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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Way _ 창13:1~18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14.09.21|조회수144 목록 댓글 0

삼촌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위해 좋은 땅을 양보합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13:9) 조카 롯이 ‘물이 넉넉’하여 ‘여호와의 동산’같고 애굽 땅’같은 ‘소돔’을 점찍자, 아브라함은 ‘상수리 수풀’을 찾아 들어갑니다. 아브라함이라고 왜 ‘물이 넉넉’하고 ‘여호와의 동산’같은 땅에서 살고 싶지 않겠습니까. ‘애굽 땅’처럼 풍요로운 땅이 싫을 리 없지요.(창13:10)

 

아브라함이 선택한 땅은 가나안 땅이었습니다.(창13:12) 가나안 땅은 상수리나무로 덮여 있었습니다. ‘산과 골짜기’로 이루어진 상수리 나무 숲이었습니다.(신11:11) 가나안 땅은 농사짓기에 부적합한 땅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그래서 가난한 땅이었습니다. 다람쥐라면 모를까, ‘상수리 수풀’ 골짜기에서 뭘 먹고 살겠습니까.

 

아브라함은 땅을 본 게 아니라 하늘을 보았습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거기가 어디이든 하늘 아래이기 때문입니다. 거기가 어디이든 하늘 아래라면 하늘이 샘 근원이 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거기가 협곡이라 하더라도 하늘 아래에 있는 땅이면 바벨탑보다 안전할 것입니다.(창11:4) 아브라함은 당대 최강제국 바벨론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았지만 바벨론도 순식간에 무너지는 걸 경험했습니다.

 

거기가 협곡이라 하더라도 하늘 아래에 있는 땅이면 애굽에서처럼 비루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들어갔었고, 아내 사라를 누이로 속여 애굽 왕의 첩으로 내주려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의 포주가 되어 사람들에게 창녀로 내주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비루한 인생을 살아야했습니다.(창12:13)

 

바벨론의 강대함은 불안했고, 애굽의 풍요함은 비루해야 누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는 말 속에는 세상 어디에 간들 더 나은게 있을까 하는 냉소도 담겨있지 싶습니다.

 

거기가 어디이든 하늘 아래입니다. 좌도 하늘 아래요, 우도 하늘 아래입니다. 바벨론도 하늘 아래요, 애굽도 하늘 아래입니다. 도시도 하늘 아래요, 수풀도 하늘 아래입니다. 세상을 향한 냉소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아브라함 마음 속엔 공생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대한 냉소에 희석되긴 했지만, 하나님을 향한 믿음 또한 여전히 있었습니다. 거기가 어디이든 하늘 아래라면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스밀 것입니다.(신11:11) 애굽처럼 나일강이 흐르지 않아도, 여호와의 동산처럼 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가 흐르지 않아도, 거기가 하늘 아래라면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땅으로 흐를 것이라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롯보다 미련해서 셈을 못하는 게 아니라, 샘 근원이 하늘이 있다고 믿은 겁니다. ‘상수리 수풀’에선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애굽 땅을 관통하는 나일강을 대신할 것입니다. ‘이른비와 늦은 비’가 있어 산과 골짜기에서도 작물이 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비, 늦은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또 가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신11:14~15)

 

땅을 바라본 롯은 ‘도시’에 머물렀습니다.(창13:10) 롯이 ‘도시’에 머물렀다는 것은 떠나왔던 ‘갈대아인’의 도시 ‘우르’로 돌아가는 것과 다름없는 선택이었습니다. 떠나온 곳으로 다시 회귀한 셈입니다. 도시에서 롯은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찬탈하려는 사람들과 다름없는 왕들과 다시 연맹을 맺어야했습니다.(창11:4;14:4)

 

하늘을 바라본 아브라함은 ‘수풀’에 거주했습니다.(창13:12,18) 아브라함이 수풀에 거주했다는 것은 ‘도시를 건설’하여 강한 세력을 구축하려는 ‘가인(Cain)의 후예들과 거리를 두는 선택이었습니다.(창4:17;11:8) 가인의 후예들이 만들어낸 문명·문화에 저항하는 것이었습니다. 무너져버린 바벨론과 여전히 건재한 애굽 땅 어디에도 속하지 않기로 결단한 것이었습니다. 롯은 찾는 이가 많은 길을 선택했고, 아브라함은 찾는 이가 적은 길을 선택했습니다.

