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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 말씀(마가복음)

(마태복음 30강) 30.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4월 6일)

작성자이민재|작성시간16.04.02|조회수1,220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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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5:20).”

1.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거의 직업적이다시피 율법을 실행하고 공부하는 사람들이다. 겉으로 보기에 결함이 없을 만큼 완벽하게 생활한다. 그런데 그들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다. 예수를 가리켜서 저 사람은 율법을 무시하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저 사람이 율법을 무시하는 줄 알았더니 율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라고 알아듣게 되는 말씀이다. 또 제자들에게는 우리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있어야 되겠다.’라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당시 율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를 볼 때 저 사람이 율법을 주장하지 않는 것을 보니까 율법을 무시하는 사람이다.’라고 봤던 것 같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매일같이 율법을 주장하고 실천하고 그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은 분이었기 때문이다.

 

선지자는 율법을 보충하고 더 잘 지키게 하기 위해 나왔다. 예수님도 당시에는 선지자로 인정되었다. 만약 그분이 선지자라면 율법을 보충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까 사람들이저 사람은 율법을 무시하니까 선지자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이 저 사람은 율법을 폐하러 온 줄 알았더니 그것이 아니고 율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구나.’ 이렇게 들렸을 것이다. 제자들에게는 과연 우리의 행동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을 수 있겠는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런 문제들이 생기게 되었을 것이다.

 

.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로운 세계

 

우리 교회는 처음부터 율법을 선포한 일이 없기 때문에 전혀 율법의 구애를 받지 않고 교회 안에 들어와 한 그리스도를 보고 한 몸을 이루게 되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12:13).” 한 것처럼 그런 교회가 되었다.

맨 처음 교회도 이방인과 유대인이 한자리에 모였는데 전혀 이질적인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가 된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교회의 신비로운 모습, 즉 둘이 하나가 된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일생을 자극하고 흥분케 했던 사건이 되었다. 교회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는 만유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 우리도 똑같은 사정 아래 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은 율법 안에서 생각한다면 너무 어려운 말이다. 또 이방인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자기는 아예 율법 근처에도 가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더 감당할 수 없는 말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를 만나면 어차피 이 둘이 다 무효가 되니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선한 선생님이여!” 하고 왔다. 예수님이 아마 자기보다 더 선하다고 생각해서 선에 대해 서로 토론하고 거기서 무엇을 배우려고 왔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하셨다.

니고데모는 선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무엇인가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게 되어 사람이 어떻게 늙으면 모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올 수 있습니까?”라고 묻게 되었던 것이다(3:1-21).

 

예수께서는 전혀 다른 세계를 말하고 있다. 선하냐 악하냐, 의로우냐 불의하냐 하는 세계가 아니다. 우리가 아담 안에 있을 때는 선한 것과 선하지 않은 것에 대한 등급이 있었다. 그런데 십자가 앞에 가면 그 등급이 없어져 버린다. 십자가는 바로 아담과 그리스도가 만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거기는 아담이냐 그리스도냐 이것만 남게 된다. 니고데모가 예수를 만났을 때 아담이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니까 전혀 다른 세계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마태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세상과 아담의 연장선상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다른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이사야는 성전에 들어갈 때 분명히 자기는 옳고 세상은 그르다 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성전 안에 들어가서 거룩한 스랍들을 만나고 난 후 그는 자기의 입장이 없어지고 주여! 내 입술은 부정한 자 가운데 있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되었다. 이것은 새로운 출발을 의미한다(6장 참조).

