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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 말씀(마가복음)

(마태복음 74강) 74. 여리고의 두 소경(2월 15일)

작성자김해경|작성시간17.02.09|조회수266 목록 댓글 0


첨부파일 마태 74강.hwp

74. 여리고의 두 소경

“소경 둘이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무리가 꾸짖어 가로되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마20:30-34).”


1.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가. 눈 먼 두 사람을 고치심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에게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고 했다. 우리는 누구를 살리기 위해 있다.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주지 않으면 남을 살리지 못한다. 여리고의 두 소경이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간다는 소리를 듣고 소리 질러 눈 뜨기를 간구하니 예수께서 민망히 여겨 눈을 보게 하셨다는 것이다.


가. 야망에 차 있으면 눈이 어두워져 버림

여기에서 이 소경은 누구인가? 바로 앞에서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달라는 사람과 같은 사람이다. 사람이 야망에 차 있으면 소경이 된다. 주님이 지금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또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지만 무엇 하러 가는지 모르는 사람이 소경이다.

이 두 소경으로 대표되는 사람이 바로 야고보와 요한이다. 야망에 차 있으면 눈이 어두워져 버려서 주님의 길에 동참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길을 모르는 사람, 함께 갈 수 없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소경이다.

마태는 의도적으로 여리고의 소경을 이 사건 바로 뒤에 넣었다. 이것은 바로 그들이 소경이라는 것이다. 그는 예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을 보고 우리 때문에 눈을 뜨게 해주셨구나 하고 깨달았기 때문에 이 사건을 거기에 배열해 놓았다.

사람이 야망에 차 있으면 눈이 어두워져 버린다. 참 이상한 일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분명히 죽는다는 말씀을 했지만 그 말은 전혀 들리지 않고 영광을 받는다는 것만 들렸던 것이다. 사람은 어떤 한 생각에 깊이 빠져 있으면 다른 말이 안 들린다. 듣지 못하니까 결국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예수의 나라에 갈 수가 없다. 눈이 없기 때문에 갈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은 소경 된 사람과 마찬가지다. 애굽에서도 광야에서도 갈 길을 모르고 방황하였고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그 땅이 결코 좋게 보이지 않았다. 눈이 어두운 사람은 하나님이 인도하는 길을 모른다. 눈이 떠져야 주님께서 인도하는 길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으면 그 길이 어디로 가는 길인 줄 알고 따라가야 한다. 우리 눈이 다른 눈이 되어야 세상의 영광이 아닌 다른 영광을 좇아갈 수 있다. 섬기는 것의 기쁨과 자기 목숨을 주는 것의 기쁨을 아는 사람만이 주님의 나라에 동참할 수 있다. 낮은 자가 어떻게 복이 되는지 아는 자만이 주의 나라에 동참할 수 있다.


나.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심

소경 된 자리에서 우리는 주님을 따를 수가 없다. 마태복음 21장을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까이 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는데 이때 제자들을 시켜서 맞은편 동네로 가면 나귀 새끼가 있을 것이니 그 나귀 새끼를 가져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다.

마태는 스가랴서를 인용하여 왕으로 오신 예수가 말씀을 이루려 했다는 것이다. 사람들 모두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마21:4-9).” 하였다.

어떤 시골 청년의 뒤를 많은 사람이 따라가면서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 길바닥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노래를 부른다면 굉장한 축제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이 광경을 한번 상상해 보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모른다. 한 젊은 청년이 나귀 새끼를 타고 가는데 거지같은 시골 사람들이 따라오면서 소리 지르고 있다면 이것은 얼마나 우스운 광경인가. 그런데 이것은 구약에 나오는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이런 행동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구약에 예언하던 바로 그 사람이다.’ 하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한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이 사람이 누구냐?”라고 물으니 갈릴리 나사렛에서 온 선지자 예수라고 했다. 예수님은 그들의 왕으로서 자신을 보여주기 원하셨다. ‘너희가 지금 기다리는 왕은 바로 이런 사람이다.’ 하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은 멍에 매는 짐승의 새끼를 탄 그런 겸손한 왕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고자 한 어떤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는 분명히 예수의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지자들은 이 예수의 나라를 예언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나귀 탄 예수가 아니라 말을 탄 어떤 왕을 기다렸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계획과 사람의 생각은 얼마나 다른지.

마치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이제는 왕국이 세워지는구나 하고 갔던 것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선지자들의 예언을 들으면서 그 예언의 주인이 세상의 왕과 같을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였다.


