 먹은 것은 성전에서 먹은 것이고, 자라나도 성전에서 자라났고, 놀아도 성전에서 논 것이고, 구경을 해도 성전에서 구경하는 그런 아이가 되었다. 이것은 섬기는 예법 안에서 자라났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분위기, 하나님을 섬기는 여건 속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어떤 여건에서, 어떤 분위기에서 자라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들이 험한 환경이나 나쁜 분위기 속에서 자라나면 좋은 인성을 가져오기가 어렵다. 사무엘은 섬기는 예법 안에서, 그 공기 안에서 자라났으니까 오로지 하나님을 섬기는 것만 아는 사람이 되었다.
성전이나 섬기는 예법이나 제물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러니까 그는 어려서 본 것마다 전부 그리스도를 본 것이다. 주일학교 아이들이 참 복된 것은 어려서부터 뭔가 말을 들어도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예표하는 어떤 말을 듣고 자란다는 것이 참 중요하다. 이런 개념 안에서 자라는 것과 전혀 다른 개념 안에서 자라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생명은 하루 아침에 당장 효과가 나지 않는다. 그것은 오랜 시간 거쳐서 자라나는 것이기 때문에 뿌리 깊게 들어간다. 잠재의식은 전부 어렸을 때부터 생긴다. 우리의 성격이나 습관은 어렸을 때 형성되기 때문에 자기도 모른다.
욕쟁이 부모 밑에서는 욕쟁이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은 듣는 것이 욕만 듣기 때문이다. 욕을 몇 번 했느냐에 따라서 내 인격의 생명 안에 무엇인가 입력이 된다. 컴퓨터와 똑같다. 그것이 잠재의식이 되어서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들의 책임은 대단히 중요하다.
사무엘은 성전에서 자랐다.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 안에서,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그런 환경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섬기는 사람이 된 것은 당연하다. 비록 그것이 형식상의 예법이라고 하더라도 그 예법은 모두 어떤 실재를 표현하기 위해 있기 때문에 그런 분위기 안에서 자란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될 수가 있었다.
요즘에도 그렇다. 기독교적인 가정 분위기에서 자란 사람과 불교 분위기에서 자란 사람의 분위기가 다르다. 기독교는 기독교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다. 옛날에는 유치부에서부터 다 교회에서 했으니까 모두 교회 분위기였다. 이런 것들이 사람의 잠재의식을 형성하기 때문에 그것을 무시할 수가 없다.
성전에서 자랐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을 교회에 보내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어려서부터 교회를 보내서 놀다 온다 해도 그 공기를 마시고 호흡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놀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 공기를 흡입하고 살기 때문에 거기서 그리스도가 호흡 되게 되고 그런 잠재의식 속에서 인격형성이 이루어진다. 성장한 다음에 교회로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의 통계를 보면 대부분 주일학교를 다녔다는 경험이 있다고 한다.
라. 제사장직(祭司長職)의 부패를 보고 자람
부정적인 면으로는 당시에 제사장직이 얼마나 부패해 가는가를 사무엘은 보면서 자랐다. 엘리의 제사장직이 쇠퇴해가고 있던 기간이라서 성경에서 말하듯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삼상2:12).” 하였다. 그 아들들이 나쁜 짓을 많이 했다는 뜻이다. 이런 좋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그는 그것을 보고 자랐다.
부정적인 것을 보고 자라는 아이들 중에는 거기에 휩쓸려가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거기서 뛰쳐나오는 아이들도 있다. ‘삼인행(이면),필유아사언(三人行必有我師焉)(이라)’는 논어에 나오는 말로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는 말이다. 잘못한 사람을 보면 ‘나는 저렇게 안 해야지’ 하기 때문에 내 스승이 되고, 잘하는 사람을 보면 ‘나도 저렇게 해야지’ 하기 때문에 스승이 된다는 것이다.
