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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 말씀(마가복음)

(마태복음 45강) 45. 천국은 침노를 당함(7월20일)

작성자이민재|작성시간16.07.18|조회수188 목록 댓글 0

45. 천국은 침노를 당함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11:7-17).”

 

1. 세례요한은 모든 선지자 중에서 가장 큰 자임

 

세례요한은 구약의 모든 선지자 중에서 가장 큰 자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사실 다른 선지자들보다 더 위대하다는 뜻이 아니고 선지자의 직무, 사명이 그리스도를 예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례요한 이전의 모든 선지자들은 이런 분이 올 것이다.’라고 했으나 세례요한은 바로 이 사람이다.’ 하고 지시했다.

그래서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다.’ 하였다. 세례요한이 엘리야보다 더 능력이 많다던가, 모세보다 더 위대하다는 그런 뜻이 아니다. 선지자의 사명은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그리스도를 지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례요한 이전의 모든 사람들은 아무리 위대한 선지자라 할지라도 장차 이런 주님이 오실 것이다.’ 그렇게 말한 사람들이다. 결국 보지 못하고 예언만 한 사람들이다.

그에 비해 세례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하고 직접적으로 보고 말했던 것이다. 그래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새 세계가 갈라지는 것을 보게 된다. 한 세계는 그가 올 것이다.’ 하고 예언한 세계라면 다른 한 세계는 바로 이 사람이다.’ 하는 세계이다. 한 사람은 보지 못하고 단지 예언만 한 사람이고, 한 사람은 그 사람을 누리는 사람이다. 이렇게 세계가 달라지게 되었다.

 

. 확고하고 굳건한 사람

 

예수께서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하고 묻고 있다. ‘너희는 세례요한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 그 말과 같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로 알았느냐 아니면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으로 알았느냐 하는 것이다.

세상은 전부 다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관심을 두는데 세례요한은 왕궁이 아닌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살고 있었다. 모든 세상 사람들이 문화의 아름다움에 젖어 있고 종교의 완벽한 의식 속에 갇혀 있을 때, 그는 가장 더러운 동물인 약대 털옷을 입고 살았던 것이다.

그것은 반종교적이고 반문화적인 것이었다. 그 시대 전체를 거역하기 위해서 그렇게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굳센 사람으로 투사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감히 왕의 잘못을 지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헤롯은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이방인의 왕이다. 이스라엘을 통치하기 위해서 로마 황제가 세워 놓은 이방인의 통치자.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든 뭐든 간에 잘못하면 목이 잘리는 것이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즉 세례요한은 갈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의지가 굳은 독야청청한 소나무 같은 사람이고, 눈 속에서 피는 매화 같은 사람이며, 부러지지 않는 대나무 같은 사람이다. 그는 세상에서 정말 존경스러운 사람이다. 세상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아주 존경한다.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고, 자기들이 가고 싶은 목적지까지 갈 수 있게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는 왕궁에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왕궁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 왕궁의 감옥에 들어 있는 사람이다. 결코 그는 부패된 제사장도 아니었고 세속에 물든 제사장도 아니었다. 그는 오로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감옥에 가두어 놓고 광야에서 외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도 저보다 큼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11:9).” 선지자보다 나은 자라는 것이다. 왜 나은 자인가? 예수를 지시하기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3:11)” 하였다. 성령으로 우리를 살리고 생명 안에서 우리를 낳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예수를 명백하게 증거했기 때문에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는 칭찬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다.” 하셨다. 이것이 중요한 말이다. 또한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11:12-13)” 하였다.

천국과 그 이전의 세계는 천지 차이로 다르다. 옛날의 세계는 모두 무엇인가를 기도하고 무언가를 바라보는 세계다. 그러나 천국은 오늘 우리가 누리고 사는 세계를 말한다. 세례요한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를 봤지만 천국을 누리지 못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천국에는 아무리 적은 자라 하더라도 그리스도를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세례요한은 그것을 누리지 못했기 때문에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하고 물었던 것이다. 그는 예수를 보기는 봤지만 누리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의 실정과도 같다.

 

어떻게 우리는 천국을 누리고 다른 사람들은 천국을 누리지 못하는가? 우리가 옛날 선지자들보다 훨씬 나은가? 결코 그게 아니다. 우리가 엘리야보다 낫겠으며 모세보다 낫겠는가? 그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너무 빈약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시대가 좋아져서 그렇다.

