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28. 사역자들의 삶(16)_은혜를 고르게 함 (3).hwp
28. 사역자들의 삶(16)_은혜를 고르게 함
2016년5월8일(일)
고후 8~9장
오늘 어버이날인데 저도 어버이가 되었다. 그래도 부모님이 생각난다. 그 중에서도 어머니가 고생을 너무 많이 하셔서 더 많이 생각난다. 부모님들이 고생한 것이 자녀들에게는 많이 기억되는 것같다. 부모들이 너무 고생 안 하고 살아도 별로 좋은 것 같지 않다. 별로 고생을 안 하고 사니까 아이들에게 부모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그런데 너무 고생을 많이 하신 분은 기억이 생생하고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그렇다. 조금 전에 부모님의 은혜를 부르는데 저의 어머니 생각이 났다. 아주 고생을 많이 하셔서 그런 것같다.
우리가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그리워한다는 것은 축복이다. 어떤 경우에는 잘못되어서 부모를 원망한다던가 하는 경우가 있는데 안타까운 일이 있다. 뭔가 제대로 전달이 안 되고 제대로 교통이 안 돼서 그런 비극이 벌어진 것이다. 부모와 자식처럼 소중한 관계가 없다. 그런데 그것이 원망으로 되어버렸다면 그것만큼 비극이 없다. 그래서 부모는 부모로서 잘하고 못함을 떠나서 낳아주신 분이 부모다. 잘해주신 분이 부모도 아니고, 선한 분이 부모도 아니고 나를 낳아주신 분이 부모다. 우리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맺힌 게 많은 사람들은 해결이 된다. 잘했냐 못했냐 좋냐 나쁘냐로 생각을 하니까 걸려서 일생을 슬프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것이 아니고 부모는 잘한다고 부모 되는 것도 아니고, 훌륭하다고 부모가 되는 것도 아니다. 단지 낳아줬기 때문에 부모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참 중요하다.
불교에서 늘 강조하는 것이 사람의 생각은 망상(妄想)이라는 것이다. 실제를 알려면 망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 불교의 기본적인 가르침이다. 잘한다 못한다는 것은 사람이 만든 기준에 따라서 판단하는 생각이다. 그런데 나를 낳았다는 것은 우리 생각에 따라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부모가 나를 낳아줬다는 그것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 이외의 것은 모두 생각이다. 없어질 수밖에 없는 그런 것들이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떠나는 불교에서 말하는 공이다. 헛된 생각, 있다 없어질 것들을 버리는 것이 해탈하는 길이고 이런 걸 버리는 것이 빈 사람, 빈 마음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이 얼마나 가벼워질지 모른다. 많은 문제가 다 생각에서 오는 것이니까 그렇다. 일체유심조니까 사람의 생각에서 좋았다가 나빴다가 그러니까 어제까지는 참~ 좋았다는 사람은 오늘은 참 나쁘다고 하는 것은 사실 생각 때문에 그런 것이다. 사실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생각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 실제만을 아는 그것이 성불하러 가는 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성불하러 가는 길이나 마찬가지다. 알고보면 더 깊이 성불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면 다 해탈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우리는 다 실재에 도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로 간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곧 길이요.’할 때는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라는 말이다. 아버지께로 가는 것은 알고보면 해탈하러 가는 것이다. 모든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 아버지가 이랬다 저랬다.’하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예수는 그런 길이다. 우리가 예수를 천당 가게 하는 분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고,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분이라는 것이다. “내가 가서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나 있는 곳에 영접하겠다.”는 것은 결국 아버지께 가겠다는 말이다.
오늘 말씀은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인데, 너무 길어서 중요한 구절만 읽겠다.
고후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13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14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15 기록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는 말씀은 만나를 줄 때 하신 말씀이다. 그릇이 있는 대로 가져다 놓았는데 다음날 먹다 남은 것이 다 썩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이 거둔 자도 안 남았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렇다는 얘기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 세상처럼 부익부 빈익빈 이런 것이 다 고르게 분배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저절로 고루 분배되는데, 이 세상은 은혜가 없어서 인위적으로 고르게 해야 한다. 그런데 세상은 이것 때문에 싸우고 있다. 분배가 먼저냐 성장이 먼저냐는 것으로 싸우고 있다.
은혜를 고르게 하는 것이 사역자들의 삶이다. 이것은 부모 마음이다. 부모가 자식들 여러 명이 있으면 다 잘 살기를 바라지, 어느 형제는 잘 사는데 살기를 어느 형제는 못산다고 하면 부모 마음은 괴롭다. 부모는 고루고루 잘 살았으면 한다. 바라는 게 아니다. 옛날에 논이나 밭을 나눠줄 때 평등하게 나눠줬다. 장자에게는 제사 지내라고 더 주긴 했지만 부모 마음은 다 똑같이 주고 싶은 것이다.
바울은 가난에 처해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하여 교회들에게 일 년 동안 헌금을 준비하게 하고 그것을 모아서 형제들 편으로 보내면서 헌금한 교회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였다. 예수살렘교회는 주님이 승천하시고 오순절에 형제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던 중에 일어난 역사상 처음 발생한 교회다.
바울은 가난에 처해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서 교회들에게 일년 전에 미리 헌금을 해라, 모금을 해라 이렇게 부탁했다. 그리고 그것이 모금이 되어서 모두 합해 예루살렘으로 보냈는데 그것을 모금해준 교회들에게 바울은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예루살렘 교회는 주님이 승천하신 후에 다락방에서 일어난 역사상 맨처음 생겨난 교회다. 그 전에는 교회라는 것이 없었다. 그 전까지 하나님 백성하면 이스라엘이었는데 오순절 사건 이후로 ‘교회’라는 단위가 생겼다. 하나님의 통치영역이 교회라는 곳으로 옮겨왔다는 말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도 자기들이 하나님 나라라는 자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 나라가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것에 제한된 것이 아니고 유대인과 유대인이 함께 있는 교회라는 영역 안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옮겨왔다, 영역이 옮겨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영역이 이스라엘에게만 있었는데 이제는 이스라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영역, 교회로 옮겨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영역이니까 현재의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의 핍박과 로마제국의 박해로 인하여 사방으로 흩어지고 남은 사람들은 심한 가난에 시달렸던 것이다.
그러나 유태인의 핍박과 로마제국의 박해로 인해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유태인들은 자기들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를 섬긴다고 해서 핍박했다. 또 로마제국에서는 황제가 신인데 예수를 신이라 해서 핍박했다. 그래서 견디다 못해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그것이 아시아 지방에 흩어져서 교회들이 되었다. 그러니까 불꽃이 튀기면 사방으로 퍼지는 것처럼 예루살렘교회가 핍박을 받은 결과로 교회는 사방으로 퍼지게 되었다. 만일 예루살렘 교회가 핍박 받지 않았더라면 거기 다 있어서 멀리 퍼지지는 못했을 것인데 핍박을 받는 바람에 멀리 퍼지게 되었다.
바울은 이런 교회를 도와서 받은 은혜를 고르게 하기 위하여 아시아에 있는 여러 교회를 움직였던 것이다. 이중에 고린도 교회도 포함되었음으로 이 편지에 언급하게 된 것이다.
바울은 이런 교회를 도와서 받은 은혜를 고루게 하자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루살렘교회는 모교회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지금은 가난에 빠져있지만 저기서부터 교회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모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으니까 우리가 돈을 모아서 돕자고 해서 모금이 시작되었다. 아시아에 있는 여러 교회를 움직였다. 이 중에 고린도교회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 편지를 쓰면서 삽입해놓았다.
