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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 말씀(마가복음)

(마가복음 17강) 17. 귀머거리도 듣고(1월17일)

작성자김해경|작성시간18.01.11|조회수94 목록 댓글 0

제 17 강

17. 귀머거리도 듣고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 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막7:31-7:37)”

마가복음 7장에 오면 바리새인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시골까지 찾아와서 예수를 시비하는 사건이 나온다. 제자 중에 몇 사람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막7:5)” 이렇게 시비를 걸고 있다.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으라 하는 것은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장로들의 가르침에 속한 일이다.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 물을 뿌리지 않으면, 즉 목욕하지 않으면 먹지 않는 것이 장로들의 가르침이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지켜오는 것이 있었는데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는 것이다. 그래서 손도 씻고, 목욕도 하고, 그릇도 닦고, 그런 다음에 먹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율법 안에 있지 않는 것도 장로들의 유전으로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도 우리 교회사에 보면 꼭 성경에 있어서 그런 게 아니고 성경에 없는 것도 교회의 전통이 되어 철저하게 지켜오는 것이 있다.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일들이 많다. 이때도 바로 그런 사건이 생긴 것이다.


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됨

그때에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인 한 여자가 예수님을 찾아 와서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주시기를 간구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부르게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7:27).” 하고 매정하게 말씀하셨다. 자녀에게 떡을 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떡을 주는 것이 마땅하고, 이방인들에게 주는 것이 마땅치 않다는 말씀이다.

그러자 여자가 “주여 옳소이다만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7:28).”라고 대답했다. 과연 이렇게 대답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는 말은 이방인을 개라고 하는 말이므로 굉장히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이다. 이것을 생각하면 너무 기이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막7:29).” 하시니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셨다.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안수해서 고쳐주시니 귀가 열리고 혀에 맺힌 곳이 풀려서 말이 분명하게 되는 사건이 나온다. 그리고 8장에 가면,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였던 것과 비슷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사천 명의 사람이 배불리 먹고 부스러기가 일곱 광주리나 남았다는 이야기다(막7:31-8:10).

우리는 여기서 왜 이런 말씀들이 있는가 하는 것을 찾아본다. 첫 번째로 나오는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은 겉은 깨끗하지만 속은 더러운 귀신 들려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손은 씻고 목욕도 하고 그릇도 닦고 하지만, 이 사람들 속에서는 다른 것이 나오는 것이다. 왜 이 사람들을 여기다 써 놓았느냐 하면 이 사람들은 배가 불러서 식욕이 없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여기서 두 사람을 대조하고 있는데, 한 사람은 배가 고파서 부스러기라도 먹기를 원하는 사람이고, 한 사람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서 그것을 못 먹는 사람이다. 여기 수로보니게 여자는 식욕이 왕성한 사람이다. 부스러기라도 좀 달라고 하는 그런 사람이다. 손을 씻고 목욕을 하고 그릇을 다 닦고 그러고도 먹을 수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식욕이 전적으로 떨어진 사람들이다.

제자들 중에 몇 사람이 손을 씻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먹는 것을 보았다고 하는데 제자들도 다 유대인인데 왜 손을 씻지 않고 먹었을까? 이 사람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몰라서 그랬겠는가? 아니면 일부러 안 씻고 먹었겠는가? 다 유대인이고 장로들의 유전을 오랫동안 지켜오던 사람들인데, 일부러 손을 안 씻고 먹었다고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런데 너무 급하니 손 씻을 겨를도 없이 먹었을 것이다. 너무 배가 고프면 손을 씻을 겨를이 없는 것이다.