지금 우리는 누구라도 TV를 다 안다. 이천 년 전에는 누가 TV를 알았겠는가. 그런데 지금은 유치원 아이도 TV를 보고 마음대로 작동시킨다. 지금 유치원 학생들이 그때 선지자들보다 지식이 많아서인가? 그것이 아니고 시대가 좋아졌기 때문이다.

천국에서 우리가 왜 큰가? 시대가 좋아져서 그렇다. 이 시대를 더 좋게 하신 주님을 영원히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왜 하나님 나라는 시대를 따라서 계시되는가? 그것이 참 신기한 비밀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 때부터 TV를 보여주셨으면 될 것인데 왜 지금 와서 TV를 보여주는가. 왜 세례요한은 천국을 누리지 못하고 우리는 누리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다.

엘리야는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사람이다.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다. 모세는 홍해 앞에서 지팡이를 들었을 때 그 물이 갈라지게 된 사람이다. 손을 들고 있으면 아말렉이 지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는 그런 사람이었다. 참으로 놀라운 사람이다. 우리가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사람이다. 또한 그는 돌판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 온 사람이다. 친히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써 주셨다고 했다.

얼마나 하나님에게 가까운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높은 안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던가! 그런데 이 사람들보다 우리가 어떻게 더 크겠는가? 절대로 그럴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참 기이한 것이다.

 

. 하나님은 시대를 따라서 자신을 계시하심

 

어떤 씨 하나가 땅에 떨어졌다. 그런데 그것이 길바닥에 떨어졌기 때문에 나지 않았다. 그러나 씨가 떨어지고 또 떨어져서 그것이 쌓여 거름이 되니 길바닥이 좋은 평지가 된 것이다. 돌짝밭에 씨가 떨어졌지만 금방 나서 싹이 말라 죽었다. 그런데 말라 죽은 싹들이 거름이 되어 흙이 되었다. 거기에 씨가 계속 뿌려진 것이다.

가시덤불이 위에 막혀 있어서 싹이 나오지만 자라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그러나 자라지 못한 줄기가 죽고 죽어 가시덤불을 다 덮고 나니 다시 옥토가 되었다. 이 옥토에 씨가 뿌려지니까 30, 60, 100배의 결실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옛날 선지자들은 누군가? 어떤 사람은 길바닥에 뿌려진 씨였고, 어떤 사람은 돌짝밭에 뿌려진 씨였다. 또 어떤 사람은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였다. 그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던가. 그 사람들이 죽고 죽어서 예수에게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이스라엘에게서 어린양이 계속 희생된 것과 마찬가지로, 선지자들의 무덤이 계속 쌓여지는 동안에 그 흙이 더욱 옥토가 되어 씨가 뿌려진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은 그 흙이 썩고 썩어 만물의 찌끼같이 된 데서 발아가 되어서 30, 60, 100배의 결실을 하게 된 것이다. 우리에게 천국이 왔다면 그런 과정을 거쳐서 온 것이다. 결코 그냥 온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잘 나서가 아니고 이 천국이 자라났기 때문이다. 새로운 씨가 온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싹이 나는 것을 보고 이제 굶주리지 않겠구나.’ 했는데 죽어버렸고, ‘나무가 조금만 더 자라면 열매가 맺겠지.’ 했는데 죽어버린 사람들이었다. 구약성경은 모두 그런 사람들이었다. 이제 우리는 나무에서 열린 것을 따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시대다.

하나님은 시대를 따라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고 있다. 그 시대에 따라 사람을 사용하셨고 그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생명, 그 씨가 떨어지고 또 떨어져서 조금씩 변화의 과정을 거쳤던 것이다. 마침내 예수 안에 와서 완전한 변화를 거쳐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이 아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모든 유산을 물려받은 사람이다. 모든 선지자들의 희생과 죽음을 물려받은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완전한 죽음이 된다. 그가 만약 맨 처음에 죽은 사람이었다면 완전한 열매일 수가 없다. 마지막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온전한 열매가 된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로, 또한 사람에게 두신 영원한 목적 때문에 우리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위치를 떠났기 때문에 그분의 목적이 믿어지지 않은 것이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에게 간접적으로, 혹은 직접적으로 자신을 표현하셨다. 이것은 모두 그리스도가 오기 위한 과정이다.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2. 예수님이 하나님을 계시함

예수님은 모세보다 위대하거나 다른 선지자들보다 뛰어나지 못하였음에도 우리에게 친근한 하나님을 계시하셨다. 가장 가난한 하나님을 계시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씨는 이상하게도 만물의 찌꺼기 같은 흙에서 싹이 난다. 굳은 바위에서는 싹이 나지 않는다.