사무엘은 성전 안에서 섬기는 예법을 보면서 긍정적인 것을 봤고, 제사장직의 부패를 보면서 부정적인 것을 봤다. 이 부정적인 것을 보면서 ‘다시는 이런 부정적인 제사장직이 있어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것이 어려서부터 각인이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사무엘은 평생 여호와를 섬기고 부정한 것에 접촉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무엇을 보든지 다 스승이 된다면 얼마나 복이 있는 사람이겠는가! 그렇게 되면 우리는 어떤 것을 본다 하더라도 실족하지 않게 될 것이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이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나 내 대신 표현해주기 때문에 긍정적인 면에서나 부정적인 면에서나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내 자신이 거기서 처리 받게 된다면 꼭 야곱처럼 일생동안 다루어지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야곱은 혼자서 일생의 과정을 낱낱이 자기 스스로 겪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직접적으로 그렇게 거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짧은 기간에 우리 인생을 완성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많은 야곱, 많은 이삭, 많은 아브라함이 있기 때문에 그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변화되어 사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우리를 위해 거울이 되고 선생이 된다는 것을 우리가 배운다면 그보다 더 빠른 길이 없다. 다른 사람에게서 무엇이 표현될 때 그것은 나하고 상관없다고 생각하면 아무리 봐도 소용이 없다. 사실은 우리 안에 다 있는데 그 사람이 그것을 극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보면서 ‘내 속에 있는 작은 것도 크면 저렇게 되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내게 유익이 된다.
제사장직이 부패할 때 엘리의 두 아들이 불량자가 되어 예물을 갈취하는 것을 보면서 사무엘은 ‘아! 나는 저렇게 하면 안 되겠구나. 앞으로의 제사장직은 저렇게 이어지면 안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사무엘 이후에는 아론의 자손들로부터 이어져온 세습 제사장직이 없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큰 거울이 된다. 어느 형제가 부정적인 지체가 된다면 모든 지체가 그 지체를 보면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새롭게 돼야 한다. 그러면 그 지체도 모든 사람이 새로워지는 것을 보고 자기 자신도 새로워지게 될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공급이 되고 고침이 되는 일이 생기게 될 것이다. 그러면 교회는 더 아름다워지고 질적으로 더 향상되어 세상 앞에 더 온전하고 아름다운 그리스도를 제시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너무나 옹색한 그리스도를 제시하면 많은 사람에게 걸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더 질 높은 그리스도를 제시하면 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리게 되고 우리도 더 영광스러워질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경륜에 협력해서 성육신한다면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제시하게 될 것이다. 결국 씨가 떨어져 자라고, 자라서 열매가 된다면 그 열매는 다시 주인에게로 돌아가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경륜에 참여해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성육신하게 된다면 하나님에게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제물이 될 것이다. 이것은 세상에 대해서 엄청난 심판이 될 것이며 세상을 멸하고 세상을 구원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마. 신성한 교회의 공기 안에서 살게 하심
우리가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 안으로 인도해 올 때 그 생명이 성장하는 과정은 교회 안에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공기가 어떤 공기인가에 따라서 사람들을 더 신성하게 양육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교회의 공기를 험악하게 만들어놓았다면 다른 사람들을 험악한 공기 안으로 집어넣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공기를 산소처럼 상쾌하고 신선하게 만들어놓았다면 사람들이 여기 와서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맑은 물속으로 인도될 것이다.
화학전(化學戰)의 위험성은 공중에서 독가스를 투하하면 순식간에 많은 사람이 죽을 수 있다. 급히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공기가 오염되면 다 피해를 받는다. 지금 우리나라는 공해에 시달리고 있는데 공해의 한계점에 이르게 되면 사람들 스스로가 살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영적인 공기도 중요하다. 교회의 공기와 분위기를 신선하게 해서 다른 사람이 우리 안에 왔을 때 신선한 분위기와 공기를 흡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처음 느끼는 인상이 ‘사람들이 대단히 밝다. 허물이 없다. 격의가 없다. 사람들이 너무 좋다.’ 라는 말을 한다. 이 정도는 우리 교회가 성공한 것이다.
