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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 말씀(마가복음)

(마가복음 65강) 65. 씨뿌리는 사람(2월13일)

작성자김해경|작성시간19.02.10|조회수257 목록 댓글 0

제 65 강

65. 씨 뿌리는 사람

예수님은 그 자신을 씨 뿌리는 사람 안에서 비유를 들었다. ‘하나님 나라는 마치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고 말씀했는데 이것은 사실 예수님 자신의 비밀이라고 할 수 있다.

씨를 뿌리는 사람과 씨는 하나다. 이것이 예수님 인격의 비밀이다. 오늘 우리는 이 인격을 받기를 원하고, 이 인격을 살아내기를 원한다. 우리가 씨이면서 씨 뿌리는 자이고, 씨 뿌리는 자이면서 씨이다. 이 비밀한 인격을 소유하고 또 이것을 전파하기 원한다.


가. 예수의 삶이 곧 그의 일

예수님 자신의 삶을 보면, 그가 일하는 것이 바로 그가 사는 것이고, 그가 사는 것이 곧 그가 일하셨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도 일이 아니고 곧 자기의 삶이셨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은 전부 그 자체가 자신의 삶이셨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것은 그의 일이 아니고 그의 삶이심을 볼 수 있다. 병을 고치는 것도 그러했다. 왜냐하면 상함을 받은 것을 고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는 일도 하셨다. 그러니까 그에게 있어서 모든 일이 전부 그의 삶이다.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되면,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되기 때문에 우리의 일은 피곤한 일이 아니고 살면서 하는 일이 된다. 삶 자체가 우리의 일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왜냐하면 내가 살아내는 일이니까 모든 것이 즐겁다.

만일 우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사탄과 싸운다면 그것이 참으로 피곤할 것이다. 그러나 목적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 사탄과 싸워야 하는 사람이므로 싸운다면 우리는 그것이 피곤하지 않고 즐거워진다.

예수님은 사시는 것이 전파하는 것이고 자기가 사는 것이 싸움이었으며 자기가 사는 것이 곧 침례(세례)를 받는 일이었다. 자기가 사는 것은 영원히 자기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자기가 사는 것은 영원히 사탄과 싸우는 일이었다. 자기가 사는 것은 영원히 전파하는 일이었다. 예수님 안에서 그 일과 그 자신이 전혀 구별되지 아니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완전한 구원이다. 완전한 인격은 반드시 일과 자기 자신이 구별되지 않는다. 그 일이 곧 자기고, 자기가 곧 그 일이 된다.


나. 예수의 삶 속에 들어 있는 인격의 비밀

예수님이 사탄을 이기는 일은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을 표현한 것이 사탄을 이기는 일이 되었다. 예수님은 자기를 표현했다. 자기를 드러냈는데 그것이 이김이 되었다. 자기 자신을 드러냈는데 그것이 복음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모두 신성한 것이 되었다.

자기를 드러내면 모든 것이 침례가 되고 전쟁하는 것이 되며 전파하는 것, 가르치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 병든 자를 고치는 것,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 되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드러내면 그것이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는 일이 된다. 나 자신을 드러내는데 더러운 사람이 깨끗해진다. 나 자신을 드러내는데 병든 자가 고침을 받는다. 나 자신을 드러내는데 귀신들린 자가 나간다. 이것이 예수님 자신의 삶이다.

예수님 자신의 삶 속에 예수님 자신의 인격의 비밀이 들어 있다. 우리는 이 비밀한 인격을 소유하기를 원한다. 하나님이 사는 것, 그 결과가 바로 일이었음을 본다. 예수님은 살고 계시는데 다른 사람이 볼 때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 생명을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분명히 그 사람이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가리켜 ‘저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지만 실재의 내용은 하나님이 사시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은 바로 하나님이 사신 것이다. 그가 복음을 전하고 죄들을 사하는 일들을 하셨는데, ‘죄들을 사하라’고 하나님께서 했으니까 ‘내가 죄들을 사해야지.’ 하면 이것은 일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누구를 만나면 죄를 사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그 죄들을 사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해성사를 하러 신부 앞에 가서 ‘내가 이러이러한 죄를 저질렀는데 이것을 내가 고백합니다.’ 그러면 ‘내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네 죄를 용서한다.’ 이렇게 하면 사해지는 것이 아니다. 죄를 사한다는 것은 죄를 사할 사람이 있으면 사해진다.