다. 눈이 어두우면 따라갈 수 없음

주님은 우리를 데리고 어디론가 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눈이 어두우면 전혀 따라갈 수 없다. 앞에서 ‘나는 이리로 간다.’ 말씀해 주셔도 그 말이 다른 말로 들려버린다. 여호와는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을 목적지로 인도하고 있다. 그런데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신 말씀을 들으라 했다.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러 가는 길은 누구나 따라갈 수 있는 길이다.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더라.’ 했다. 보기만 하면 좇게 되어 있다. 안 보이기 때문에 못 간다는 것이다. 자기의 야망(계획, 생각) 때문에 안 보이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길은 우리를 도우려는 길이 아니다. 그 자신의 필요를 위해 이끌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자신의 필요 때문에 우리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의 필요를 깨닫지 못하면 우리의 눈이 어두워져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원래 소원이 없던 자다. 우리는 갈 곳도 없고, 소원도 없고, 직업도 없고, 사명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자다. 단지 하나님의 어떤 목적 때문에 나왔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가 무엇을 계획한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우리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매는 짐승의 새끼에 타신 주님을 바로 알고 따라가야 한다. 나귀는 멍에를 맨 짐승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치 멍에를 매고 가는 사람과 같다.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부르시는가? 멍에 매는 자 안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우리가 높은 자가 되려 하면 멍에를 매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주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주와 함께 영광도 받는다고 하였다. 주와 함께 고난 받음이 없이 어떻게 주와 함께 영광을 받겠는가. 그것은 있을 수 없다.

평안과 영광은 다르다. 평안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우리가 값없이 받는다. 거기에는 아무런 대가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영광은 가만히 앉아서 받을 수 없다. 그와 함께 고난을 받지 아니하면 그와 함께 영광도 받을 수 없다. 천년왕국에서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이 된다면 그때에는 반드시 멍에 맨 자만이 왕 같은 제사장이 될 것이다.

창세기 3장 이전의 세계와 창세기 3장 이후의 세계는 완전히 정반대의 세계이다. 선악과를 먹을 때부터 그들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었다. 그러니까 창세기 3장 이후의 모든 세계는 결국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야망이다.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서 우리가 지음을 받았다면 우리는 그것을 먹어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더 잘될 이유도 없고, 더 못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더 많이 알아야 할 이유도 없다.


라. 인생은 하나님의 필요 안에서 창조됨

하나님께서 우리를 필요로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내가 깨끗해지려 한다거나 위대해지려 하거나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필요 안에 지어졌다면 나는 잘나도 그만이고 못나도 그만이다. 뚝배기로 지어졌든지 항아리로 지어졌든지 주인에게 쓰여지는 것은 똑같다. 내 입장에서 생각하니까 뚝배기가 좋다거나 항아리가 좋다고 하지 하나님 입장에서는 뚝배기는 뚝배기대로 쓸 데가 있고 항아리는 항아리대로 쓸 데가 있다. 결코 항아리만 있을 수도 없고 뚝배기만 있을 수 없다. 곰탕을 먹으려면 어떻게 항아리에 넣고 먹겠는가.

우리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을 따를 수 없고 주 예수님과 동행하는 노정에 이를 수가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무엇인가 더 나아지려고 하다가 항상 교만에 빠지고, 탐심에 사로잡히고, 야망을 좇게 되는 것이다. 이런 욕심은 모두 나의 뜻이지 주인의 뜻은 아니다.

우리는 주인이 명하시면 어디로 가든, 어디에 있든 그대로 따르면 된다. 그것이 잘되든지 못되든지 그 결과는 주인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예수님께서 좌우편을 간청하는 두 아들의 어머니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였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마20:23).” 하였다. 결국 요한과 야고보는 이 예언대로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그들은 주를 위하여 참으로 산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처리를 받지 않고서는 이렇게 되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의 필요 안에서 창조된 줄로 안다면 우리는 자신에 대하여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오늘은 이렇게 되기도 하고, 내일은 저렇게 되기도 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동으로 가자 하시면 동으로 가고, 서로 가자 하시면 서로 가면 된다. 이것이 정상적인 삶이다.

우리에게는 결코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없다. 또 무엇은 잘했고 무엇은 못한 것도 없다. 단지 주인의 필요에 맞으면 옳은 것이고, 주인의 필요에 맞지 않으면 틀린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의 속에 있는 야망 안에서 산다면 여리고의 두 소경처럼 될 것이다.


