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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_ 행22:1~14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15.07.05|조회수83 목록 댓글 1

바울은 ‘가마리엘의 문하’에서 ‘엄한 교훈’을 받았습니다.(행22:3) 당대 최고의 석학 가말리엘은 힐렐학파의 수장이었고 유대 전승에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연히 유력한 제자들을 거두어 가르쳤습니다. 가말리엘의 가르침을 받은 바울은 ‘열심이 특심’하여 사람들을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행22:4)

 

가말리엘 문하에서 최고의 학문을 전수받은 바울은 확신을 갖고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전통과 학문에서 비롯된 자기 확신은 하나님의 뜻으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데에 이르렀습니다. 전통에 대한 확신, 그리고 자기 확신의 과잉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전통과 학문을 가르치는 최고의 석학 가말리엘은 사람을 박해하고 죽일 수 있는 바울을 길러냈습니다.

 

 

미켈란젤로, <바울의 회심>, 1542~1545

 

 

 

바울이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체포하려고 길을 가다가 낙상하여 눈이 멀게 되었는데, ‘아나니아’라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아나니아라는 이름 앞엔 특별한 수식이 없습니다. 가문이나 직위가 소개되지 않습니다. 아나니아는 다만 ‘제자’입니다.(행9:10) ‘제자’ 아나니아는 ‘경건한 사람으로...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사람이었습니다.(행22:12) 경건한 사람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사람입니다.(약1:27) 배움의 깊이는 알 수 없으나, 행함의 넓이가 넉넉했던 경건한 아나니아가 바울을 만나 이렇게 말했습니다.(행22:13)

 

“다시 보라.”(행22:13)

 

“아나니아가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행9:17~19)

 

이름 외에 전해지는 것 없는 아나니아를 만나, 바울은 다시 눈을 뜨게 되고 세례를 받고 다시 태어났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경건한 제자 ‘아나니아’에게서 사람을 사랑하는 사도 바울이 태어났습니다.

 

세상은 가말리엘같은 사람을 높이 세우지만, 하나님은 아나니아같은 사람을 제자로 부르십니다. 높은 데서 사람을 가르치는 스승보다, 낮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제자가 복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높아져도 ‘하늘 아래 산’이지만, 겸손히 듣고자 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게 됩니다. 가말리엘의 가르침은 결국 사람을 죽였고, 아나니아의 순종은 사람을 살리는 기적을 낳았습니다.

 

가말리엘이 전승해준 학문은 바울의 눈을 가리는 비늘이었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던 아나니아의 두 손은 바울의 눈을 가리던 비늘을 벗겨냈습니다. 바울의 눈을 뜨게 해 준 것은 위대한 학자의 이론이 아니라, 가문도 직위도 없는 제자의 두 손이었습니다. 쥐고 있던 것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펼 줄 아는 손 말입니다. 쥔 손 말고 편 손이 ‘안수’에 적합한 손입니다. 고아와 과부를 살필 줄 알았던 경건한 아나니아의 ‘안수’로 바울은 다시 보게 되었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행22:16) 세례는 노아 시대에 있었던 홍수 심판을 추체험하는 것, 즉 죽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고 합니다. 비늘이 벗겨진 사람은 어제의 확신으로 오늘을 살지 않습니다. 날마다 죽고 날마다 새로운 깨달음을 위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날마다 세례를 받습니다. 날마다 예수님 가신 길을 가기로 결단합니다.

 

어제의 확신으론 오늘을 살 수 없습니다. 가말리엘의 이론을 반복 재생하여 어제의 확신으로 오늘을 살다보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교리와 사상과 이데올로기는 사람을 죽이기도 감옥에 가두기도 합니다. 어제의 것을 반복하려는 내 안의 앵무새를 죽이고, 오늘 주시는 성령의 깨달음에 나를 개방할 때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저들이 죄인이라는 확신으로 돌을 손에 쥐기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손잡아 주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어제의 확신을 중언부언하는 앵무새들의 기도를 받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원치 않는 만남이라도, 순종하며

 

손 내미는 아나니아를 ‘제자’라 부르십니다. 나는... 제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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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김영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7.05 제목은 미국 작가 '하퍼 리'의 책에서 빌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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