사역자들의 마음은 모든 교회가 다 평안 중에 복음이 진보하기를 바며, 받은 은혜를 고르게 나누고 누리기를 원한다. 자식을 둔 부모의 마음과 같기 때문이다. 이 일을 계기로 헌금에 대하여 말하였는데 우리도 이 문제를 짚고 가야 할 것 같다.
사역자들의 마음은 모든 교회가 다 평안 중에 복음이 진보하기를 바라고 받은 은혜를 고르게 나누기를 바라고 있다. 복음도 진보해야 한다. 은혜는 하나이지만 우리가 인식하고 반응하는 것은 늘 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이 점점 진보해 나간다.
500년 동안 그냥 그대로 있다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교리주의나 교파주의가 안 되는 이유가 거기서 고정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교리가 생기면 그 교리를 고정시키려고 한다. 그것을 붙들려고 하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보수(保守)라고 생각한다. 칼빈이라는 사람이 그 시대에서 유명한 사람이었다고 하더라도 칼빈주의가 되어버리면 그 다음 사람들은 이 칼빈주의를 수호하려고 생각한다. 변화시킬 생각을 하지 않고 어그러지면 안 된다는 이런 생각을 한다.
이런 생각이 특별히 조선 사람에게 강하다. 우리가 아주 특이한 백성이다. 일본사람들은 한자를 배워서 글자를 아주 자유롭게 사용한다. 너무 복잡한 것은 반으로 잘라서 쓰고 그렇게 한다. 그런데 우리는 절대로 그러면 안 된다. 옛날 체, 소위 간자, 쉽게 쓰는 자, 그렇게 쓰면 안 되는 것이다. 꼭 정자로 써야 된다. 이것이 우리 민족성이 그런 것인지 잘 모르겠는데 이런 아주 고집스러운 데가 있다.
변화를 싫어하는 것이다. 변화를 싫어하고 어쩌든지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결국은 일본에게 당한 것이다. 일본은 먼저 개방을 했고, 우리는 개방을 안 하고 수구하려고 하다가 결국 망하게 된 것이다. 세상은 변하고 있는 데 우리만 안 변했단 말이다. 우리와 중국만 안 변하고 있다가 똑 같은 방식으로 당했다.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일본은 거기에 빨리 편성을 했기 때문에 동양에서 가장 먼저 서구문명을 받아들여서 성공한 그런 나라다. 그래서 세계 경제 2위에 있다가 지금 중국에게 밀려나서 3위가 되었지만 실제적으로는 2위나 마찬가지다. 그런 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세상에 나가면 일본 사람들은 굉장한 민족으로 알아준다. 우리는 왜구라고 하고 쪽바리라고 하는 데 세계에 나가면 안 그렇다. 우리도 지금은 많이 알려져서 코리아라고 하면 알아주고 하지만 옛날에는 코리아가 어디에 붙었는지도 몰랐다. 그럴 때도 일본은 벌써 세계적인 나라가 되었다.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 진보했기 때문이다. 진보는 개방을 통해서 진보가 된다. 혼자만 있으면 진보는 안 된다.
복음도 사실은 핍박 속에서 진보했다고 볼 수 있다. 반대자들이 있기 때문에 더욱 진보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반대가 꼭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괴롭기는 하지만 ‘아!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구나!’ 이렇게 알 수 있다. 고난은 안 좋기는 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난이 인생을 망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고난을 통해서 사람이 더욱 승화되고 더 성장해 나간단 말이다.
그러니까 ‘초 년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 이런 말이 있다. 그것은 젊었을 때 고생을 하는 것은 자기인생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젊어서 너무 고생을 안 하고 편하게 살아 버리면 늘그막에 가서 당하는 것이다. 그때는 고칠 수 없고 어찌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차라리 고생을 하려면 초년에 세상 경험을 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난이 결코 망하게 하는 것만은 아니다. 복음의 진보를 위해서 필요할 수도 있다.
예루살렘 교회가 만약에 핍박을 안 받았더라면 복음은 더 진보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태인들이 적당하게 받아들였으면 이게 분명해지지 못하고 거기서 그냥 섞여서 비빔밥이 되고 말 뻔 했다. 그런데 강력하게 반대하기 때문에, 강력하게 거부하니까 거기서 그리스도가 분명하게 갈라졌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들이 핍박한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더 분명해지면 되니까.
사역자들의 마음은 모든 교회가 다 평안 중에 복음이 진보하기를 바며, 받은 은혜를 고르게 나누고 누리기를 원한다. 자식을 둔 부모의 마음과 같기 때문이다.
고르게 하고 싶은 것은 부모의 마음이다. 자녀들이 고르게 다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부모의 마음이다. 이 마음으로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기 고린도 후서 8장 9장은 이런 마음으로, 바울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말을 하고 있다.
이 일을 계기로 헌금에 대하여 말하였는데 우리도 이 문제를 짚고 가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우리도 이 문제를 짚고 가야 할 것 같다. 헌금에 관한 말이 성경에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헌금 문제가 나왔으니까 알고 가야 할 것 같다. 사람이 사는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지 간에, 세상이든, 교회이든. 어디든지 다 돈이 필요하다. 돈이 필요하지 않은 곳은 어디에도 없다. ‘돈을 돌보듯 해라.’ 이렇게 말을 한다. 돈을 돌보듯 진짜로 해 버리면 오늘 점심은 누가 주는가? 점심을 먹으려면 돈을 줘야 한다. 모든 데 다 돈이 들어간다. 돈이 안 필요한 곳은 없다. 하나님에게 은혜를 받는 데만 돈이 안 필요하지 다 돈이 필요하다.
사람이 사는 곳이면 그곳이 세상이든 교회이든 다 돈이 필요하다. 어느 한 면에서만 본다면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은 돈을 벌기위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본다면 사람들이 사는 것, 활동하고 있는 것, 움직이고 있는 것, 꿈틀거리고 있는 것, 이것은 다 돈을 벌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내를 가 보면 사람들이 많이 왔다 갔다 한다. 동성로 같은 곳에 가 보면 사람이 구름 떼처럼 왔다 갔다 한다. ‘저거 뭐 하러 왔다 갔다 하는가?’ 다 자기 볼 일 보러 왔다 갔다 한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고 보면 다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이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이다. 꼭 노동을 해서 돈을 번다는 것이 아니더라도 다 그것이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마지막에 가면 다 돈으로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 사는 것이 별 게 아니고 다 돈 벌기 위해서 사는 것이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사실 그렇게 보인다. 또 일생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다. 돈만 벌기 위해서 살다가 죽는 사람도 수 없이 많다.
하루 24시간 중에 최소한 8시간은 돈을 버는데 써야한다. 나머지 8시간은 휴식을 위해 잠을 자야하고 결국 남은 시간은 8시간 밖에 없는 것이다. 90년을 산다고 해도 자기 시간이라 할 수 있는 것은 30년뿐이다.
하루24시간 중에 최소한 8시간 일을 하는 것이다. 최소한, 가장 좋은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8시간 일을 한다. 돈을 버는 데 8시간을 써야 한다. 나머지 8시간은 자야 한다. 휴식을 안 하면 일을 못한다. 그러니까 휴식을 해야 한다. 그러면 8시간 밖에 안 남는다. 아주 정확하게 산다고 하더라도 내가 쓸 수 있는 시간은 8시간 밖에 없다.