 

 

.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로 시작되는 마태복음 5장의 말씀을 보면 영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다. 구약성경의 관념대로 말한다면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면 죽는다. 모세 같은 사람도 여호와를 직접 대면하지 못하고 그 등을 봤다고 하였다(33:22-23). 즉 모세라도 하나님을 만나면 죽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아담이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과 똑같다. 그리스도를 만날 때 우리는 자신이 좋았든지 나빴든지 다 없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결국 영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으로 시작되면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세인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의미는 서기관들이 훈련을 하고 열심히 종교적인 노력을 해서 쌓아 놓은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고 다른 세계에 속한 것이다. 새로운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물속에 있을 때 문제되었던 것은 육지에 나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물속에 있을 때의 필요와 공중에 있을 때의 필요는 전적으로 달라진다. 내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을 때의 필요와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의 필요는 전적으로 달라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을 때 우리 자신에게 남을 미워하는 문제, 간음하는 문제, 맹세할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다. 그 안에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이 문제 자체가 소용이 없다.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내 인생의 소망, 갈 길, 계획, 목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내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내 목적에 방해되는 것이 방해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이 모든 것이 다 없어지고 만다. 이것이 다 소용이 없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과 만나지 않은 사람은 상식이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이 말씀은 한계점에 있는 말씀들이다. 아담 안에 있다면 우리는 분명하게 서기관과 바리새인만큼 의로울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보다 더 나은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써지지 않은 다른 말이 있다. 예수께서 말로 할 수 없는 다른 사정이 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것은 한 면으로는 너희는 그들보다 더 나아야 한다는 말이고, 다른 면으로는 너희는 그들보다 나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예수께서 왜 이 말씀을 하시는가? 자기로서는 이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우리는 좀 더 나은 것을 해야 하겠구나.’를 생각해서는 안 되고,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이구나. 그들보다 더 나은 의를 행할 수 있는 어떤 다른 생명이 있구나.’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이런 것들이 많다. 겉으로 듣기에는 이런 말이지만 속으로는 다른 말이다. “돌 위에 돌 하나도 첩 놓이지 않고 망할 것이다.” 했을 때 표면적으로 들으면 예루살렘 성이 망할 것이라는 말로 들린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고자 하는 말은 너희가 왜 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전을 바라보고 있느냐?”는 뜻이다. 그 말은 말로 할 수 없는 말이다.

예수님 자신을 모른다면 옛 사람은 저랬지만 나는 이런다.” 하는 것을 옛 사람보다 더 고상한 율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요구하는 분이라고 들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세히 들으면 아담 안에서는 도저히 실행할 수가 없다. 구약에 있는 율법들을 완전히 지키려면 인간으로서는 한계가 있다. 그보다 더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거기에 더해서 또 한 차원 더 높였다면 인간의 한계에 부딪히는 것이다. ‘더 이상은 불가능하겠구나. 우리가 살인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어떻게 사람을 전혀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옛날에 나는 적어도 다른 사람과 싸우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을 미워할 사람도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미운 사람이 생기게 되었다. 까닭 없이 미운 것이 아니고 까닭이 있는 것이다. 교회에서 행동 하나 하나가 얼마나 밉게 하고 나를 괴롭히는지 아무리 미워하지 않으려 해도 미워지는 것이었다. 이것을 8년 동안 해왔다. 그것을 없애려고 기도도 하고 뭐도 하고 아무리 해도 안 되었다. 어떤 경우에도 미워할 사람을 만나서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담 안에서는 불가능하다.

 

여기서 우리는 그 한계를 넘어선 사람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이 한계가 없기 때문에 말씀하신 것이다. 그는 어떻게 해서 이 한계를 넘어갔는가? 사람에게는 더 열심히 하고 더 노력한다면 이것을 넘어갈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개념밖에는 없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보다 더 열심이고 더 정열적이기 때문에 되는 것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전혀 다른 생명으로 한 것이다. 우리도 옛 생명이 아닌 다른 생명이 있으면 가능하다.

나는 예수께서 자기 의지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사람들은 내가 어떻게 십자가를 지겠는가?’ 생각한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진 것은 그가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분신자살을 하겠다고 하면 따라갈 사람이 많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보고는 한 사람도 따라가는 사람이 없었다. 그를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들까지도 따라가지 못했다.

왜 그런가? 그것은 예수님의 결심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사지로 끌려가는 어린양이었다. 인간은 자기가 결심해서 하는 일은 할 수 있지만 억지로 끌려가는 일은 절대 하지 않으려고 한다. 하나님의 세계, 즉 우리가 거듭난 세계는 우리의 의지와 관계된 세계가 아니라 내가 끌려가는 세계다. 아브라함도 야곱도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람들 모두는 자기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끌려갔다.

