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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가 밥 먹여 줍니다 _ 욥28:1~28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14.08.17|조회수266 목록 댓글 1

‘국익(國益)’이라는 가치는 모든 논의를 삼켜버리는 블랙홀입니다. 무엇을 하든 ‘국익’에 부합하는지 여부만 따지는 게 세태입니다. 반복되는 세월호 이야기 때문에 경제가 침체되어 있다고 말하는 자들도, 그 생각이 맞든 그르든 결국 국익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국가의 경제가 어린 생명들보다 더 우월한 가치라는 겁니다. 경제가 생명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은 섬뜩합니다. 보통 사람을 부모로 둔, 평범한 아이들의 생명은 국가의 이익보다 하위 개념이라고 말하는 잔인한 통치자들이 있습니다.

 

양나라 혜왕이 맹자에게 물었답니다. “선생께서 천 리를 멀다 하지 않고 오셨으니 장차 내 나라에 어떤 이익이 있겠습니까?” 양나라는 서쪽의 진나라, 남쪽의 초나라, 동쪽의 제나라로 둘러싸여 있는 작은 나라였으니 당장 현실적인 국익이 절실했겠지요. 이에 대한 맹자의 대답이 싸늘합니다. “왕은 하필 이익만을 말합니까. 인(仁)과 의(義)가 있을 뿐입니다... 왕이 ‘내 나라를 어떻게 이롭게 할까’ 궁리하면 대부들은 ‘내 집안을 어떻게 이롭게 할까’ 궁리하고, 서민들은 ‘내 몸을 어떻게 이롭게 할까’ 궁리하겠지요. 위아래가 모두 이익만을 취하다 보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입니다.”(정석구 칼럼 참조) 통치자가 국익을 우선한다면, 그 나라는 위태롭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익(利)을 따지기보다 정의(義)를 우선합니다. 정의에서 ‘의(義)’자를 파자하면 나(我) 위에 양(羊)이 있습니다. 내가 양을 어깨에 메고 있는 모양입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가 생각납니다. 푸른 목초지에 있는 아흔 아홉 마리를 포기하고라도, 길을 잃고 골짜기에 있는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목자의 선택이 바로 정의(正義)입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눅15:4~7)

 

양에게서 이익을 취하려는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의 털과 젖을 저울에 매달지만, 양의 이름을 아는 목자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자기 어깨에 멥니다. 양을 보며 털과 젖을 떠올리면 이익을 좇는 것이요, 양 한 마리라도 귀한 생명임을 안다면 정의를 따르는 것입니다.

 

무리에서 이탈된 한 마리를 번거롭다 생각하는 것이 악(惡)이요, 아흔 아홉 마리가 주는 살뜰한 이익을 포기한 채 한 마리의 약함을 돌보는 것이 선(善)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롬16:19) 하나님은 살뜰한 아흔 아홉 마리를 지키는데 미련하고, 번거로운 한 마리를 찾는데 지혜로우라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정의보다 이익을 앞세웁니다. 사람은 악한 데는 지혜롭고 선한 데는 미련합니다. 이익이 되는 은과 금을 얻기 위하여 바위를 뚫고 산을 뿌리까지 뒤엎지만, 정의롭기 위해 갖추어야할 지혜와 명철은 도무지 어디 있는지도 모릅니다.(욥28:1~12)

 

제2롯데월드를 세우는데 이집트 피라미드의 설계도 따위 참고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이익에 관하여 고대 이집트인들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그러나 이집트의 총리였던 요셉같이 ‘명철하고 지혜있는 사람’은 여전히 희소합니다.

 

우리는 명철과 지혜에 관하여 고대 이집트인들보다 탁월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더 못합니다. 피라미드보다 훨씬 큰 건축물을 세우지만, 지혜롭고 명철한 사람 요셉을 지도자로 세우진 못합니다. 맹자의 말마따나 내 나라를 이롭게 하고, 내 집을 이롭게 하고, 내 몸을 이롭게 하는 데에만 정신 팔려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이익을 내는 데는 피라미드가 무색할 만큼 진보해 왔으나, 정의를 실행하는 데 있어선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입니다.

 

99%의 무리에게 버림받아도 1%의 약자를 살피는 것이 정의입니다. 1%의 약자를 포기하고 99%의 지지를 받는 것이 이익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익보다 정의입니다. 잃어버린 1%를 찾아내 더불어 살려면 지혜와 명철이 필요합니다. 지혜와 명철 없이 골짜기를 헤맨다면 함께 길을 잃어버리기 십상입니다. “하나님이 그 길을 아시며 있는 곳을 아시나니...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욥28:23,28)

 

정의가 밥 먹여줍니까? 정의가 밥 먹여 줍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정의를 구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십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6:34)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란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내일이 염려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개역성경에서는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로 의역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 원래 표현은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라 되어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긍긍하며 기도하는데, 기도하는 중에 제 마음에 이런 울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내일이 염려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되느냐? 나도 니가 염려하는 게 이해가 안된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이 염려하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인 겁니다. 내 이성으로, 내일이 염려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 것과 같은 거지요.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기에 사람이 염려한다는 것은 엄청난 모순인 겁니다. 하나님인 내가 있는데, 도대체 왜 사람들이 염려한다는 건지 이해하실 수가 없는 겁니다.

 

살뜰한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이 제공할 수 있는 털과 젖을 포기하고, 비루먹고 약하디 약한 양 한마리를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오는 의인이 되는 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사실상 포기하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약해 빠진 양 한 마리가 내놓을 털과 젖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의는 가난을 부릅니다. 가난한 의인은 염려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정의를 행하는 사람도 먹고 살아야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계산을 합니다. 이익을 우선하는 사람은 양 아흔 아홉마리를 계산합니다. 정의를 우선하는 사람은 양 한 마리를 계산하면 될까요? 그러면 안됩니다. 양 한마리를 계산한다면 먹고 살 수 없습니다. 정의를 행하고자 하면 하나님을 계산하면 됩니다. 양 아흔 아홉마리를 계산하는 것은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계산하는 것은 정의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먹고 살려면 셈에 밝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계산한다면 정의가 타산에 맞습니다. 아흔 아홉 마리 양들이 먹이고 입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먹이고 입히십니다. 하나님을 계산한다면, 정의가 이익입니다. 정의가 밥 먹여 줍니다.

 

 

첨부파일 140817_민들레주보.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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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anna | 작성시간 14.08.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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