그러면 우리가 90년을 산다고 하자. 90년을 살면 굉장히 많이 사는 것이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는 90년이 굉장히 많을 것이다. 많지 않은가? 20살짜리가 90년이라고 하면 굉장히 많을 것이다. 30살짜리가 90년이라고 해도 굉장히 많을 것이다. 그런데 80먹은 사람보고 90년이라고 하면 ‘아이고, 10년 밖에 안 남았네.’ 참 이상하다. 시간 계산이라는 것이 참 이상하다. 나도 옛날에는 90 살이라고 하면 굉장히 오래 산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 지금은 90이라고 해 봤자 얼마 안 남았다. 그래서 90으로 계산을 했다. 90을 산다고 해도 자기 시간은 30년 밖에 안 된다. 2/3가 날아가 버리고 만다. 자야 되고 일해야 되는 데 2/3가 날아가 버린다. 그런데2/3가 날아간 사람은 아주 잘된 사람이다. 아주 럭셔리 한 사람이다. 그것도 못 먹고 살아서 애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밤일 까지 해야 되고 이렇다.
그러니까 30년을 살기 위해서 30년을 자고, 30년을 살기 위해서 30년을 일한다. 그래서 단순하게 계산하면 인생은 30년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많이 살아야 30년 산다.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그렇다면 지금 30살 먹은 우리 청년들, ‘인생은 많이 살아야 30년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살 것을 잘 생각하라. ‘앞으로 30년 더 산다면 60살이다. 환갑이다. 그런데 이거 잘못 살다가는 10년 밖에 안 되겠네...’ 잘 생각하고 살아야 된다.
우리는 시간을 질적으로 바꿔야 될 것 같다. 시간 자체를 늘일 방법이 없다. 그러니까 시간의 질을 바꿔야 한다.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 것인가? 이것은 질로 바꾸는 것 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시간을 늘 일 방법은 없다.
이 얼마나 중요한가? 사람에게 돈이 없으면 당장에 생존이 불가능하다. 교회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교회도 어떤 방법으로든지 돈이 있어야 한다.
이만큼 돈이 필요하다. 사람은 돈이 없으면 당장 생존이 불가능하다. 밥 먹고 물 마시는 것도 안 된다. 집에서 잠자야 되지, 밥 먹어야 되지 옷 입어야 되지... 교회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교회니까 돈이 없어도 된다. 이것은 아니다. 교회도 사람들이 사는 데니까 돈이 있어야 된다. 어디도 돈이 없으면 안 된다. 어떤 데라도 말이다. 좋은 데와 나쁜 데를 가리지 않고 어디든지 사람이 살면 다 돈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내가 살려면 어떤 방법으로든지 돈을 벌어야 한다. 어떤 직업을 갖든지 돈을 벌어야 되고, 어떤 방법으로든지 돈을 벌어야 된다. 정 돈을 벌 방법이 없으면 거지노릇을 해서라도 돈을 얻어야 된다. 깡통을 가지고 다니면서 그렇게라도 모금을 해야 한다. 벌 방법이 없다면 말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도 어떤 방법으로든지 돈이 있어야 움직인다. 그냥 움직일 수 없다. 그래서 저는 처음에 ‘아이고, 교회에 까지 와서도 돈 문제 이거 골치 아프게 할 거 뭐 있느냐? 나 혼자 벌어서 쓰면 안 되겠는가?’ 이렇게 생각했다. 그때는 3~40명 정도 되었으니까 ‘이 정도는 조금 벌면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했다. 적을 때는 어느 정도 되었다. 집 사람이 양장점을 하고 이러니까 그때는 처음에 약 40명 정도 있었다. 그래서 같이 먹고 하고 살았다. 그리고 재승이 형제가 새벽이면 학원에 나가서 강의하고 해서 초창기에는 그렇게 먹고 살았다. 그냥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식구만 먹고 살면 되는 데 우리 스타일은 그게 아니고 그냥 몰려다니면서 같이 먹고 놀아야 한다.
그래서 한때는 우리 집에서 내 주민등록에 등록된 동거인 인원만 40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이웃집에서 이상한 집이라고 생각했다. 청년들이 매일 우글우글 하니까 밥 먹을 때 보면 마루에 가득했었다. 그래서 50평 집에 빈틈이 없었다. 그래서 나 몰래 한 달 동안 남부 경찰서 공안계에서 내 신분을 내사 했다. 저기 완도까지 가서 내 출생지, 본향 다 찾아가서 조사했다. 그때 내가 조금이라도 뭐 한 것이 있었으면 영락없이 걸릴 뻔 했다. 한 달 후에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만나자고 해서 가 봤더니 ‘내가 남부 경찰서 공안계에 누굽니다. 이러저러해서 내가 한 달 동안 목사님 뒷조사를 다 하고 왔습니다.’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투서한 것을 내 놓았다. ‘이 투서가 들어와서 내사를 했습니다.’ 그때는 한 참 정국이 불안할 때였다. 젊은 사람들을 몰고 다니면 불안하게 볼 때였다.
그런데 다행인 것이 가는 데마다 사람들이 좋게 말해 줘서 이 사람이 그것을 보고 감동을 먹었다. 그래서 찾아 온 것이다. ‘나도 이제 교회를 나오면 이 교회를 나오겠습니다.’ 했다. 가니까 사람들이 뭐라고 했는가 하면 ‘그 사람은 죽을 사람인데 하나님을 잘 믿어서 산 것’이라고 그러더라는 것이다. 나는 그런 것을 모르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 이렇게 증거를 해서 안 것이다. 이 양반이 그랬는데 요즘에는 연락이 안 된다. 그 동안 교회를 많이 왔다. 이상하게 남자인데 갑상선 무슨 병에 걸렸다. 그래서 병원에서 한 번 만났는데 찾아보고 싶은 데 어디에 가 있는 지 모르겠다. 혹시 방송을 들으시면 한 번 찾아오시기 바란다. 그분에 대해서 다 많이 알고 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돈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가? 그것은 형편과 사정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정해진 방법이 있을 수는 없지만 유대인들의 예는 좋은 귀감이 될 수 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돈 문제를 해결하는가?’ 이게 문제가 아닌가? 교회라는 특수한 사정 때문에 아무 것이나 할 수 없다. 그러니까 문제다. 왜냐하면 형편과 사정이 다르니까 딱 정해진 방법이라고 할 수 없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몇 가지 헌금이 있다. 십일조, 감사헌금, 월정헌금, 주일헌금... 이런 식으로 헌금이 있다. 그래서 그것으로 유지하고 있는 중인데 옛날부터 해 오던 것이 있고 편리해서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꼭 정해놓은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편리해서 하는 것일뿐이다.
그들의 역사와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지만 생활이 있기 때문에 그 중심에는 경제생활이 있다. 그 경제생활에는 국가를 위한 것과, 성전봉사를 위한 것이 있는데 교회의 헌금은 성전과 관계가 있다.
오늘 우리는 유태인들을 통해서 교훈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역사와 삶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데 이것이 아주 특이한 점이다. 그들의 역사 전체가 하나님과 엮여져있다. 그런 생활이기 때문에 그 중심에 역시 경제생활이 있다. 모든 백성들이 다~ 경제생활이 있지만 이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로 엮어져 있는 백성 중에서 경제생활이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와 비슷하다. 그래서 그 사람들의 경제생활을 보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것을 알 수가 있다. 그중에 국가를 위한 것도 하나 있고 하나는 성전 봉사를 위한 것이 있는데 성경에는 국가를 위한 것은 별로 없다. 성전봉사에 대한 것만 기록 되어 있다. 그리고 교회의 헌금은 성전 봉사와 관계가 된다. 그 사람들의 성전봉사는 오늘의 우리 교회생활과 같다.
그들은 애급에서 다시 출발한 백성이다. 바로의 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창조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모든 관습은 이 절대적 시작에서 출발 되었다.