우리의 영은 왜 가난해졌던가?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웠기 때문이다. 거기서부터 우리 인생은 새로 출발한다. 이 세계 속에 예수께서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들어 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신 그 뒤에 숨어 있는 다른 말은 자기 스스로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 의지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와 하나님의 이끄심에 관계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나는 한다.”고도 못하고 나는 안 한다.”고도 못한다. 하나님이 나를 이끌어가시면 그렇게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형제와 화목하지 않다.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는 그 말씀은 알지만 내 의지로 실행하려면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하도록 이끄시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예수의 세계, 천국의 세계는 모두 십자가로 이끌려 가는 세계다. 우리는 무엇도 한다고도 못하고 하지 않는다고도 못하지만 결국 하게 될 것이다.

 

 

2)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함

 

우리를 부르신 이는 당신의 목표가 있어서 불렀다. 물로 씻어서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게 하려고 불렀다(5:26-27). 우리는 어찌하든지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일찍 항복하는 것이 편하다. 그의 뜻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천국 안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다. 그것이 내 의지로 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끄심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내가 자랑하거나 교만할 수 없다. 만일 자기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사람들만 모인 곳이라면 그들보다 더 강퍅해질 것이다. 그들보다 더욱 의지가 강하고 더욱 실천력이 강한 사람들끼리 모였다면 얼마나 더 강퍅해지겠는가?

주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모든 일은 오직 하나님만을 찬송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어떠함을 드러내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어떠하심만을 드러낼 수밖에 없도록 일을 추진하고 계신다. 참으로 기이한 분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그를 만나면 어차피 그에게 끌려가야 한다. 그에게 이끌려 간 후에는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나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고 나를 부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 하였다. 이것은 세상의 의와는 전혀 다르다. 예수님은 분명히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분이셨다. 더 나은 분이라고 해서 그들의 입장에서 더 나은 분이 아니다. 전적으로 다른 세계에서 나은 분이셨다. 우리는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에 와 있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다 십자가 안에 와서 아담은 끝나고 그리스도로 시작한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다. 하나님 나라의 모든 일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이후에 나온 모든 말씀들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우리가 개를 흉내 내서 짖어보려면 참 어려운 일이다. 개는 개로 짖는 것이 너무 당연한 일이다. 전혀 어렵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다.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아담으로서는 흉내 낼 수가 없다. 그리스도로는 그것이 간단한 일이다. 그 생명 안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만일 어떤 형제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모든 것의 비결이다. 주님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겼다. 우리의 삶도 옛날과는 전혀 다른 상식으로 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예수께서 왜 십자가의 길을 가셨는가? 그는 오직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가셨다. 우리가 생각하면 그 길은 능히 피할 수 있는 길이었다. 제자들도 말했다. “꼭 그 길 아니면 다른 길은 없습니까? 차선의 길은 없습니까?” 하였다. 그런데 그에게는 차선의 길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는 오직 한 길밖에 없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를 원한다.” 이 마음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의 어떤 고집, 어떤 특수성, 이런 것들을 모두 뒤로 밀어놓게 될 것이다.

 

. 세부적인 계명들(5:27-48)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 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하였다.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어떻게 아담 안에서 이 문제가 가능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자기가 싫은 여자와 함께 사는 것은 가장 곤욕스러운 일이다. 지금도 아랍세계 사람들은 아내가 싫어지면 손뼉만 세 번 치면 이혼이 된다고 한다. “그렇게 내보내지 말고 이혼 증서를 써서 내보내라. 그래야 다른 사람에게 시집이라도 갈 수 있지 않느냐?”라는 것이다. 얼마나 이것이 심각한 문제가 되었겠는가?