우리가 만일 죄를 사할 사람이라면 우리를 만나는 사람이 죄를 사함을 받게 된다. 그 사람을 내가 덮어 버리기 때문에 그 사람의 죄가 없어진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들어갔는데 그 집의 죄가 사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 집에는 잔치가 벌어졌다. 우리 인생에 왜 기쁨이 생기는가? 그가 잔치로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이다. 그 때 그분은 그들의 만족과 자유가 되었던 것을 보게 된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만족해졌고 자유 하였다. 그 전에는 자유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세리였고 많은 사람의 지탄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자 그는 자유롭게 되었다. 아무도 그를 정죄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예수를 만나니까 자기에게는 자유가 생겼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나님을 살아내시는 일이었다. 내가 가면 복음이 전해지고, 죄가 사해져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는 일이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오신다면 우리에게는 죄가 사하여질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오신다면 우리는 기쁨 안으로 인도될 것이다. 율법이 왔기 때문에 우리는 정죄 가운데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오시면 우리는 정죄 가운데 있지 아니하고 은혜의 덮음 가운데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함 가운데 있으며 아버지의 용서함 안에 있게 될 것이며 용서를 살게 될 것이다. ‘당신은 죄 용서함을 받았는가?’ 어떤 사람은 그렇게 묻는 사람도 있다. 내가 너의 죄를 용서한다고 성격에 쓰여있기 때문에 죄 사함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믿음이 흐려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어느 날 믿음이 식어 버리면 죄 사함도 식어져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면 다시 옛 죄가 살아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버지 안에 있다면 우리의 옛 죄가 다시 살아날 필요가 없고, 우리는 죄를 기억하지 않게 될 것이다.


다. 씨 뿌리는 자와 씨는 하나임

예수님이 씨 뿌린 자 비유를 하셨다. 비유를 말씀하고 있는 분이 곧 씨를 뿌리는 분이다. 비유로 자기를 말하고 있다. 씨 뿌리는 사람을 그 비유를 통해서 자기 말을 하고 있다. 씨 뿌리는 사람, 씨 뿌리는 비유를 말하는 사람 그리고 씨가 하나이다.

병든 자를 고치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는 성한 사람이다. 왜 예수님은 상한 자를 고치셨는가? 자기가 성한 자, 건강한 자이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병을 고치는 자와 성한 자는 하나라는 것이다. 이것 역시 씨 뿌리는 일이라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을 때 거기서 결과가 나온 것을 본다. 베드로의 장모의 집에 들어갔을 때 열병을 고치셨다. 그랬더니 열병이 나은 다음에 베드로의 장모가 나와서 수종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면 왜 수종을 들었을까? 그에게 무엇이 왔기 때문에 수종을 들었다.

병원에 가서 병을 치료하고 나면 우리가 돈을 주고 그냥 가지, 병원을 위해 수종을 드는 사람은 없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고 난 다음에, 이 장모는 일어나서 수종을 들었다. 수종을 든다는 말이 간단한 말이 아니다. 병만 나으면 그냥 갔을 텐데, 왜 그를 섬겼겠는가? 무엇이 자기한테 일어났다. 씨 뿌림이 일어났기 때문에 무엇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왕국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이 씨다. 이것이 뿌려지는 것이 하나님의 왕국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막4:26)”

땅에 씨를 뿌리는 것이 어떻게 왕국이 되는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어떤 시대와 어떤 영역을 하나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시대적으로 본다면 구약 시대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나라였다. 지금은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이다. 또 앞으로는 왕국 시대가 있는데 그 왕국 시대가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왕국이 씨라는 사실에서 본다면, 이것은 결과를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는 어떤 시대가 온다면 그 시대는 하나님의 씨가 있음으로만 가능하다.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씨가 있음으로써만 가능하다.