그들의 역사를 보면 애굽에서 다시 출발한 백성이다. 완전한 노예생활, 그러니까 노예생활이니까 죽은 것이다. 노예는 목숨이 자기 것이 아니다. 주인의 것이다. 지금 우리는 그런 노예를 볼 수가 없다. 그런데 옛날에 그런 노예들은 물건이다. 주인의 소유이고 소유물이다. 죽이기도 살리기도 할 수도 있고 팔아먹을 수도 있고 이런 것이었다. 노예 시장이 있어서 팔아버리면 딴 집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죽이고 살리고 하는 것이 다 주인에게 달렸다.
그러니까 애굽에서 사백년을 살았다는 것은 죽은 것이다. 살았다고 하지만 실상은 죽은 것이다. 그냥 먹고 목숨만 살아있고 생물학적인 존재뿐이지 아무런 권리도 없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런데 바로의 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옮겨온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창조나 마찬가지다. 그냥 단순히 ‘바로의 노예로 있다가 광야로 나와서 하나님 백성이 됐다.’이것이 아니다. 완전히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다. 완전히 죽은 사람들이다.
완전히 권리가 없는 사람들인데 사백만이 있으면 뭐하며 사천만이 있으면 뭐하겠는가? 지금 이렇게 살기가 좋은 세상에서도 자유가 있니 없니, 나치 치하네 하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종으로 딱지가 붙어서 매일 같이 나와서 노역을 해야 하고 잘못하면 그 자리에서 쳐 죽여도 상관이 없었다. 개 한 마리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개가 한 마리 죽어도 주인이 와서 내 개를 왜 죽였냐고 항의를 할 것인데 노예는 죽여도 누가 그렇게 할 사람이 없다. 아무도 그럴 사람이 없다. 주인이 죽였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단지 그냥 우리가 일본에 압제를 받다가 해방되었던 것과 같은 식으로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죽었다가 살아난 문제이다. 다시 창조된 사람이다.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심각한가를 우리가 알아야 한다. 우리와는 다르다. 그들의 모든 습관과 관습은 이 절대적 시작,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우리는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잘 모른다. 고조선 어쩌고 해도 우리가 실감이 안 난다. 어떻게 한 사람 두 사람 흘러오다가 이렇게 됐겠지만 이 사람들은 죽었다가 살아난 절대적 사실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다른 민족과 다른 점이다. 그러니까 절대적인 시작이 확실하게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불교에서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빙빙 도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이 사람들은 그것이 아니다. 시작이 아주 분명한 사람들이다. 여기서 창조 신앙이 나오게 된다. 그냥 우리가 보니까 하나님이 창조했네 누가 창조했네 이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다. 자기들의 역사가 완전히 죽었다가 다시 시작한, 창조적인 역사이다. 여기서 창조신앙이 생겨난 것이다. 이 절대적인 시작이 있다.
원론적으로 천지와 만물, 그리고 인간은 창조 된 것이다. 하지만 누가 그것을 경험했는가? 아무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낱 이론이 될 수 있다.
원론적으로 말하면 천지만물은 다 누가 창조했다고 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창조된 것이다. 아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창조됐다. 안됐다. 아메가가 진화되었다. 물이 출렁거리다 단백질이 됐다. 하면서 자기들이 하고 싶은 데로 다 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다. 아예 창조된 것이 자기들에게 있다. 그러니까 이것을 경험하지 못한 백성하고 이것을 아는 백성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서 내가 구속을 깨닫게 될 때 그 구속을 깨닫게 된 사람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하고 같을 수가 없다. 제 이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다. ‘아 전에 나는 이런 사람이었구나.’하는 거기서 나는 지금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이니까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이 태어난 건 자기도 모르고 아무도 모른다. 남은 알아도 자기는 모른다. 부모가 말해주니까 알지 말 안해 주면 모른다. 그런데 창조를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생각해봐라. 부모가 나를 낳아주고 키워줬어도 이게 내 부모인지 아닌지 모르는 판에, 말 안 해주면 모른다. 낳아서 키워줘도 부모라고 말 안해주면 모른다. 그런 판에 이 우주가 창조되었느니 인간이 창조되었느니 하는 것은 누가 그것을 알겠는가. 너무나 허황한 얘기이다. 그러니까 과학적인 시대에 오게 되면 사람들이 회의를 갖게 되고 그거 황당한 이야기라는 소리가 나오게 되고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것을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확실하게 경험하여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기들은 시작이 확실하게 있는 사람들이니까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사람들이니까 확실하게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경험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새로 시작한 사람들이다. 다시 시작한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옛날 것은 다 가짜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한 인생이 아니었다.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 자체도 생물학적인 것이다. 진짜로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역사적인 경험, 그러니까 우리 신앙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확실하게 역사적인 경험이다. 유대인들이 그래서 거기서 예수가 나오게 되고 거기서 우리가 나오게 되고 그런 것이다. 근거가 그렇다. 나무그늘에 앉아서 생각하다가 생각을 해보니까 뭐가 이렇게 저렇고 그래서 나온 것이 아니다. 무엇을 번쩍 깨달아서 된 것도 아니다. 민족 전체가 없다가 있는 백성이 됐고 죽었다가 산 백성이 됐다.
유월절에 전능자의 힘으로 애굽을 나온 것이 생생하다는 것이다. 이 일은 창조적인 일이었다. 아무도 자신의 창조와 출생을 아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그들의 창조신앙은 역사적 경험에서 얻어진 것이다.
유월절에 전능자의 힘으로 애굽에서 나온 것이 생생하다. 자기들은 아지ㅜ 역사적인 사실이다. 우리에게 우리 할아버지가 굴에 들어가서 쑥을 먹다가 나온 할아버지가 아니다. 호랑이하고 곰하고 둘이 쑥 먹기 내기하다가 호랑이는 뛰쳐나왔다는 얘기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그렇게 된 백성이 아니다. 그것은 신화이다.
유월절에 그들은 확실하게 전능자의 힘으로 나오게 됐다. 어린양을 잡아서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그리고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들어가서 어린양의 고기를 구워먹고 그리고 다음날 나왔다. 그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애굽의 초태생이 모두 죽었다. 다 죽었는데 자기들은 그 안에서 살아서 나왔다. 그러니까 이것은 창조적인 일이다. 창조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고 없던 게 있으면 창조적인 것이다. 죽었다가 살아났으면 창조적인 것이다.
이 살아났다는 말은 소생했다는 말이 아니라 부활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창조다. 부활은 창조다. 부활도 소생으로 착각하기가 참 쉽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에 대해 송장이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런데 부활은 그것이 아니다. 창조적인 말이다. 그러니까 아무도 자신의 창조와 출생을 아는 사람이 없다. 아무도 없다. 어떤 민족도 이것을 아는 사람이 없다. 유대인들은 알고 있다. 그러니까 창조의 신앙은 역사적 경험에서 얻어진 것이다.
원론적인 이론에 의한 것도 아니며, 명상, 깨달음, 꿈, 신비 같은 것으로 얻은 것도 아니다. 그들의 삶의 목표와 헌신과 헌금은 당위성과 감사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창세기가 쓰여지고 그 다음 출애굽기가 쓰여진 게 아니라 출애굽기가 먼저 있고 다음에 창세기가 써진 것이다. 출애굽의 역사가 있고 그 다음에 창조가 인식된 것이다. 원론적인 이론에 의한 것이 아니다. 명상으로 깨달은 것도 아니다. 꿈이나 신비같은 것으로 계시를 받은 것도 아니다. 그들의 삶의 목표와 헌신과 헌금은 당연하게, 아주 당연하게 할 것으로 알고 한 사람들이다. 전혀 다른데서 새로 출발한 사람들이니까 당연한 일, 당연한 감사다.