 

롯에게 위험이 닥쳤습니다. 도시는 가인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가인이 디자인한 것이었는데,(창4:17) 그런 도시를 선택한 롯에게 위험이 닥쳤습니다. 롯이 속한 도시 동맹이 전쟁에서 진 것입니다.(창14:12) 견고해서 안전해 보이는 성읍은 결코 안전하지 않습니다. 해변가 모래성의 운명과 세상 모든 도시의 운명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롯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과 함께 전쟁 포로가 된 롯을 구해냅니다. 수풀에 거주하는 아브라함이 도시에 머물렀던 롯을 구원합니다.(창14:14~16) 아브라함이 롯을 구원하는 사건은, 자연이 문명을 구원함이요, 약한 자가 강한 자를 구원함이요, 미련한 자가 영리한 자를 구원함이요, 피살자 아벨이 살인자 가인을 구원함입니다.

 

하나님은 거탑을 무너뜨리심으로 바벨론에서 짓눌린 아브라함 가족을 구원하셨고, 재앙을 내리심으로 애굽에서 비루한 아브라함 부부를 구원하셨습니다. 구원하셔서서는 높은 땅 바벨론도 아니요, 넉넉한 땅 애굽도 아닌, 낮고 낮은 골짜기로 인도하셨습니다. 찾는 이 없는 땅으로 구원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합니다. 예수를 믿어, 예수를 따르는 길은 ‘좁고 길이 협착’합니다. 아브라함이 갔던 길도 좁고 협착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정의롭다 하셨습니다.(창15:6)

 

‘내가 걷는 이 길이 혹 굽어보이는 수가 있어도’ 내 길은 하늘 아래에 있습니다. 내가 사는 여기가 좁고 협착하여도 내 가족은 하늘 아래에 있습니다. 하늘 아래에 있으니 하늘이 샘 근원이 되고, 하늘에서 내려온 샘 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마침내 하늘에 닿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좁은 문으로 난 길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롯의 선택이 내 욕망을 반영하지 싶습니다. 그래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롯이 자기 욕망을 따라 찾아들어간 소돔성도 하늘 아래요 아브라함이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찾아들어간 애굽 땅도 하늘 아래라는 사실입니다.  욕망을 배설하기 위해, 비루해도 배부르기 위해 찾아 들어간 땅도 하늘 아래여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진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하늘 아래 소돔성에 사는 롯과 애굽 땅에 살았던 아브라함을 구원하셨습니다.

 

바벨론과 애굽에서 구원받은 아브라함이 찾아 들어간 상수리 수풀로 이루어진 산과 골짜기 역시 하늘 아래입니다. 거기 하늘 아래에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만 의존해야 하는 거기 하늘 아래에서 아브라함은 구원을 이루어 갑니다. 구원받은 아브라함은 이제 구원을 이루어갑니다.

 

세상사람 다 가도 가지 말아야 할 길이 있고, 나 혼자서라도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가지 말아야 할 길 가지 않고 가야 할 길만 간다면 오죽이나 좋겟습니까. 보통 우리는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가는데 익숙합니다.

 

다시 기억해야 할 것은 가지 말아야 할 길도 하늘 아래요, 가야 할 길도 하늘 아래라는 사실입니다. 거기가 어디였든 하늘 아래였고, 지금 어디이든 여전히 하늘 아래에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가지 말아야 할 길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 구원받을 것입니다. 구원받았거든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라도 무소의 뿔처럼 가야겠습니다. 예수님 가신 길입니다. 좁은 문으로 난 길입니다. 구원받았거든,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한 번 뿐인 인생 욕망을 따르지 않고 비루함에 빠지지 않고, 내 길 가게 하소서. 하늘 아래 쭉뻗은 내 길이 예수님의 길과 닿아 영원한 인생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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