모세와 예수를 비교한다면 모세는 큰 바위덩어리라고 한다면 예수는 진흙과 같은 분이다. 거기서 하나님이 아버지로 나타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고 나타내시려고 하신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종교가 되어 너무 굳어져버리니까 자신을 아버지로 보일 수가 없었다.

때론 구름으로 바람으로 능력으로 여러 가지로 계시하셨지만 아버지로는 계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고아를 찾듯 자기의 백성을 찾은 것이다. 아버지가 없어서 아버지를 부르는 것이 평생의 소원인 사람, 아버지라고 한 번 부르고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사람, 이 사람을 찾은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가장 낮은 자리에서 계시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을 우리가 어디서 알 수 있는가?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라. 예수님은 왜 그런 사람들을 택했을까.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했다. 물론 모든 사람을 다 제자 삼기 원했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겨우 몇몇 갈릴리 사람들만이 제자가 되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들은 선생님이라고 한 번 불러보면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문 밖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종교권 밖에 있는 사람들로 어디를 가도 대접받을 수 없었다. 갈릴리 사람들은 선생을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이고, 주님을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자기들의 선생이 되어 주겠다니까 너무 좋아서 기뻐한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천국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의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씨는 반드시 연약한 자리에서 싹이 트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그 생명은 반드시 흙을 만나야만 싹이 튼다. 흙을 만나지 못하면 싹이 트지 못하는 것이다.

 

. 연약한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도 마찬가지다. 왜 많은 사람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꼭 낮은 곳으로 와야 하는가? 하나님 자신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분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오직 아버지밖에 없는 사람, 신랑밖에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분이 제한되게 된다.

씨는 뿌리가 나올 때 뻗고 싶은 곳으로 나야 한다. 그래야 나무가 충실해지고 열매를 맺을 수가 있다. 뿌리가 이런 것 때문에 막히고 저런 것 때문에 막힌다면, 즉 교리적인 이유로 전통적인 이유로 막혀버리면 그 나무는 제대로 자랄 수 없고 열매도 열릴 수가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갈릴리 사람들을 택한 것이다.

 

갈릴리 사람들은 누군가? 그들은 이방인이나 마찬가지다. 비록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멀리 떨어진 변방에 사는 사람들이다. 문화적인 혜택이 전혀 없는 곳이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곳을 변방 갈릴리라 불렀다. 자기 민족인데도 이방인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니 그들은 얼마나 예루살렘에 가기를 원했으며 여호와를 친근하고도 가까이 만나고 싶었겠는가! 그들에게 예루살렘은 설 자리가 전혀 없는 곳이었다.

하나님과 사람의 만남, 그 만남은 가장 연약한 곳, 가장 작은 곳에서 이루어진다. 참 이상하다. 지극히 천한 자리에서 생명을 누리고, 가장 연약한 자리에서 생명은 살아난다. 위대한 자리에서는 생명을 누릴 수가 없다. 이것이 구약과 신약의 차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누림 안에 있는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 이것은 천국 안에 있는 것을 말한다.

 

. 천국은 침노를 당하는 나라임

 

세례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11:12)” 이 말씀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천국에 대한 도전장이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는 것이다. 누가 빼앗는가? 가난한 자가 빼앗는다는 것이다. 종교는 천국을 너무 높은 곳에 올려놓았기 때문에 쳐다보기도 어렵고 쫓아갈 수도 없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인한 천국은 너무너무 낮아졌기 때문에 이제는 누구라도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천국은 가난한 곳, 연약한 곳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다. 가난한 자와 연약한 자는 누구라도 누릴 수 있다. 그래서 천국은 침노를 당하는 나라다. 아주 높은 곳이라면 침노 당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국은 침노를 당하게 되었다. 예수 이전에는 천국이 높았기 때문에 침노를 당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 안에서 육신이 될 수 있는가? 씨가 흙속에서 뿌리가 되고 열매가 되는 것과 똑같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수고 또 부셔서 하나님과 같이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살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침노 당한다는 말은 약하니까 침노를 당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강하다면 왜 침노를 당하겠는가? 약할 때 나는 침노를 당하는 것이다. 쇠파리에게 뜯기는 고기는 소가 살았을 때는 절대로 집을 짓지 못한다. 그러나 소가 죽어서 약해져 버리면 살가죽에 쇠파리가 들러붙어 그들의 왕국을 만든다. 강할 때는 절대로 그렇게 못한다. 천국은 약하기 때문에 침노할 수 있다.