이 사건을 예수님과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갈 때의 사건과 비교해 본다면 같은 것이다. 그 날 공연히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 밀을 꺾어 먹은 게 아니고 시장했기 때문이다. 배가 고프니 안식일인지 뭔지 모르고 먹은 것이지, 일부러 안식일인데 꺾어 먹은 것은 아니다. 그들은 수천 년 동안 안식일에 일하면 안 된다는 것이 머리에 박혀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너무 배가 고팠기 때문에 안식일이지만 먹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사람들에게로 전파되었는지를 알 수가 있다. 이상하게 똑같은 말씀이 전파되어도 어떤 사람은 배고픈 사람으로서 이 말씀을 받아들이게 되고, 어떤 사람은 배불러서 안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이 아무 곳이나 뿌려진다고 다 나는 것이 아니고 옥토에서만 나는구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배고픈 사람에게밖에는 필요하지 않는 사람이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가난한 자는 도대체 누군가? 바로 수로보니게 여자 같은 사람이고, 미처 손을 씻지 못하고 먹는 제자들 같은 사람이다. 안식일인데도 불구하고 밀밭 사이에서 밀을 꺾어 먹은 제자들과 같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1) 종교적인 관행에 빠져 그리스도에 대해 무감각해짐

종교가 오래되면 사람들이 모두 식욕이 없어져 버리고 만다.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없어지고 만다. 여러 가지 종교적인 의식과 규례와 유전과 형식, 이런 것들이 꽉 차서 배고픈 것을 못 느끼게 만든다. 둔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냥 종교적인 의식만 하면 되는 것처럼 여긴다. 가령 ‘내가 예배당에 가서 오늘 예배를 잘 드리고 왔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엄숙하게 와서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하고 갔다면, 혹은 가서 졸았더라도 앉았다가 오면 다 됐다고 생각한다.

그 날 가서 뭘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들은 것도 없고 남은 것도 없지만, 갔다 왔다는 것으로 해결이 되고 만다. 종교는 이렇게 되고 만다. 그래서 사람들이 식욕이 둔해져 버린다. 종교적인 모든 의식과 관행들은 전부 이런 역할을 하고 있다. 더 이상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없게 만든다.

우리가 종교적인 사람들을 만나 보면 “너희는 기도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기도를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자기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들은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감각이 전혀 없다. 식욕이 없어져 버린 사람들이다. 아주 둔해져서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전혀 무감각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오직 종교적인 관례, 전통, 교리, 이런 것에만 관심이 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감각이 없다. ‘무엇을 행할 것이냐?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이냐?’ 이런 생각만 하고 있지, 그리스도 자신에 대해서는 들어 보지도 못하고, 생각해 보지도 못했기 때문에, 전혀 감각이 없다. 이런 사람들이 기껏 하는 이야기가 ‘손을 어떻게 씻느냐? 목욕할 때 어떠한 방법으로 하느냐? 그릇을 씻을 때 어떠한 방법으로 씻느냐?’ 이런 것을 의논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하나님에 대해 죽어 버린 사람들이다.

종교적인 생활에 젖으면 이렇게 된다. 종교적으로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만 하면 그것이 다 된 것처럼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왜 손을 씻지 않고 먹느냐?”고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다. 남의 급한 사정은 모르고, 배가 고파서 얼른 먹는 것은 모르고, 여유가 만만해서 ‘왜 씻지 않고 먹느냐? 왜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일을 하느냐?’ 이런 사람들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2) 가난한 여자가 예수의 사랑에 도전함

그러나 이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여자, 즉 이방인의 한 사람으로 식욕이 왕성한 이 사람이 예수 앞에 도전했다. 예수의 사랑에 도전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리라.” 왜 이 말씀을 했겠는가? 예수님이 유대주의에 사로잡혀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다. 이 여자에게 무엇인가를 도전하게 한 것이다.

이 말을 하면 이 여자가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 한 것이다. “왜 손을 씻지 않고 먹느냐?”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봐라, 이 여자가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라.’는 것이다. 그랬더니 그 여자가 반응하게 되었다. “주여, 옳소이다만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도전을 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이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고 했다. ‘네가 그렇게 말하였으니 돌아가라.’ 한 것이다.