참 이스라엘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씨가 있음으로 가능하지, 그 씨가 없을 때는 전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왕국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씨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뿌리고 계신다. 그 어떤 나라가 되기 위한 종자를 지금 뿌리고 있다. 예수님 자신을 사람들에게 뿌림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하나님 나라가 일어나도록 하심을 볼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일어나는 나라, 나타나는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어떻게 조직하거나 만드는 나라가 아니고 거기서 무엇인가가 나오는 나라이다.

씨를 뿌려 놓고 갔더니 그 다음날 싹이 났다. 그 싹이 난 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이다. 열매가 열렸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나타난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파할 때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무슨 어떤 특별한 생활을 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돌아서서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셨다.

이 복음을 믿으라는 말은 구체적으론 “나를 믿으라.”는 말과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복음은 바로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그 씨를 믿으라는 것이다. 내가 지금 이 씨를 뿌리고 있는데 이 씨를 너희가 믿으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씨를 받아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씨가 자라면 왕국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라면 시대가 되고, 자라면 영역이 되며 국가가 될 것이기 때문에 너희가 이 씨를 믿으라는 말씀을 전하고 있다.

라. 하나님 나라의 씨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구체적으로 이 말씀들, 이 씨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인격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칠 때 자기 자신을 거기다 줬다. 무슨 일을 하실 때도 자기 자신을 거기다 줬다. 그래서 한 인격이 거기 들어간 것을 보게 된다.

예를 들어서 베드로를 바닷가에서 부르셨을 때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막1:17)” 하셨다. 그날로 베드로가 따라왔다. 왜 그랬는가? 그 무엇이 뿌려졌기 때문이다. 그 인격이 이끌기 때문에 따라왔다. 만일 그 인격이 아니었고 하늘에서 그냥 소리가 났더라면 베드로는 어디로 갈지 몰랐을 것이다. 그는 소리를 들은 것이 아니고, 인격의 말씀을 들었다.

오늘날 어떤 기독교인들이 사람들을 만나면 ‘당신 구원을 받았습니까? 언제 구원을 받았습니까?’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런 사람이 베드로 보고‘언제 구원을 받았습니까?’라고 묻지는 못한다. 왜 그런가? 베드로가 언제 구원 받았다는 말이 성경에 없다. 언제 구원받았다고 할 근거가 아무 데도 없다.

바닷가에서 부름 받았을 때 구원받았다고 말하면 말이 모순이 된다. 왜 구원 받은 사람이 배신하는가? 구원 받은 사람이 왜 도망치는가? 그것은 말이 안 된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을 받을 때 그가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여러 가지 해석도 많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베드로에게 씨가 뿌려졌다. 예수가 뿌려지고 있었다. 이 뿌리는 시간이 오래 걸려 점점 뿌려지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우리 안에 씨가 뿌려지기 시작한 것이 언제인가? 언젠가부터 씨가 뿌려져 왔다. 우리는 단지 씨 뿌림을 받았고 지금도 그 씨가 자라고 있다고 말하게 된다.


마. 예수는 씨를 뿌리시는 분

예수님께서는 씨를 뿌리는 분이다. 그 씨가 뿌려져서 30배, 60배 그리고 100배가 될 때까지, 오랜 시간을 거쳐 뿌려지고 자라나서 거두어진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왕국은 인격이다. 이 인격은 그리스도라 일컫는 한 사람인데 이 사람은 성육신한 하나님의 아들을 말한다. 말씀이 육신이 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안에 들어왔다.

베드로가 바닷가에서 만난 사람은 누구인가? 말씀이 육신이 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래서 그에게 끌렸다. 다른 말로 하면 그는 부름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누구에게 부름 받았는가? 성육신된 하나님의 아들에게 부름 받았다.