2. 영광의 노정에서 어린아이를 세우심

주님은 이 영광의 노정 속에 어린아이를 등장시켰다(마18:2-5,19:13-14). 어린아이들을 내놓고 어린아이들을 보라고 말씀하셨다. 누가 크냐는 문제가 나왔을 때도 어린아이를 내놓고 자기를 낮추는 자가 하나님 나라에서는 제일 큰 자라 말씀을 했고,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에게도 어린아이를 내놓고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의 생활은 어린아이가 적합하고, 겸손한 자가 적합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나귀 새끼를 탄 자, 멍에를 맨 짐승을 탄 자, 그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멍에를 매고 그를 쫓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멍에를 매지 아니하면 주인에게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멍에는 우리에게 영광을 준다. 멍에가 없다면 영광도 전혀 없다.

탐심에 가득 찬 이 세상 속에 바로 이런 나라가 필요하고, 야망이 가득 찬 세상 속에 바로 이 예수의 나라가 필요하다. 이스라엘을 왜 부르셨는가? 온 세상이 모두 탐심과 야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 속에 그렇지 않은 어린양으로서 한 백성을 부른 것이다. 그 백성은 영원히 야망으로 가득 찬 세상 가운데 어린아이였어야 했다. 이스라엘은 어린아이가 되기 싫었다. 멸시와 천대를 받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운명을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다면 우리는 결코 세상과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세상의 영광을 얻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람만 예수의 나라에 합당하고, 그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바로 그렇게 부름 받았다.

제사장 백성으로 부름 받았다는 것은 제물을 말한다. 사실 제물은 제사장 자신을 대표한다. 제사장은 섬기는 축복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것(섬기는 축복)이 우리의 할 일이다. 우리가 이 일 때문에 불렸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저 사람은 저래서 필요하고 이 사람은 이래서 필요하구나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은 나귀 새끼밖에 타실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예수의 승리가 어떤 승리인 줄 알아야 예수의 영광의 노정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3.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

예수님이 십자가로 갈 때 제자들은 소경과 같았다. 그가 어디로 가시는지 몰랐던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만이 예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았다. 야망이 있으면 소경이 되고 만다. 막달라 마리아는 여자이고 신분이 낮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야망이 없었다. 너무 지저분한 데서 구원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야망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예수를 주님으로 알아봤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우리의 눈이 떠져야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알게 된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내 소원이 없으면 우리는 쉽게 응답할 수 있다. 그러나 내 소원이 많으면 우리는 응답하지 못하게 된다.

신앙생활 할 때 고민이 되었던 문제는 나를 볼 때 내 자신이 만족하지 않는 것이다. 누가 나에게 나쁜 말을 해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 무엇인가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나는 이것만 없으면 하나님과 합할 수 있는데 한다. 그러나 그것이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고치기 위해 기도를 하였지만 안 되었다. 세상 욕심이 없는 사람들은 이 문제 때문에 일생을 고통하게 된다.

그런데 주님이 당신의 필요 때문에 나를 씻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모든 것이 홀가분해졌다. 나는 내 필요 때문에 씻으려고 했는데 나의 소원이 쓸데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이 필요하다면 내가 더러우면 더러운 대로 쓰실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쓰실지 우리는 모른다. 무엇으로 쓰실지 모른다. 그러므로 내가 아무리 깨끗해도 소용이 없고 더러워져도 소용이 없다. 주님이 자기의 필요로 쓰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알고 나니 내가 신경 쓸 일이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안식하게 되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모든 일에 대해서 해방이 될 것이며 자유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영광스러운 교회로 부르실 때 당신의 마음에 맞아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필요로 하신다면 자기 필요에 따라 우리를 만들어 갈 것이다. 이렇게도 만들고 저렇게도 만들어서 적절하게 하나님이 필요하도록 만드실 것이다. 주님이 자신의 아내를 위해서 준비하는 분이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그가 준비한 대로 따라가야 한다. 그가 오라 한 대로 따라가는 것이 합당한 아내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대로, 주님께서 우리를 쓰시고자 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우리의 길이다. 주님이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고 난 다음에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다른 변화가 생겼다. 전에는 신경을 썼는데 변화가 안 되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데 다른 변화가 생긴 것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욕심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되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나님을 위하는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참으로 필요로 하시면 당신이 어느 때이든지 당신의 필요한 대로 만들어 가신다는 사실이 내게 소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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