애굽의 초태생이 죽을 때 자신들의 초태생이 구원 받았음으로 초태생은 다 여호와의 것임으로 그에게 드린다는 것이며, 레위인에게는 성전에서 봉사하게 하기 위해서 기업지를 분배하지 않았음으로 다른 지파가 십일조헌금으로 그들의 생활을 책임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들이 낸 제물 가운데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처음 것을 드리는 것이 있었다. 곡식도 처음 익은 것을 드린다. 초태생, 짐승도 처음 난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 또 자식도 처음 난 아들을 하나님께 드린다. 이런 것이 있다. 왜 이렀냐? 애굽에서 구원받을 때 애굽의 초태생이 다 죽었다. 그런데 자기들만 살았다. 그러니까 이것은 내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것이라는 말이다. ‘내 것이 아니고 여호와의 것이다.’ 그러니까 여호와께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들에게는 당연한 것이다.
우리도 옛날에는 신체발부수지부모라 해서 우리 몸의 털 하나도 다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라서 이를 손상시키는 것은 부모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이론적으로 말한다면 부모의 것이니까 목숨이라도 부모에게 바친다는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육신적으로 태어나서 그렇게 할 사람도 없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서 새로 태어난 사람들, 새로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은 당연히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구나. 그렇게 아는 것이 당연하다.
육신은 부모로부터 받았어도, 그 부모와 내가 육신이 다르기 때문에 부모가 아플 때 내가 아프다든지 내가 아플 때 부모가 아프다든지 이것이 물질적인 세계에서는 안 되는 것이다. 육신은 부모와 내가 다르기 때문에 물질적 세계에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이론적으로는 분명히 자식은 부모의 것이다. 부모가 낳아서 길렀으니까 부모 것인데 요즘에 그렇게 생각했다가는 당장 쫓겨난다. 부모가 자식보고 “너는 내가 키웠으니까 내거야!”이렇게 하면 당장 쫓겨난다. 며느리 얻어 놓고 시어머니가 “이 아들은 내거야 내꺼! 네 맘대로 하면 안 돼!” 이러면 쫓겨나던지 쫓아내던지 그래야 한다. 둘 중에 하나다. “아이코 내꺼 아니다.” 이래야 한다. 이것은 내꺼 아니니까 나는 모른다. 이래야 사는 것이지 내꺼 라고 생각했다간 큰일 난다.
그러므로 처음 것은 다 여호와 것이다. 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지금 받은 생명은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았던 생명이다. 부모가 가지고 있는 생명을 내가 받은 것은 같은 육신이다. 그런 육신에도 한계가 있는 것인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제2의 생명은 우리에게 없던 것이다. 우리에게 없던 것이니까 이것은 주님의 것이다. 내가 지금 이것을 내 인생으로 안 다면 내 인생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이다.
내가 그냥 배부르고 등 따신 것이 내 인생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해당 전혀 안 되는 말이고 , 내가 지금 사는 것이 내가 전적으로 은혜로 산 것이다. 구속하면 구속함을 받은 그 인생이다. 이렇게 안 다면 그 인생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도 공짜로 받지 않는다. 자신의 것을 받지 남의 것을 받겠는가! 그러니까 내가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안 받는다. 필요도 없다. 그런데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것! 그 것이 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것은 내꺼야!”당연히 그러지 않겠는가.
구약성경에 보면 그런 말이 많이 나온다. “너는 내 것이다.”왜냐하면 내가 구속했으니까 내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초태생을 드린다는 하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것이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이 십일조다. 십일조는 소득의 10분의 1을 드린다. 하는 것이 있다. 이것은 레위인들에게 성전을 봉사하도록 일을 맡겼다. 성전 봉사를 하기 위해서는 다른 일을 하면 안 된다. 다른 일을 할 수 없다. 그래서 기업지를 나눠 줄 때 열두지파에게 땅을 나눠 줄 때 레위인들에게는 땅을 따로 주지 않았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성전에서 나오는 것을 먹어라 이렇게 했다. 그러면 성전에서 무엇이 나오는가? 성전 세도 나오지만 십일조가 나온다. 그것을 가지고 레위인들이 먹고 살도록 그렇게 제도를 만들어 놨다.
왜냐하면 성전을 봉사하는 일은 이스라엘 전체를 위한 일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를 위해서 한 지파가 일 한다면 다른 지파는 그 지파를 위해서 돈을 헌금을 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열사람이 있는데 그 중의 한사람은 열사람의 일을 위해서 산다면 나머지 아홉 사람이 자기들의 십분의 일을 드려서 한 사람을 먹여 살려야 되는 것이다. 그 사람들에게는 다 형제 간 들이니까 너무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십일조가 생긴 것이다.
기업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레위인들은 어디 가서든지 성전봉사를 하도록 돼 있고 그렇게 해서 거기서 살도록 돼 있다. 다른 지파들이 다 책임져 준다. 너는 성전봉사만 해 주라 이런 이야기다.
직장에서 어떤 사람은 주차장만 관리해 준다. 원장님이 나와서 주차장 관리를 할 수 없으니까 주차관리 하는 사람에게 맡겨서 주차관리를 하게하고 그 대신에 원장님은 월급을 주는 것이다. 이것은 똑같은 이치다. 누가 해도 성전 봉사를 해야 할 것인데 우리가 다 할 수 없다. 그러니까 레위인들 너희들이 하고 우리가 생활비를 대 주마! 이렇게 된 것이다. 아주 합리적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들의 헌금에는 당위성이 있다. 그런데 이런 헌금의 생활이 그들의 경제생활의 중심에 있음으로 모든 생활이 하나님과의 관계로 엮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들의 헌금에는 그냥 한 것이 아니고 당위성이 있다. 그런데 이런 헌금의 생활이 그들의 경제생활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아주 중요한 중심을 잡고 있다. 그러니까 좀 전에 말씀 드린 대로 경제생활이 곧 인생이다. 할 수 있는 만큼 경제생활의 영역은 굉장히 중요하고 확고하다. 없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그들의 생활의 중심을 잡고 있다. 그러니까 모든 생활이 하나님과 관계로 엮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경제생활 자체가 하나님과 관계 되어 있으니까 다른 생활도 하나님과 연결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다르고 경제생활 다르고 이것이 아니다.
우리도 그렇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교회를 위해서 직장도 다니고 이렇게 한다고 생각해 보자 100%는 아니라 할지라도 내가 십일조를 하기 위해서 돈을 벌어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돈 버는 것과 교회생활은 서로 연결 되어 있는 것이다. 내가 건축헌금을 하기 위해서 이런 일을 해야 되겠다. 그러면 그 일하는 것이 단순히 일 하는 것이 아니고 건축하고 엮여져 있다는 것이다. 경제생활이 1/3을 차지하고 있다. 잠자는 것도 그것 때문에 하는 것이니까 그것보다 더 하다. 1/3을 차지하고 있다고 하면 그 생활은 내 모든 생활이 된다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벗어 날 수 없으니까 그렇다. 우리의 경제생활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우리 생활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걸어가도 돈이 있어야 되고 앉아도 돈 있어야 되고 마트도 돈 있어야 되고 모든 게 돈이 있어야 한다. 경제생활이 하나님과 엮어지지 않으면 내가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산다고 할 수 없다. 다른 것에 비해서 이것이 비중이 너무 크니까 그렇다.
