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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_ 롬7:14~8:11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14.05.18|조회수108 목록 댓글 0

사람은 쇠하고 무너지는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삽니다. 배가 고프고, 쾌락을 찾습니다. 그도 그래야 하는 것이 육신의 욕구가 해소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식욕이면 채워야 하고, 성욕이면 쏟아내야 합니다. 때론 채우고, 때론 쏟아내며 연명되는 게 육신입니다.

 

식욕을 채우고 성욕을 쏟아내며 치러야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요즈음 청년들을 3포 세대라 부른답니다. 연애를 포기하고, 결혼을 포기하고, 출산을 포기하는 세대랍니다.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사는 것은 고단한 과정입니다.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에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3:17~18)

 

모든 사람이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사는데, 어떤 이는 많이 먹고 어떤 이는 적게 먹습니다. 식사량이야 큰 차이가 있겠습니까만, 버는 돈과 지닌 돈의 숫자가 다릅니다. 모든 사람이 그 소욕대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소욕을 다 이루는 삶을 보통은 성공이라 합니다.

 

우리나라를 삼성공화국이라 부르기도 하지요. 비아냥대는 비판입니다만 삼성의 영향력이 강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표현이지요. 삼성그룹에 속한 사람들은 소위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정점에는 그룹 총수인 이건희 회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연 300조원의 이익을 내는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육신도 무너지나 봅니다. 심근경색으로 응급실에 실려 간 이후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공한 육신도 점점 쇠해가다가 마침내 무너집니다.

 

죽음에 대한 질문을 받습니다. 저는 죽음에 관해 말할 줄 모릅니다. 죽음은 제게도 두려운 것일 뿐, 경험하지 못한 것을 말할 순 없습니다. 제가 직접 경험하지 못했어도, 경험한 사람의 이야기를 빌려 말 할 때 있지만,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은 말이 없어, 저는 죽음을 경험한 사람의 말을 빌려 말할 줄도 모릅니다. 부활의 신비를 나는 아직 체득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입니다.

 

부활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육신의 소욕을 위해 애쓰는 것이 지나쳐, 권력 앞에 비루해지기도 하고, 돈 앞에 치사해지기도 합니다. 권력 앞에 비루해졌을 때 권력이 드리워주는 그늘보다 시원한 게 없습니다. 돈 앞에 치사해졌을 때 돈이 안겨주는 안정감보다 편안한 게 없습니다. 인간은 비루하고, 인간은 치사하고, 인간은 던적스럽다. 이것이 인간의 당면문제다. 시급한 현안문제다(김훈,공무도하)

 

나는 두렵습니다. 육신을 입고 사는 까닭에 두렵습니다. 비루하고 치사한 이 육신을 입고 살다가 마침내 죽게 되는 이 육신 때문에 나는 두렵습니다. 육신의 소욕을 다 이룬다 해도 이 육신이 점점 쇠해가고 마침내 무너질 것을 알기에 두렵습니다. 육신의 소욕을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 이룰 수도 없어 늘 기도합니다. 기도하며 탄식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가 되었습니다.(370)

 

이것이 인생입니다. 내 육신이 사망의 몸이라는 것, 이것이 인간의 현실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당면문제입니다. 이것이 시급한 현안문제입니다.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3:18~19) 욕구를 채우며 욕구를 쏟아내며 살다가 사람은 마침내 흙으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당면 문제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하든 죽음을 향하여 우리 인생이 정조준되어 있다는 것, 이것이 시급한 현안문제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레오나르도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통해 사망의 시간을 앞둔 예수님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예수님의 오른손은 빵을 집기 위해 손바닥이 아래를 향하고, 왼손은 하늘을 향해 펴져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선이 빵을 집으려는 오른손이 아니라, 아무 것도 쥐지 않고 하늘을 향해 펴져있는 왼손을 향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쥐지 않은 왼손바닥을 내려다보는 얼굴은 다소 슬퍼 보입니다.(26:17~29)

 

빵을 집는 손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못 박힐 손을 보며 사는 것, 쥔 손이 아니라 편 손에 눈을 두는 것, 이것이 부활입니다.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요 하늘로 올라가는 삶, 이것이 부활입니다. 육신의 소욕을 따르지 않고 성령의 소원을 따라 살기로 결단하는 것, 이것이 부활입니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것, 이것이 부활입니다.(8:4)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 이미 부활을 사셨습니다. 부활은 죽음 이후에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지금부터입니다. 죽음, 그 두려움에 눈 돌리지 않고 기도하며, 못 박힐 손을 응시하며 사는 것, 이것이 부활입니다.

 

세월호 양대홍 사무장이 시신으로 가족에게 돌아왔습니다. 부인과 마지막 통화를 하며 아이들 구하러 가야한다고, 수협 통장에 있는 돈 아이 등록금으로 쓰라고 말했답니다. 우왕좌왕하는 다른 직원을 씽크대로 받침대 만들어 먼저 올려보내고, 물이 목까지 차오르는 식당칸에 남아 아이들을 찾으러 물 속으로 들어갔답니다. 왜 두려움이 없었겠습니까? 그도 죽음이 두려웠고, 남은 자들을 생각하며 슬펐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령께서 양대홍 사무장을 감쌌기 때문에 그는 흑암과 혼돈의 물 속으로 들어갔던 겁니다.

 

육신의 소욕은 내가 사는 것이요, 성령의 소원은 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다가 죽는다해도 다시 살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성령의 소원을 따라 살다가 죽는다 해도, 다른 사람을 살리며 사는 것, 이것이 부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두려움을 피하지 않고, 두려움 속으로 들어가 오히려 생명을 살리는 삶, 죽어도 의인되어 사는 그 신비한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우리가 갖는 두려움은 기도 제목이기도 합니다.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두려움을 제목 삼아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성령을 입혀 주십니다. 육신의 소욕을 감추고 성령의 소원을 따라 살게 하십니다.

 

그렇게 부활을 살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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