식욕이 왕성한 사람은 살이 찌게 되어 있고, 식욕이 왕성한 사람은 건강하게 되어 있다. 살이 찐 사람 치고 밥맛이 없는 사람이 없다. 잘 먹는 사람 치고 건강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잘 먹으면 좌우지간 건강하게 되어 있다. 이 여자만큼 식욕이 왕성하다면 하나님 나라를 누리지 못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나. 귀먹고 말이 어눌한 자를 고치심

그러고 난 다음에 귀먹고 말이 어눌한 사람을 데리고 왔다. 이 사람은 왜 말을 못했는가? 듣지 못해서 말을 못했다. 듣지 못하면 말을 못한다. 말씀을 듣지 못하면 말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교회 안에서 우리의 모든 증거는 들음에서 나온다. 내가 스스로 생각해서 나온 게 아니고 들어서 나온 것이다. 잘 듣는 사람이 잘 나오게 되어 있다. 열심히 듣는 사람이 열심히 말하게 되어 있다.

예수께서 이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서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어 그에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다. 참 이상한 행동을 하셨다. 왜 따로 데리고 갔는가? 교회 안에서 다 잘 들리면 따로 한적한 곳으로 데리고 갈 필요가 없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전체적으로 말하는데 못 들으면 따로 데리고 가서 귓구멍에 손을 넣고 풀어야 한다. 따로 보충교육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이 들리지 않으면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듣는 대로만 말하게 되어 있다.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이 맨 처음 이야기할 때 어눌하게 말하는 것을 보게 된다. 처음에는 우리가 다 어눌한 자이다. 듣기는 들어도 말을 잘 못하고, 확실하게 말을 못하고, 말을 해놓으면 이 말을 했는지 저 말을 했는지 잘 모르고, 다른 사람이 하는 말도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고, 이렇게 된다. 그렇지만 차츰차츰 분명해져 간다. 그래서 확실하게 말을 하게 된다.

하나님 말씀도 똑같다. 하나님 말씀은 꼭 들어야만 말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도 보고, 다른 사람의 말도 듣고, 하나님 말씀을 듣기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어떤 말이 있어야 그 마음을 표현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 언어가 있어야 그 마음을 표현할 수가 있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 있는 어떤 것을, 우리 안에 들어온 하나님의 어떤 생명을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 말씀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 안에 들어온 생명은 하나님 생명이기 때문에, 그 생명이 표현되어야 하는데, 그 생명은 어떤 말을 필요로 하고 있다. 어떤 말이 있으면 아주 정확하게 표현되고, 어떤 말이 없으면 정확하게 표현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도 답답하고 남도 들으면 뭔지 모르고 답답하다. 그런데 그 말을 찾아내게 되면 자기도 시원하고, 남도 들으면 확실하게 된다.

성경에 있는 말씀들이 참 신기한 것이 이것이 정말로 그 어떤 깊은 영으로, 깊은 생명으로 쓰여진 것이 분명하다. 이 말들을 우리가 만나고 보면 다르게는 표현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꼭 그렇게 표현해야 완전한 그런 말들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 보면 훨씬 더 쉽게 표현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된다. 자기 안에 있기는 있지만, 언어가 없어서 모르던 것을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아, 이거로구나!’ 하고 알게 된다.

성경에 있는 모든 사건들은 전부 우리 안에 하나님이 이루어 놓으신 사건들이다. 나는 분명히 그런 사건을 똑같이 가지고 있다. 아브라함의 과정을 나는 그대로 겪어 왔다. 그렇지만 내가 성경에 아브라함 사건을 읽지 않으면 이것이 뭔지를 모른다. 또 자기에게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왔다는 생각을 못할 수도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브라함의 얘기를 쭉 읽다가 보면 그때 번뜩 떠오르는 것은 ‘그것이 바로 이것이구나.’ 하고 알게 된다. 그래서 내가 아브라함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성경을 읽다가, 내가 그 성경 안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곧 하나님 말씀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 안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즐거움이 생기는 이유가 그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기쁨이 생기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자기 안에 그것이 있는데 그 말이 툭 튀어 나오니 그래서 즐거운 것이다.


