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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어라, 그래도 살아 있어라 _ 마26:69~27:10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14.04.20|조회수304 목록 댓글 1

가룟 유다의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께서 이상한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0:28) 다윗의 후손이라면, 예수는 왕처럼 통치해야 합니다.(삼상8:11~17) 왕이 되어 통치할 생각을 않고 종이 되어 죽기까지 섬기겠다니...

 

가룟 유다는 예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를 앞세워 새로운 세상을 세우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다윗의 후손이라 불렀거든요. 어용정치가 헤롯을 몰아내고, 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원하는 사람들과 함께 예수를 왕으로 옹립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고 싶었습니다.

 

예수가 이상한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 가룟 유다의 마음은 흔들렸습니다. 심지어 예수는 스스로를 다윗의 후손이 아니라고 합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22:45)

 

흔들리던 가룟 유다, 마침내 예수를 배반합니다. 노예의 몸값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에게 받고 배반을 준비합니다.(26:14~15;21:32)

 

체포된 예수가 대제사장들이 주관하는 산헤드린 법정에 서더라도 문제되진 않을 것입니다.(26:59~60) 예수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내세우진 않았기 때문입니다.(10:18) 가룟 유다는 새로운 출발을 위해 약간의 돈이 필요했을 뿐, 예수에게 치명적인 위해를 가할 마음은 없었습니다. 헌데 상황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로마 법정으로 인도한 것입니다.(27:2) 가룟 유다는 예수가 로마 제국을 향하여 칼을 뽑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를 배반한 것인데,(26:52) 예수가 로마 법정으로 인도되고 있습니다. 로마를 향한 반역죄로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힐 것입니다. 이건 아닙니다.

 

이건 가룟 유다가 예상치 못한 일입니다. 괴로웠습니다. 정치적으로 같은 길을 갈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예수는 좋은 사람입니다. 배반감을 못 이겨 예수를 팔아넘겼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가 죽어 마땅한 사람은 아닙니다. 때늦은 후회가 가룟 유다를 덮쳤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를 판 것을 뉘우쳤습니다.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27:3~4) 부끄러웠습니다. 미안했습니다. 착한 사람을 죽음으로 밀어 넣었다는 자책감에 유다는 괴로웠습니다. 부끄러움과 미안함과 자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유다는 극단적 선택을 합니다.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27:5)

 

학생들을 인솔하여 세월호에 탔다가 침몰하는 배에서 구조된 교감선생님이 소나무에 목을 맸습니다. 화장을 해서 아이들이 갇혀있는 바다에 뿌려 달라 유언하셨답니다. 아이들에게 미안했고, 선생인 것이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해서 괴로웠을 것입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운 게 사람인데, 차고 깊은 물에 학생들을 남겨두고 온 선생님의 괴로움을 어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살아있는 것을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도 부끄럽고 미안하고 괴로워서 살아있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스승을 세 번 부정하고, 스승의 이름을 저주했던 베드로는, 구차하게 살아갑니다.(26:74) 스승을 부정하고, 또 부정하고, 다시 부정하다가 심지어 스승의 이름을 저주한 베드로의 죄질은 가룟 유다의 것보다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26:69~74) 베드로라고 왜 부끄럽지 않았을까요. 베드로라고 왜 미안하지 않았을까요. 베드로라고 왜 괴롭지 않았을까요.(26:75) 부끄럽고 미안하고 괴롭지만, 베드로는 구차하게 살았습니다.

 

우리 속담에 눈물은 아래로 흐르고 숟가락은 위로 올라간다하지요.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21:3) 베드로는 부끄럽고 미안하고 괴로웠지만 물고기 잡아먹으며 구차하게 살았습니다.

 

나는 인간적으로 가룟 유다가 더 좋습니다. 목숨을 버림으로 책임질 줄 아는 가룟 유다가 인간적으로 더 끌립니다. 가룟 유다와 비교할 때, 베드로는 구차해 보입니다. 그러나.

 

구차해 보이는 베드로의 삶, 이것이, 믿음입니다. 부끄럽고 미안하고 괴롭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나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 그래서 구차하게라도 사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가룟 유다는 자기의 양심으로 스스로를 바라보았고, 시몬 베드로는 하나님의 눈으로 스스로를 보았습니다.

 

내가 나를 볼 때 구차하지만, 구차하게라도 살아야 합니다. 물속에 갇혀있는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담요를 들고 서 있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부끄럽고 미안하고 괴롭지만 살아야 합니다. 살아서, 남아있는 자들을 살려야 합니다. 살아서, 부끄럽고 미안하고 괴로운 사람들을 하나님의 눈으로 응시하며 살아야 합니다.

 

살아남아, 죽은 아이들이 부활하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27:52~53)  살아있으세요. 미안하고 괴로워도, 구차해도 그래도 살아 있으세요. 제발.

 

 

 

첨부파일 140420_민들레주보.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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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이상혁 | 작성시간 14.04.20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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