 

교회 안에 젊은 형제들이 결혼할 때 보면 돈이나 명예나 다른 것은 다 필요 없는데 마음에 꼭 맞는 여자와 결혼해야 되겠다고 한다. 하나님 마음이 있어서 그런지 잘 모르겠다. 하나님은 꼭 자기 마음에 맞는 아내를 구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을 데려다가 자기 마음에 딱 맞는 사람으로 만드시는 분이고, 형제들은 다 만들어진 사람이 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이 다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주심으로 티나 주름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를 만드셨다. 아담은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을 처음부터 주기를 원했다. 그것은 자기를 주지 않겠다는 뜻이다. 자기는 손해를 보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내는 반드시 건축하는 것이다. 아담은 자기의 갈빗대를 빼서 하와를 지었다. 집을 짓는 것과 같다. 자기가 자기에게 맞는 사람으로 만들지 않으면 자기에게 맞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이것은 지어야 되는 것이다.

아담의 갈빗대를 빼서 하와를 지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갈빗대를 빼서 우리를 지었다는 것을 말한다. 예수께서 자기의 생명으로 우리를 지었다. 그의 옆구리에서 나오는 피를 가지고 우리를 지었다. 그래서 우리를 피로 값 주고 샀다고 한다.

 

신약의 세계와 구약의 세계를 비교하면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 아내를 버리려거든 손뼉을 세 번 치거나 이혼 증서를 주라는 세계에서 아내를 버리는 것은 그로 간음하게 하는 것이고 또 그 여자에게 장가드는 사람도 간음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열심히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오히려 앞이 막막해져서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예수께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가 있느니라.” 하고 대답하셨다. 아담 안에서 불가능한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하였다.

왜 사람들이 맹세를 하게 되는가? 그것은 자기의 주관 하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관 하에 있지 않은 줄을 안다면 우리는 단지 , (옳다 옳다)” 하든지 아니오, 아니오하든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 우리는 그가 어떻게 행하실지 모르는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에 늘 그를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맹세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에게 사람들이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 물었을 때도 그분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 속해 있으니 너희 알 바가 아니고 너희가 성령을 받으면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하셨을 뿐이었다. 오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밖에는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까지 우리가 끌어서 맹세할 수는 없다. 단지 우리는 주신 것만 가지고 그것을 이행하기도 바쁘고 그것을 하기에도 부족한 사람들이다.

종종 젊은이들이 앞날에 대해 미리 생각하고 있는 것을 보면 너무 답답하다. 오늘 주어진 것을 하라는 것이다. 오늘 열심히 하지 않고 미래만 생각하는 사람은 항상 미래밖에 없다. 오늘이 있는 사람은 내일이 없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실제가 있고 현재가 있다. 중요한 것은 바로 현재다. 그러므로 우리가 맹세할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대로 받아서 옳다, 옳다 하든지 아니다, 아니다 하든지 해야 한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하였다.

이것도 욕심 많은 사람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내 인생이 그의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이것이 더 주냐 덜 주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주님을 영화롭게 할 것인가?’를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한계를 초월하게 될 것이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셨다.

중요한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율법 안에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같이 온전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수께서 아버지와 내가 하나다.” 하셨을 때 사람들은 네가 사람이 되어서 어떻게 하나님과 동등이라고 하느냐?” 하였다. 이것은 율법적인 개념 안에서 듣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생명 안에서 하신 말씀이다. 그는 오직 아버지만을 영화롭게 하고 있을 뿐이다. 자기의 목적이 없고 아버지의 목적만 있다.

우리가 오직 아버지만을 영화롭게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하게 될 것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만을 영화롭게 하려고 하면 우리 본성까지도 다 개조될 수 있다. 나는 도저히 남을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래도 용서할 수 있다. 나는 도저히 남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래도 남에게 줄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에서 참으로 훌륭하고 놀라운 인생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전부 자기 생각이기 때문에 각자 합당한 이유가 있다. 그런데 그 모든 이유들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데는 전혀 소용이 없다. 오직 주의 영광만을 위해서 우리가 모든 이유를 포기하고 나면 그 다음에 우리에게 깨달아지는 것은 그 이유는 거짓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생명이 먼저 오고 지식으로는 나중에 깨닫게 된다. 생명 안에 와야 거짓이 발견된다.

우리를 화목하지 못하게 하고 주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그것은 사탄으로부터 온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고 그것을 멀리 쫓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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