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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나는 혁명의 대상입니다 _ 행16:11~40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15.06.21|조회수118 목록 댓글 0

로마의 정치범 수용소를 지키는 간수에게 ‘주님’은 로마 황제입니다. 간수에게는 로마 황제야말로 세계 평화의 근원입니다. 간수는 사람을 두 분류로 이해합니다. 로마 황제에게 충성하면 의인이요, 로마 황제에게 저항하면 죄인입니다.

 

또 간수에겐 가족이 있습니다. ‘집’, ‘가족’, ‘집안’등 간수와 함께 엮여 소개되는 사람들입니다.(행16:31~34) 황제에게 충성하고, 황제에 저항하는 불령선인들을 가두고 지키는 일은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라도 꼭 해야 하는 일입니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로마 황제가 제공한 일자리가 있어 간수는 먹고 삽니다. 로마 황제가 있어 간수와 그 가족들이 구원받았습니다. 감옥을 지키는 것은 가족의 생명이 달린 신성한 일입니다.

 

 

Prise de la Bastille et arrestation du gouverneur M. de Launay, le 14 juillet 1789.

 

 

 

간수가 일하는 ‘깊은 옥’은 정치범들이 갇혀 있는 곳입니다.(행16:24) 소위 ‘풍속'을 헤치는 사람들이 갇혀 있는 곳입니다.(행16:21) 감옥은 로마의 풍속을 유지하는 최후의 보루입니다. 그래서 감옥은 어떤 저항에도 무너지지 않는 국가의 견고한 체제를 상징하는 곳입니다. 감옥이 무너진다는 것은 로마의 체제가 무너지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프랑스에서도 바스티유 감옥을 무너뜨리면서, 혁명이 시작됐지요. 옥문이 열리는 것은, 체제가 심각한 위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체제가 유지되자면 옥터가 흔들려선 안되고, 옥문은 닫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탈옥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아니 탈옥이 일어난 줄 알았습니다.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음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행16:16)

 

옥문이 열리고 차꼬가 풀린 것이 지진 때문이었다고 상관에게 설명한다면, 간수는 내부공모자로 몰릴 것입니다. 탈옥을 막지 못하고 허위보고까지 올린 간수는 감히 로마 황제에게 저항한 정치범들과 공범이 되는 것입니다. 감옥에만 지진이 일어났고, 상관은 느끼지 못한 심각한 지진 때문에 갇힌 자들이 탈옥했다고 보고한다면, 그 말을 누가 믿겠습니까. 간수 본인뿐만 아니라, 어쩌면 가족들에게도 수사가 뻗칠 수 있고, 얼마든지 혐의는 씌워질 것입니다.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행16:27)

 

자결하는 것 외에 간수는 무고를 입증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자결하는 것 외에 가족을 지킬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간수가 칼집에서 칼을 뽑으려는 순간, 큰 소리가 들렸습니다.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행16:28)

 

감옥이 열렸는데 ‘죄수’들이 탈옥하지 않은 겁니다. 지금, 간수를 구원한 것은

 

감옥을 세운 로마 황제가 아니라,

감옥을 나서지 않는 죄수들입니다.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행16:29~30)

 

간수에게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죄수가 선생이 되었고, 죄수에게 엎드려 하명을 기다립니다. 죄수가 무슨 말을 하든 순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혁명은 감옥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엎드린 간수에게 바울이 혁명의 제1강령을 내립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

 

주 예수를 믿음은, 말 그대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주님이신 예수가 온 세상을 통치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는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로마 황궁에 있는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아니라, 가이사랴에 주둔한 총독이 아니라, 황제가 임명한 총독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님이 온 세상을 통치하신다고 믿는 것, 이것이 바울이 간수에게 내린 혁명 정부의 제1강령입니다.

 

로마 입장에서, 십자가로 처형한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이들이 여전히 있다는 것은, 제국을 지배하는 데 있어 여간 걸리적거리는 게 아니겠지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고, 사형에 처했던 이유입니다. 로마 시대에 예수님을 주님이라 고백하는 것은 악한 권력에 저항한다는 정치적 노선을 밝히는 것입니다.

 

또, 경제적으로 저항하는 것입니다. 먹고 살길이 막힌다 해도, ‘수익의 소망’을 실현해주는 ‘귀신’을 좇지 않고 쫓아내는 것입니다.(행16:16~19) 귀신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돈에 사로 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머리둘 곳 없는 예수를 따르는 것은, 북아프리카에서 빼앗아온 곡식과 전쟁 노예들의 노동으로 유지되는 로마 경제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돈이 나를 사로잡고 있다면, 나는 귀신들린 사람입니다. 돈에 사로 잡혀 귀신들려 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머리 둘 곳 없으셨던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따릅니다.(눅9:58)

 

주 예수를 믿기 위해, 오늘도 나는 혁명의 대상입니다.

 

악한 권력의 그늘을 ‘푸른 초장’인 줄 알고, 돈에 매여 있으면서도 ‘쉴만한 물가’에 있다고 여기는, 나는 오늘도 혁명의 대상입니다. 혁명된 내가 가장이 될 때에야, 우리 집이 구원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혁명될 때, 나뿐만 아니라 내 집이 구원받습니다.

 

권력에 저항하면 죽을 것 같지만,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권력에 저항하고, 권력도 사람일 뿐, 하나님 앞에서만 엎드립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가 부활하셔서 통치하십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첨부파일 150621_민들레주보.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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