에덴동산이라고 말할 때 ‘동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노는 곳이고, 하나는 먹는 곳이다. 논다는 말은 쉰다는 것이다. 공원은 쉬러가는 곳이고, 식당은 먹으러 가는 곳이다. 에덴동산에는 여러 가지 과일나무가 있어서 먹기도 하고 쉬기도 하였다. 교회가 바로 먹기도 하고 쉬기도 하는 곳이다.
쉰다는 말은 그냥 ‘앉아있다. 쉬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인간적인 공기가 신선해야 내가 쉬어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긴장하게 되고, 또 어떤 사람을 만나면 쉼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우리에게 오더라도 와서 먹고 쉴 수 있는 풍성한 동산이 되기를 원해야 한다.
우리가 만일 사무엘처럼 성전 안에서, 섬기는 예법 안에서 살게 된다면 우리는 좋은 공기를 풍기게 될 것이고,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서 먹고 쉬는 삶을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을 제시하고 안식을 제공하는 것이다.
요즈음 지방교회들이 아주 아름답게 변모해가는 모습을 보고 있다. 서울교회, 부산교회, 제주교회 등, 각 교회 안에서 문제가 생기면 서로 연합해서 해결하려고 하고, 깊은 사랑을 보이고 서로 위해주고 위로가 되고 안식이 되는 그런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누구라도 그 속에 들어가면 용광로처럼 다 녹아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모든 것들이 교회의 공기다. 말로 설명할 수 없고, 그림으로 그릴 수 없는 그런 공기다. 신성한 공기가 교회 안에서 계속 향불처럼 피어오르기 바란다.
성소 안에는 등잔과 떡상이 있고, 그리고 바로 법궤 맞은편에 향단이 있다. 성소의 마지막 장소가 향단이다. 향단의 위치는 지성소의 휘장 안, 또는 휘장 바로 앞에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것의 위치(경계선)가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그 말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어떤 향기가 지성소 안에 스며들어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떡이나 빛은 휘장이 가려져 있어서 지성소로 못 넘어가지만 향기는 법궤가 있는 데까지 스며들어간다. 이 향기는 가장 깊은 곳에 스며들 수 있는 것이다.
교회의 공기는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 스며들 수 있다. 그래서 교회의 공기를 세상적인 풍습이나 관습 등으로 흐려지지 않게 하고, 세상에 없는 신성한 공기로 대치해야 될 것이다. 하나라도 세상적인 것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 심지어는 세상적인 말, 어투까지라도 그런 것들이 들어오면 공기를 흐리게 한다.
나쁜 표현, 입에 걸리는 말, 욕, 비난하는 말, 판단하는 말 등 이런 말들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 몸 안에 스며들어 와서 체질이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기왕이면 거룩한 성전 안에 있는 표현으로, 교회 안에 있는 표현으로 말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일을 잘못해놓으면 잘못한 그것은 없어졌을지라도 공기는 아직도 남아있다. 생선을 굽고 난 후, 생선을 다 먹고 치웠는데도 냄새는 아직도 남아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교회의 공기를 신선하게 유지하도록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면 공기가 신선해지게 될 것이다.
성전 안에 있는 공기로, 하나님의 표현인 공기로 바꿔서 모든 사람을 자라나게 해야 한다. 가정에서도 신선한 분위기를 만들어놓으면 아이들이 잘 자라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인격이 깨끗해지고 신성해져야 우리 주변의 공기도 신선해지고 깨끗해질 것이다.
제사장직의 부패가 심해지면서 그 부패가 결국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온 나라가 부패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성전이 아름다우면 온 나라가 다 아름다워질 것이고, 성전이 아름답지 못하면 온 나라가 아름답지 못하게 될 것이다. 사무엘의 성장 과정을 보면서 우리도 바로 그런 성장이 필요하고, 우리 후손들도 그런 성장이 이뤄져야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주님이 우리를 세상과 구별해서 신성한 교회 공기 안에서 살도록 해주신 것이 감사하다. 우리가 신성한 공기로 오래오래 살아서 하나님 나라를 많이 누리고 가야 되지 않겠는가. 좋은 분위기를 만들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