현실적으로 인간 생활에서 경재생활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므로 경제생활이 하나님과 엮어지면 모든 생활도 따라서 엮어짐으로 거룩한 생활이 당연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인간생활에서 경제생활은 아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것을 소홀이 생각하는 사람은 할 수 없이 가난하게 살아야 된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밥 먹지 말아야 된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람이 밥 먹을 것이 없어서 옆집에 가서 ‘나 밥 한 그릇 좀 달라.’고 하면 주겠냐는 것이다. 너는 밥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으면서 밥은 뭐 하러 먹어 이렇게 안 하겠냐는 것이다. ‘난 돈 필요 없어!’ 이런 사람이 어느 날 와서 ‘점심을 먹을려니 돈이 없네.’ 하면 ‘당연하지 너 돈 없어도 산다고 했지 않냐?’ 이렇게 안 하겠나. 그러니까 경제생활이 우리 삶을 장악하고 있다. 나는 안 그런 줄 알고 있지만 사실은 경제가 우리생활을 장악하고 있다. 우리는 먹는데 큰 문제가 없으니까 별로 신경을 안 쓰는 것이다. 그러니까 경제생활과 인간생활은 상호 관계가 있다. 빠져 나갈 수 없는 상호 불가피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경제생활이 하나님과 엮여지면 모든 생활도 따라서 하나님과 엮여지게 된다. 그러면 거룩한 생활이 당연히 이루어진다. 일부러 거룩한 생활을 한다고 뭐 이상한 짓 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거룩한 생활이 아니다. 하나님 하고 연결된 엮어진 생활이 거룩한 생활이지, 뭐 이것 쓰고 다닌다고 거룩하냐는 것이다. 검은 옷 입고 다닌다고 거룩한가. 다 헛짓일 뿐이다. 그런 것은 부처님 공부하는 사람에게 가면 웃음거리 밖에 안 된다. 뭐 딱~ 하고 와서 거룩하다고 하면 스님이 보면 뭐라 하겠냐는 것이다. ‘야! 이 어리석은 놈아 그것이 거룩한 것이냐?’ 이렇게 안 하겠나. 우리의 생활이 하나님과 엮여져야 거룩한 생활이 된다. 거룩한 생활이 어디 따로 있겠나. 어떻게 하는 것이 거룩한 생활이냐는 것이다. 긴 옷을 입고 다니면 거룩한가? 뭐 흰 카라를 하고 다니면 거룩하냐는 것이다.
교회의 헌금은 여기에서 발원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얻은 새 생명과 새로운 시작에 대한 감사, 복음전파를 위한 헌신, 교회봉사자들에 대한 후원, 교회운영에 대한 협력,.... 이런 일들은 교회를 삶의 거점으로 사는 성도들의 당연한 생활이요 참여라고 할 수 있다.
교회의 헌금은 여기에서 발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얻은 새 생명과 새로운 시작에 대한 감사, 우리는 근원적으로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스라엘 사람이 애굽에서 나온 것은 구속이다. 거기에 대한 감사가 기본이다. 거기에다 복음 전파를 위한 헌신, 교회 봉사자들에 대한 후원, 교회 운영에 대한 협력.. 이런 것이 교회 안에 있다.
교회를 내 삶의 거점으로 살고 있다. 교회가 내 삶의 거점이다. 무엇이든지 다 거점이 있는 법이다. 거점이 있고 나가서 무엇인가 하고 또 거점으로 돌아온다. 교회생활이 내 인생의 거점으로 되어 있으면 당연하게 복음 전파를 위해서 도와야 되고 또 헌신도 해야 되고 또 교회 봉사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후원도 해야 되고 교회 운영을 위해서 협력도 해야 되고 그렇지, 교회를 거점으로 산다고 하면서 나 몰라라 하고 가버리면 그러면 교회를 거점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지난번에 김성식 장로가 청소 때문에 강하게 쇼크를 줄려고 하다가 주춤하고 있는 중인데 예를 들어서 교회를 거점으로 산다고 하는 사람이 컵 하나라도 함부로 버리겠냐는 것이다. 아무데나 그냥 쏟아 버리겠나. 교회를 거점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교회를 소중하게 생각할 것이다. 소중하게 생각 한다면 내가 쓰레기 하나라도 보면 가지고 가야 되는 것이지, 말만 교회를 거점으로 산다 해놓고 쓰레기통에다 아무거나 버리고 간다든가, 물 버리는데 종이 버리고 종이 버리는데다 물 버린다든가, 화장실에 뭐 집어넣고 한다든가 이러면 되겠냐는 것이다. 자기 집에다가 김장로가 해야 되는데 내가 월권을 하고 있는 중이다.(하하하) 마음을 단단히 먹었는데 욕 얻어 먹을까봐 못하고 있다. 그러니까 만일 그렇게 한다면 인생을 허비하는 것이다.
자기 수양만을 위해서 신앙생활에 정진하면서 헌신이 없는 것은 인생을 기만하고 허비하는 것이 아닐까?.
어떤 사람은 이런 사람이 있다. 자기 수양을 위해서만 믿고 있다. 그런 사람은 어떻게 보면 참 정직하고 좋은 사람일 수 있는데, 교회가 안 된다. 자기만 하여튼 열심히 기도도 하고 성경도 보고 깨끗한 생활을 하는 부류들이 있다. 우리 교회 말고 밖에 나가면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있다.
청주에 있는 어떤 분인데 이 방송을 듣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때 어떻게 관계된 것인지 잘 모르겠는데 한 번씩 전화가 오는데, 신앙생활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전화를 한다. 그런데 이분은 스웨덴북이니 소위 신앙에 유명한 사람들의 책을 주로 읽는다. 그런 책을 읽으면서 은혜 받은 것을 얘기하려고 늘 전화를 한다. 그런 것을 내가 그대로 들었어야 되는데 늘 그렇게 하길래 좀 따끔하게 정신 좀 차리라고 말했더니 다시는 전화 안 온다. 혼자 그렇게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교회로 엮어져서 하나님 나라가 되어야지, 혼자 돌아다니면 뭐가 되겠느냐고 했더니 그 다음부터는 다시는 전화를 안 한다. 생각이 나서 찾아보니까 전화번호를 적어놓지 않은 모양이다. 오늘 아침에도 내내 뒤적이다가 왔다. 지금 만나면 또 한번 얘기해주려고 한다. 이번에는 아주 더 진하게 죽든지 살든지 두 판 하려고 하는데, 왜 전화번호를 적어놓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개인적인 신앙만을 하는 부류가 많이 있다. 왜냐하면 교회 가니까 지저분하고 안 좋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만 깨끗하게 신앙생활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와는 무관하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는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이다. 자기에게는 유익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에게는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이다.
축복 된 삶은 축복 된 경제생활과 엮여있다. 재물이 많고 적음에 축복과 저주가 갈리지 않는다. 돈은 축복이 되기도 하고 저주가 되기도 한다. 어느 때에 어디에서 어떻게 벌며, 어느 때에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있다.
축복된 삶은 축복된 경제생활과 엮여있다. 별도가 아니다. 축복 따로 있고 경제생활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엮여있다. 우리 인생사는 모든 것이 돈과 엮여있는데 축복이 어찌 그것과 연결되지 않겠는가? 다 연결되어 있다. 음으로 양으로 다 엮어져있다.
재물이 많고 적다는 말이 아니다. 재물이 많다고 축복이 많고 적다고 축복이 적은가? 그것도 아니다. 그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돈은 축복이 되기도 하고 저주가 되기도 한다. 똑같은 돈인데 축복이 되는 돈이 있고 저주가 되는 돈이 있다.