못이 왜 끌려갔는가? 자석이 오니까 끌려갔다. 나는 왜 끌려갔는가? 자석이 왔기 때문에 끌려갔다. 우리는 성육신하지 않았는데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오니까 내가 끌려갔다. 그래서 나는 부름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교리적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부름을 받은 것과 구원을 받은 것은 다르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아니하다. 부름을 받은 것이 구원이고 구원이 곧 부름 받은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에게 이끌려 온 때문이다. 우리는 성육신 안으로 이끌렸다. 성육신이 구원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육신의 구원 안으로 이끌려 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그냥 자연스럽게 말한다. 교리적으로 ‘몇 월 며칠 나는 구원을 받았다.’, ‘성경 몇 장, 몇 절을 읽고 나는 구원을 받았습니다.’그렇게 할 필요가 전혀 없다. 우리는 한 사람에게 이끌려 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왕국의 씨에게 이끌려 왔다.

하나님 나라의 어떤 씨가 내게 뿌려지고 있었음을 본다. 이 사람이 뿌려진 것이 바로 왕국이 된다. 이 사람을 우리가 받았고 또 전파되고 전파되어서 그것이 바로 왕국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육신을 전파하는 것이며 이것을 재배하고 있다. 이 땅 위에서 무한히 성육신을 재배하려 한다. 예수 그리스도,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은, 이 땅 위에 충만하도록 재배되기를 원해서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땅을 찾고 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재배하려고 땅을 찾으셨다.

베드로는 바로 이 성육신을 재배하기 위한 땅이고 밭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라는 밭에다가 성육신인 자기 자신을 재배하셨다. 어느 날 거기서 벌레가 먹고 바람이 좀 불며 뿌리가 상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성육신이 성장을 해서 그리스도가 드러나게 되었다.

식물도 씨를 뿌리면 잘 자라다가 중간에 와서 벌레를 먹기도 하고 그러다가 다시 회복되기도 해서 살아난다. 우리가 예수를 따라가는 과정도 그와 같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을 예수님 자신을 위해 재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성육신이신 예수님 자신이 우리 안에 지금 뿌려져서 자라는 세계에 있다. 이렇게 자라고 있는 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이다.

바. 예수는 자신을 뿌리시고 자신을 거두시는 분

복음서에는 주님께서 씨 뿌리는 자로 등장하고, 계시록에서는 추수하는 분으로 등장하신다. 그러니까 뿌리고 추수하시는 분이다. 무엇을 뿌리고 추수하시나? 자신을 뿌리고 추수하신다.

예수님이 자신을 뿌리셨으니 무엇을 거두시겠는가? 곧 자기 자신을 거두실 것이다.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가 이르렀음이니이다(계14:14~15).”

예수님께서는 결국 자기가 뿌린 씨를 열매로 거두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다. 세상을 심판하러 온다는 말은 당신 자신이 뿌린 씨를 거두니까 자동적으로 심판이 된다는 뜻이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온다는 뜻이 아니다.

당신 자신을 거두니까 당신이 아닌 것은 심판이 된다. 열매가 익으면 쭉정이는 다 불에 태워지는 것이 당연하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당연히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의 경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신약은, 우리에게 씨가 되시고 씨가 뿌려지시며 씨를 거두시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뿌리기 위함이다. 당신 자신을 뿌리러 오셨다. 어떠한 방법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바가 없다. 어떻게 하면 너는 성경적이 된다든가, 영적이 된다든가, 거룩하게 된다는 것을 전혀 가르치지 않으셨다.

그냥 당신 자신이 살고 갔는데 그 살고 간 것이 우리에게 뿌림이 되었다. 이를 접촉한 사람들은 그 안에서 자기도 모르게 무엇이 자라나서 자기 안에서 무엇이 나온다. 나온 것을 봤더니, 바로 뿌리고 가신 분이셨다. 이것이 바로 신약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은 우리가 무엇을 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서 무엇이 나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뿌림을 받아서 자라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윤리적인 사람이고 아무리 도덕적인 사람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 나라와 관계가 없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세상에 사는데 필요한 것일 뿐이다.

예수님이 베드로라는 흙에 당신 자신을 뿌리셨다. 제자들이라는 그 흙에다가 당신 자신을 뿌리며 거기서 당신 자신이 나오기를 원했다. 예수님은 자신을 뿌렸으니까 자신이 나오길 바라셨다. 다시 말하면 제자들이 예수님 자신으로 살아지게 되를 원하셨다.