다. 하나님의 말씀만 하는 사람이 됨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깊이 듣고 깊이 새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그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내가 발견되고, 그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내가 찾아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야곱과 같은 일생을 살았을지라도 그것이 성경에 없으면, 우리는 해석되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비교를 해보면 나와 같은 사람이 많이 있다. 그 사람에게 하나님 말씀을 들려주면 하나님 말씀에서 자기 자신이 찾아진다. ‘저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데, 그게 꼭 내 말이네.’ 이렇게 된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이 우리의 말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귀가 어두우면 우리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아무것도 듣지 못하면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다. 이 사람은 오직 자기 생각으로만 사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러나 우리가 귀가 열리게 된다면 남의 말을 듣고, 그리고 자기 말을 하는 사람이 된다. 귀가 열리고 혀에 맺힌 것이 풀려서 말이 분명하게 된다.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귀머거리도 듣게 하고 벙어리도 말하게 하는구나.’ 하게 되었다. 우리 교회에 와서 어떤 사람은 귀머거리였는데 듣게 되고 벙어리였는데 말을 하게 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듣기는 들어도 말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교회는 귀머거리와 벙어리가 전부 다 없어져야 한다. 못 듣는 사람도 없어져야 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도 없어져야 한다. 내가 점잖게 있다고 생각해서 말을 하지 않는다면 벙어리가 되는 것이다. 여기는 점잖고 그런 것은 소용없고, 말을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귀머거리와 벙어리가 예수님으로 인해서 없어졌으니, 주의 말씀이 그 귀를 뚫고 벙어리의 혀를 부드럽게 해서 말하게 하는 것이다.

분명히 교회는 점점 더 갈수록 더 시끄러워질 수밖에 없다. 더 말을 많이 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의 말과는 다르다. 세상 사람들은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한다. 많이 모여서 말을 해놓으면 시끄러워지기만 한다. 우리는 그런 말이 아니고 주님을 간증하고 있다. 우리가 주님을 간증하게 되면 점점 아름답고 좋아지지만, 주님이 아닌 다른 말을 많이 해놓으면 뒤로 가면 시끄럽게 된다. 우리가 주님만을 증거하기를 원한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시51:15).”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입술이 오로지 주님만 찬송하게 되기를 원하고, 주님만을 영화롭게 하게 되길 원한다.

이것은 결국 마가복음 8장 1절 이하의 사건으로 연결되었다. ‘많은 사람이 배부르게 먹고 일곱 광주리가 남았더라.’ 했다. 이 귀먹고 어둔한 사람이 말을 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배불리 먹었겠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반대자가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더 확실하게 드러나는 나라이다. 식욕이 극도로 떨어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식욕이 극도로 좋아진 사람이 생겼다. 헬라인인 수로보니게 여자는 손을 씻을 겨를도 없고, 목욕할 겨를도 없고, 그릇 씻을 겨를도 없이 먹는 사람이다. 이 사람으로 인해서, 결국 귀가 뚫리고 혀가 풀어지고 그래서 사천 명이 먹고도 일곱 광주리가 남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하나님 나라는 방해를 받으면 더욱더 왕성해지고, 또 세상과 비교하면 더욱더 분명해지는 그런 나라인 것을 볼 수 있다. “왜 손을 씻지 않고 먹느냐?” 하는 이 사람들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사천 명이 먹고 일곱 광주리가 남는 사건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된다. 주님께선 이렇게 부정적인 사건으로 인해 우리를 더 완전한 세계로 이끌어가고 있다. 세상이 궁핍하면 우리는 더욱 부유해지고, 세상이 식욕이 없으면 우리는 더욱더 식욕이 왕성하도록 그렇게 이끌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오순절 날 일어난 사건은 굉장한 사건이었다.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이고, 각 사람의 혀가 꼬부라져서 말하게 되었다. 그러나 점점 더 그 혀들이 부드러워져서 예언을 하게 되었고, 하나님 말씀을 바로 하도록 되었던 것 같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의 입을 사용해서 당신 자신을 표현하기를 원하고 있고, 우리 자신을 통해서 그를 증거하게 되기를 원하고 있다. 주님은 우리가 말하기를 원하고 계신다.

우리의 귀는 들어야 하고, 우리의 혀는 말해야 한다. 우리가 세상의 것이 자꾸 들어왔던 사람들이고, 세상의 것만 계속 말해 왔던 사람들이다. 우리가 그것을 바꾸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고,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사람이 된다면, 이 세상에는 다른 말이 없어지게 될 것이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전파되고 진리가 전파될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진리를 전파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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