이것을 어느 때에 어디에서 어떻게 벌며, 어느 때에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 이 문제이다. 잘 벌어야 하고 잘 써야 한다. 수도관의 물은 잘 들어와야 하고 잘 나가야 한다. 그런데 잘못 써버리면 같은 돈을 쓰고도 욕을 얻어먹기도, 또 같은 돈을 쓰고도 자기가 해를 받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돈을 쓰고도 칭찬 받기도 하고 영광 받기도 한다. 돈이라는 것이 참 묘하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제일 민감한 것이 돈이다. 이래저래 해도 돈이 굉장히 민감하다.
내가 교회에서 돈 얘기를 안 하는 이유가 너무 민감하기 때문이다. 별 것 아닌 일 같으면 말하겠는데 굉장히 예민하다. 사탄이 맘몬(mammon)이라는 귀신이 있다. 맘몬이라는 귀신이 자기에게 조금만 해로우면 기어코 해코지를 한다. 내가 만일 맘몬 얘기를 잘못하면 이놈이 나를 쫓아와서 해코지 한다. 어떻게 해코지 하는가? 나에게 직접 하지는 못하고 여러분 속에 들어가서 나한테 공격하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공격 받는 것이다. 돈 얘기 잘못했다가는 큰 일 난다.
친구 목사가 미국에서 목회를 했다. 미국 사람들은 좋은 것이 있다. 미국의 큰 침례교회인데 각 소수 민족들에게 집회를 할 수 있도록 여유를 준다. 언어가 불통하고 정서가 불통하니까 한국 사람은 한국 사람끼리 모이도록, 필리핀 사람은 필리핀 사람끼리 모일 수 있게 방을 준다. 그렇게 해서 한국사람들이 180명 정도 모였다고 한다. 그런데 무슨 돈 문제로 틀어져서 장로 한 사람이 100명을 이끌고 나가버린 것이다. 180명이던 사람들이 80명이 되어버렸다. 미국에서는 있을 수 있는 일인데 한국사람 정서에는 안 맞았던 모양이다. 어떤 선교부에서 일을 했는데, 큰 선교부니까 월급을 받을 만큼 받고 일을 했다. 그분은 미주지역에 있는 한국 목사들을 관리하는 목사였다. 좋은 자리인데 목회를 해보라고 한 것이다. 거기서 소개해서 가게 된 것인데, 월급을 얼마 주면 되느냐고 물었던 모양이다. 지금 연금이 얼마 들어가고 이러이러하게 생활하고 있다고 얘기했더니 돈 얘기 밝혔다고 이 장로가 사람들 100명을 이끌고 나가 버린 것이다. 여름집회 때도 오셨던 키 작은 김목사님이라는 분이다. 워싱턴쪽에서 목회를 하다가 아주 혼쭐이 났다고 한다. 돈 얘기는 될 수 있는 한 안하는 것이 제일 좋다. 그래서 내가 안 한다.
내가 돈 얘기를 하지 않으니까 우리 교회가 조용하다. 이번에 교회 건축한 것을 보고 놀랐다. 이 정도 지으려면 부흥회 몇 번은 해야 되고, 금식기도에 철야기도에, 몇 번은 해야 된다. 우리 숫자 가지고 이렇게 지으려면 정말 피땀 흘려야 된다. 그냥 되는 법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게 헌금이 되어서 집이 쑥 올라갔다. 나는 처음에 안 할 수도 없고, 할 수도 없고 그랬다. 왜냐하면 여태까지 한다고 했는데 이제 와서 안 한다고 할 수도 없고 돈은 모자라고 어떻게 해야 되나? 잘못하다가 내가 부도가 나서 잡혀가지 않나 했다. 은행지점장들이 예금을 해놓으니까 인사를 한다. 예금해주어 감사하다고 하길래 내가 우스개 말로 물었다. 지금 감사하지만 내가 돈 필요해서 빌려달라고 하면 빌려주시겠어요?, 라고 했다. 아이고 얼마든지 빌려주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돈이 없으면 빌려주지 않는다. 상당히 속으로 불안했다. 그런데 할 수 없다. 내친걸음이고 하기로 작정했으니까 해야지, 이러다가 안 하면 어찌 되겠는가? 하다가 뼈다귀만 나두고 말더라도 시작을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큰 배짱이 없는 사람인 것은 여러분도 잘 아시지 않은가. 큰 배짱이 있었으면 진작 시작을 했을 것이다. 도저히 내가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어찌 하다보니까 밀려서 여기까지 와버렸다. 안 할 수가 없게 되었다. 할 수 없다. 하다가 안 되면 정지하면 되지,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 걱정 없이 딱 맞춰졌다.
나는 볼 때마다 신기하다. 야~ 누가 돈을 내서 이렇게 되었나하는 생각이 든다. 돈 낼 사람이 몇 안 된다. 야~ 어떻게 이렇게 좋은 집을 지을 수 있나!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집에 들어올 때마다 신기하다. 기분이 좋다. 들어올 때마다 기분이 좋다. 들어올 때부터 넓은 정원에 넓은 길이다. 와~~ 대구 시내에 이렇게 넓은 마당 가지고 있는 교회가 없다. 내 생각에는 대한민국에도 없을 것 같다. 나는 너무너무 신기하고 감사할 수밖에 없다. 감사 비에 이렇게 썼다. 넘쳤습니다,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썼다. 오래 기다린 보람이 났다. 40년이 되었으니까 나는 돌아갈 때가 되었다. 이제 집 지어서 내가 얼마나 쓰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하루를 살아도 이렇게 기분 좋으면 된다.
우리의 경제생활은 정말 축복이 될 수 있다. 축복이 되도록 경제생활을 해야 된다. 어차피 우리는 쓰고 살아야 된다. 자기가 번 것만큼 어디에 쓰든지 써야 된다. 복되게 쓰면 복이 된다. 영광스럽게 쓰면 영광스럽게 된다. 자랑스럽게 쓰면 자랑스럽게 된다.
이렇게 또 효과가 빠른 것이 없다. 돈처럼 효과가 빠른 것이 없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나를 미워해도 돈만 한푼씩 가져다주면 그 다음에는 미워하는 것이 싹~ 없어져 버린다. 그렇게 효과가 좋을 수가 없다. 돈은 만병통치약이다. 인생통치약이다. 진짜다. 돈이 얼마나 좋은지 아는가? 기가 막히게 좋다. 기가 막히게 좋기 때문에 잘 쓰면 영광이 난다. 너무너무 좋은 것이기 때문에 죽을 사람도 살아난다. 분위기가 확 달라질 수도 있다. 돈이라는 것이 신기한 물건이다.
이 사람(중국 화폐의 모택동)이 보통 사람이 아니다. 돈에 새겨진 사람들은 다 유명한 사람들이다. 아무나 돈에 새기는 것이 아니라 다 유명한 사람들이다. 달러에도 워싱턴이나 링컨이 들어있다. 그냥 공짜가 아니다. 돈을 받으면 누구든지 기분이 좋다. 아이들도 돈 주면 다 좋아한다. 애기가 안 나올 때도 돈을 보여주면 나온다고 한다. 그만큼 효과가 좋은 것이다. 의술로도 안 되는데 돈을 보여주면 애기가 싹~ 나온다고 한다. 정말 좋은 것인데, 좋은 것일수록 잘 써야 된다. 나쁜 것은 적당히 써도 되는데, 진짜 좋은 것은 잘 써야 된다.
이 당시에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것은 사도의 소원과 교회들의 협력으로 인하여 은혜를 고르게 하고 축복을 더하는 일이었다.
이 당시에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것은 사도의 소원과 교회들의 협력으로 인하여 은혜를 고르게 하고 축복을 더하는 일이었다. 어느 정도 가난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핍박과 가난으로 힘든 교회에 조금이라도 사람들이 돈을 가져갔으면 얼마나 위로가 되었겠는가. 또 얼마나 격려가 되었겠는가.