천국은 누가 침노하는가? 강하면 아무도 침노하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강하다면 침노할 수 없다. 그가 약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침노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약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침노할 수 있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가 빼앗느니라.’ 하신 것은 누구든지 침노를 해라, 너희들이 다 나를 침노해 가라그런 뜻이다. ‘너희들이 전부 나를 뜯어먹어라이런 뜻이나 마찬가지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하는 말대로 너희가 다 나를 뜯어먹으라는 것이다. 천국은 세례요한 이후로 계속 침노를 당하고 있다.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생명나무로 표현하였다. 먹을 수 있는 나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생명나무를 먹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먹을 수 있는 생명나무가 오심으로 마치 사과를 먹듯이 그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운명을 완전하게 노출시킴으로써 우리가 그 운명을 먹고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나타낸 자리는 너무너무 거룩하고 위대한 자리다. 그렇게 거룩하고 위대한 것은 어디서 나왔는가? 우리와 똑같은 운명에서 나왔다. 우리가 흙이었기 때문에 부끄러워했던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완전하심이 나왔던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부끄러워서 버렸지만 예수께서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심으로 거기서 거룩함이 나오게 되었다.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 나라는 약한 자에게 임하는 나라다. 가장 약한 자에게 오면 아무도 할 말이 없다.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누리는가? 주님을 누리는 데는 방법이 아니라 흙이 되면 씨가 와서 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공중에, 수면에 운행하고 있다. 물이 있기 때문에 땅에 못 들어오는 것에 불과하다. 물이 걷혀지면 땅에 저절로 떨어지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내는 나라가 아니고 침노를 당하는 나라다.

 

예수께서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것이다(12:2). 어쩔 수 없는 운명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올라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높이 올랐다는 뜻이다. 승천하셨다는 말은 공중으로 올라갔다는 말이 아니고 높이 올랐다는 것을 말한다.

보좌 우편에 계신다는 말은 지극히 영광스러워진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가장 낮은 것이 가장 높이 되었고 가장 부끄러운 것이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 되었다. 흙은 만물 가운데서 가장 낮고 가장 부끄러운 것이다. 그렇지만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높이 될 수 있다. 씨가 오면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부끄러워질 때까지 기다리고 계신다. 그래야 하나님이 오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다.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것이 나오고, 천한 데서 가장 귀한 것, 영광스러운 것이 나온다. 가장 부끄러운 것을 가장 영광스러운 것으로 만드신다는 것이다.

예수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올리셨다는 말은 예수가 이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이 부활이다. 그분으로 인해 우리는 부활하신 생명을 누린다.

 

3. 하나님이 찾아오심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올데갈데없을 때 그 자리에 찾아가셨다.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도, 자기 아버지가 살았을 때도 안 찾아가셨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갈 데가 없을 때 하나님이 찾아가셨다. 야곱이 잘될 때는 하나님이 찾아가신 일이 없다. 그런데 어디로 찾아갔는가? 돌베개를 베고 내 신세가 왜 이 모양인가!’ 할 때 하나님이 찾아가신 것이다.

주님이 우리를 어디로 찾아오시는가? 바로 그런 자리에 찾아오신다. 할렐루야! 베드로가 다른 날은 고기를 잘 잡았을 것이다. 그런데 고기가 안 잡히는 날을 하나님은 내내 기다렸던 것이다. 베드로가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하나도 못 잡은 날이 왔다. ‘옳지, 이 날이구나!’ 하고 찾아가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기이하게 찾아오신다.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우리가 언제 그 약점이 노출될까를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의 약점을 찾고 있는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한다. 할렐루야!

우리가 만일 하나님을 찾아가서 만났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찾아가서 만날 수 없는 분이다. 그가 우리에게 오시는 분이지 우리가 찾아갈 수 있는 분이 절대로 아니다. 바울은 분명히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3:11)” 하였다. 아무도 찾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방법으로도 찾을 수 없다. 또 절대로 찾아내지 못한다. 하나님이 찾아오시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찾을 수가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을 감사한다. 우리가 싫어하던 자리에 찾아오신 것을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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