사.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어서 살아감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신다고 말한다. 왜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는가?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시면서 왜 내 안에 계시는가? 또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데 왜 내 안에 계시는가? 바로 이것이 신약의 경륜을 따라서 생명으로 우리 안에 사신다는 뜻이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 안에 와서 사시는 방법이 있다. 씨로 뿌려져서 사신다. 말씀이 사람에게 뿌려졌다. 그 말씀이 그 안에서 자라나서 그것이 생명이 되어 자라나신다. 그래서 하늘에 계시지만 우리 속에 하나님이 사신다고 한다.

하늘에 계신 분이 우리 안에 오시면 하늘은 빌 게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렇지 않고 하나님께서 씨를 뿌리는 방법으로 우리 안에 살고 계신다. 그분 말씀이 씨가 되고 그 씨가 우리 안에 와서 자라나면 우리는 바로 그 사람을 산다. 그 그리스도를 살게 되기 때문에 ‘아! 그리스도가 사네, 이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네.’ 이렇게 말하게 된다. 지금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사신다.

사도 바울은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 그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다른 것에 관심 가질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주님 자신에게만 초점을 두어야 한다. 내가 어떻게 살고 행할 것인지 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어떻게 하면 내가 그리스도를 알 것인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주님께서는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하지 않으신다. 동쪽으로나 서쪽으로 가라는 말씀도 하지 않고 씨를 뿌리신다. 주님 자신을 알기를 원하고 계신다. 우리의 모든 관심과 초점이 그리스도에게로 집중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서 남편하고 싸우는 아내, 아내하고 싸우는 남편은 어떻게 하면 안 싸울 것인가 연구할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라는 것이다. 자기에게서 그리스도가 나오면 싸우지 않을 것이다. 자기에게서 그리스도가 나오면 싸울 필요가 없어진다.

주님께서는 씨를 뿌리고 있다. 무엇을 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지 않고 씨를 뿌리고 계신다. 주님 자신을 우리에게 뿌리고 계신다. 이것이 바로 신약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단지 우리 자신을 그냥 뿌리러 간다.

우리 자신을 뿌리면 그 사람 안에서 우리가 나온다. 그러면 나와 같이 살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그리스도 인격에 초점을 맞춰야 된다. 우리의 모든 관심은 그리스도에게 있다.

그리스도는 방법이 없으셨다. 그는 고유한 방법을 가지셨는데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다. 나무가 가지를 뻗는 것을 보면, 다 자기 생명으로 고유하게 뻗기 때문에 숲 속에서 그 많은 나무가 다 살아난다. 그 나무에게 동서남북으로 4가지가 정식으로 나야 하고 90도 각도로 뻗어야 한다고 정해 두면 그 나무는 수풀 속에서 살지 못한다. 다른 나무들이 많이 있는데 무슨 수로 그렇게 살 수 있겠는가? 그 나무는 그 나무 자체가 생명의 방법을 가지고 있다. 나무는 햇빛이 오는 쪽으로 뻗어간다. 그래서 산림 속에 들어가면 그 많은 나무들이 다 각기 햇빛을 받아먹으며 산다. 이것야말로 생명의 고유한 방법이다.

예수님은 단지 자기 자신을 뿌렸다. 우리도 단지 자신만을 뿌릴 뿐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뿌려 놓으면 다른 것이 나타날 수 없다. 우리가 방법을 배제하려는 까닭은 방법이 많은 유혹을 가져 오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참 잘 될 텐데.’하는 것이 많다. 방법은 반드시 사탄도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탄이 그 안에 작용을 해서 하나님의 일처럼 하면서 자기 일을 만들어 낼 수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방법을 배제하려 한다.

예수님 자신은 어떤 방법도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바가 없으시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뿌리는 것이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이셨기 때문이다. 다른 일을 하심이 아니요 자기를 뿌리셨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무슨 방법으로, 어떻게 하라고 할 필요가 전혀 없으셨다. 단지 자기를 뿌리고 거기서 자기를 거두기를 원했을 뿐이다. 우리도 그렇게 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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