우리도 마찬가지로 꼭 돈을 많이 써서 좋다는 것도 아니고, 꼭 적게 써서 나쁘다는 것도 아니다. 자기 마음에 있는 대로 정말 은혜롭게, 은혜가 되도록 써야 된다. 또 받는 사람은 조금 받아도 너무 감사하게 생각해야 된다. 얼마나 귀중한 것인데 함부로 주겠는가? 아무나 돈을 주는 것이 아니다. 내가 혜택을 누구에게 입으면 그 혜택 뒤에는 다 돈이 들어있다. 그냥 공짜로 혜택이 있는가? 없다. 누구한테 내가 혜택을 받으면 깊이 감사해야 된다. 별 것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정말 그 자체가 복이 되지 않는다. 감사히 받으면 그 자체가 복이 된다. 받는 사람도 복이 되고, 주는 사람도 복이 된다. 주는 사람이 꼭 뭔가를 바라고 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참 감사한 마음으로 받으면 주는 사람도 마음이 얼마나 즐겁겠는가!
그런데 주면 기분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도 가끔 있다. 나를 뭘로 알고 주느냐? 이런 사람이 또 가끔 있다. 사람 심보라는 것이 참 이상하다. 도와주면 참 감사해야 되는데, 도와주면 기분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혹시 이 중에도 그런 분이 있으면 당장 고치시기 바란다. 그것은 정말 망할 병이다. 도와주는데 자기가 부끄럽다고 자기가 창피한 것만 생각한다. 그래서 남은 관심을 갖고 도와주었는데, 자기는 창피하다고 자기를 모욕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경우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있다. 그것은 정말 나쁜 것인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경우는 준 것을 도로 뺏고 싶다.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데, 나는 기분 나쁩니다한다. 하나님이 되려다가 못된 사람이나 그렇게 할 것이다. 하나님이 되려다가 못된 사람은 은혜를 볼수록 더 화가 나는 것이다. 율법주의자들이 은혜를 보면 더 화가 나는 것이다. 좋을 것 같지만 내가 율법으로 힘쓰고 애쓰고 있는데 안 된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값없이 은혜를 받았다. 야~ 저렇게 값없이 은혜를 주는 곳이 있구나하고 오면 좋지만 그렇지 않다. 탁 버티고 서서, 니가 값없이 은혜를 받어, 말이 돼?, 대번에 이런다. 사람이 참 이상하다. 율법주의라는 것이 이런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한 이유도 그것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산에서 뼈가 없어질 정도로 기도를 하여 득도를 했다면 다 존경했을 것이다. 그런데 시골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다가 와서 하나님을 전파한다고 하니까 가소로운 것이다. 그것을 못 참도록 해서 결국 죽인 것이다. 남이 은혜 받는 것을 보고도 심통 나는 사람이 있고, 남이 은혜 받는 것을 보고 너무너무 감사하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심보를 고쳐야 된다. 남이 잘 되면 좋아해야 된다. 나는 안 되더라도 남이 잘 되면 좋아해야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 사돈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 이런 속담이 있다. 못된 생각이다. 그런 생각이 사람에게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 다 있다. 혹시라도 이런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나오지 못하게 싹을 싹 잘라버려야 한다. 조금씩 키워놓으면 안 된다. 조금씩 커서 일상적인 것이 되면 정말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돼버리고 만다.
받으면 감사해야 한다. 무조건 감사해야 한다. 내가 주는 것이 쉽지 않다. 쉽지 않은 것을 준 것이기 때문에 감사해야 한다. 그냥 어디 가다가 슬쩍 던져 준 것이 아니다. 돈이 얼마나 중요한데 슬쩍 던져주겠는가? 조금이라도 도와주면 깊이 감사해야 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더 복 준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주는 사람보다 받는 사람이 복을 더 많이 받는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는 말이 있다. 보편적인 말로는 그렇다. 왜냐하면 주는 자는 주면 마음이 좋다. 주니까 기쁘다. 그런데 받는 사람 가운데는 감사가 되는 사람이 있고 안 되는 사람이 있다. 우리가 누구에게 뭘 줄 때도 이것을 주면 감사할 사람인가, 불평할 사람인가를 알고 주어야 한다. 모르고 주었다가는 괜히 코 다친다. 진짜로 감사할 사람을 만나면 주고 싶다. 돈을 어디에 쓰겠는가? 쓰려고 돈을 번다.
받고 못 받는 것은 다 자기 나름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나름으로 내가 받을 수 있는 그릇이 되면 받고, 받을 그릇이 못 되면 못 받는구나. 살아보니까 그렇다. 받을 만한 그릇이 되어야 받는구나. 준다고 다 받는 것이 아니구나.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지만 다 받는 것이 아니다. 받을 사람은 받고, 못 받을 사람은 못 받는다. 그릇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우리가 은혜 받을 그릇이 준비되어야 된다. 그러면 언제든지 은혜가 있게 되어있다.
나는 돈이 없어서 많이 줘보지는 못했다. 혜택을 많이 받았다. 친구들에게도 도움을 많이 받았다. 돈으로도 도움 받은 것은 아닌데, 마음으로 행동으로 너무너무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 사람을 얻는 것이 돈을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또 사람을 얻어야 돈도 얻어지게 된다.
돈!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고, 무조건 나쁜 것도 아니다. 돈 자체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돈을 쓰는데서 버는데서 복이 온다. 복이 일어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모택동이가 내가 이 화폐를 들고 있다고 해서 뭐라고 하겠는가? 아무 말도 못한다. 하지만 내가 이 돈을 누구에게 주느냐, 누구에게 받느냐에 따라서 뭐가 생긴다. 돈은 신기한 물건이다. 모택동은 나와 아무 관계가 없는데 내가 이 사람을 다른 사람에게 주면, 모택동이라고 하고 주면 이상한 일이 발생한다. 누가 나에게 모택동이라고 하고 주면, 나한테도 이 사람 마음이 옮겨진다. 돈이 신기한 물건이다. 보통 물건이 아니다. 이런 종이 한 장 준다고 그런 마음이 생기겠는가? 신기한 물건이다.
잘 벌고 잘 쓰기를 바란다. 잘 벌고 잘 쓰자! 복을 복으로 여기고, 복을 복으로 받으면 만사가 다 오케이다. 좌우간에 오늘 돈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말을 많이 했는데, 일단 교회당이 많은 돈을 들여서 지어졌다는 것에 대해서 내 인생의 기념이다. 내 인생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이 기념이다. 나는 전혀 그런 생각을 못했다. 내 인생에서 교회당을 지을 것이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내 인생에도 교회를 지었다. 내가 지은 것은 아니지만 내 인생에도 교회를 지은 사건이 생겼다는 것은 내 자랑이기도 하고 내 기념이가도 하다. 아마 여러분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회당 짓겠다고 별로 기도해 본 적도 없을 것이다. 기도한 사람이 별로 없는데 이런 교회당을 지금 받았다. 신기한 일이다. 역사 속에 기억될만한 일이다. 신문에 날 만한 일인데 신문사에서 몰라서 안 온 것이다. 하여간 감사하다.
[ 기 도 ]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 생각을 다 아시고 우리 입장 아시고 처지를 아시고 우리 눈높이에 맞춰서 늘 적절한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것, 생각할 수 없는 것, 늘 그곳에서 주님이 우리를 알고 계셨고, 우리를 보고 계셨고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축복하여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우리 삶을 통해서 인생을 통해서 어찌하든지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일반적인 모든 생활에서 그것이 다 주님과 엮어지는 생활이 되도록 주여 인도하여주시기를 원하고 주위에 빠지는 일 없도록 함께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