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하나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_ 사26:16~19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15.08.09|조회수144 목록 댓글 0

 

사람이 위대한 일을 할 때가 있습니다. 참 대단합니다. 솔로몬이 그랬습니다. 솔로몬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웠고, 성전을 중심으로 비로소 온 나라를 하나 되게 건국했습니다. 사울과 다윗 때에 느슨한 부족연맹체였던 것이 솔로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국가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솔로몬의 위대한 업적도 허무하다는 것을 압니다. 솔로몬이 건축했던 성전은 무너지고 없습니다. 그 성전 터에 성전은 재건되기도 했지만, 또 다시 무너졌습니다. 예수님말씀처럼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졌습니다. 지금 예루살렘 성전은 한쪽 벽만 남아 ‘통곡의 벽’이라 불립니다. 어떤 이들은 제3성전으로 복원하기를 원합니다만 그 또한 허무한 소망입니다. 세상에 보이는 어떤 것도, 제 아무리 위대한 것도 시간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위대함은 시간 속에 남아있을 때, 뿐입니다. 시간의 풍화가 눈에 띄지 않을 때에만, 사람의 위대함은 언뜻 드러납니다. 운이 좋게도 솔로몬은 위대한 일을 완수했고, 위대한 성전이 무너지는 걸 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이렇게 말합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자신이 건축한 예루살렘 성전도 우뚝하고, 성전을 중심으로 단일대오를 이룬 나라도 건재하건만 허무를 되풀이 말합니다. 왜일까요?


자신의 몸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일을 이룬 어떤 사람이라도 자기 육체가 쇠해지고 무너지는 걸 막을 순 없습니다. 깎이고 닳다가 마침내는 무너집니다. 클레오파트라도 늙었고, 진시황도 죽었습니다. 인생이란 참으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됩니다.


그래도 솔로몬은 운이 좋았습니다. 무너질 것일망정 세워보았으니까요. 부질없을망정 유명한 자 되었으니까요. 사라질망정 불꽃같이 살아보았으니까요. 나는 솔로몬이 부럽습니다. 한 번 뿐인 인생이요, 스러저가는 힘일지언정, 힘 있게 멋들어지게 살기를, 누구나 원하지요.


비교적 건실하게 분당에서 큰 교회를 이루신 목사님의 책을 읽었더랬습니다. 목사님은 좋은 분이시고, 교회도 지역과 교계에서 칭찬받고 있습니다. 소위 뜨는 교회의 유명한 목사님께서 쓰신 책입니다. 책 중에 이렇게 적혀있더군요. “하나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이 문장을 읽고 책을 덮었습니다. 제가 웬만해선 책을 중간에 덮지 않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책이라도 깡으로 끝까지 읽는 게 제 독서법입니다. 그런데, 그 책 읽기를 그만두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하셨습니다.”라는 문장을 읽고는 책을 덮었습니다. 어려운 문장은 하나도 없지만 덮은 책을 꽂혀있던 자리에 꽂아버렸습니다. 그럼 나는 뭔가 하는 뒤틀린 생각이 울컥 솟았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이 이룬 대다한 일을 ‘하나님께서 다 하셨’는데, 내가 하는 일엔 하나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신 건가. 서운하고 서러워서, 읽기를 관두었습니다.


솔로몬처럼 잘하고 싶지만, 안 되는 일은 안 되고 아무리 애써도 안 되는 때가 있습니다. 산고를 겪듯 수고해도 득도 익도 없을 때가 있습니다. 계획한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잉태하고 산고를 당하였을지라도 바람을 낳은 것 같아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세계의 거민을 출산하지 못하였나이다”(사26:18) 참 많은 이름들과 만났고 대화했고 기도했습니다. ‘해산의 수고’를 했다고 단언할 수 없지만, 해야하는 사랑의 수고를 피하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늘 결과는 ‘바람을 낳은 것’같습니다. 허무한 노릇이지요.


해산의 수고를 다하고도 바람을 낳은 것 같은 경험. 제각각 다들 있을 겁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그랬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유대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곧 닥칠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 선지자 이사야의 입을 통해 떨어지는 어떤 말씀도 위대한 일의 성취와 무관합니다. 선지자 이사야를 통한 말씀이 성취된다면 국경은 뚫릴 것이요 성전은 무너질 것입니다. 솔로몬 때엔 국경이 확장되었고 성전이 세워졌는데, 이사야 때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날 모양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해산의 수고를 다하지만, ‘바람을 낳는 것’같습니다. 이사야를 통해 일어날 소위 위대한 일은... 없습니다.



미켈란젤로, <천지창조>중 '아담의 창조', 1508~1512



그런 때에, 해산하는 수고를 하여도 바람을 낳을 뿐이었던 이사야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사26:19) ‘죽은 자들’과 ‘시체들’과 ‘티끌에 누운 자들’이란 심판과 멸망의 때에 실제로 죽은 사람들을 의미하면서, 또한 심판과 멸망의 때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소개하는 은유적 표현이기도 합니다. 앗수르에 항복해야 할지, 이집트에 원정을 청할지 갈팡질팡하며 주체적인 결정을 할 수 없는 지도자들과 무능한 지도자들 밑에서 가리산지리산 비틀거리고 있는 백성들이 바로, ‘죽은 자들’이요 ‘티끌에 누운 자들’입니다. ‘죽은 자들’과 ‘시체들’과 ‘티끌에 누운 자들’에게 이사야가 고성능 메가폰을 잡고 설교해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모래 날리는 바람 소리뿐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멸망과 심판을 알리기 위해 ‘벗은 몸과 벗은 발로’ 3년을 다녔을까요.(사20:2~3) 이사야는 애썼지만, 아무 것도 해내는 게 없었습니다. 해산의 수고를 하여도 바람만 낳을 뿐이었습니다.


때로,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는 것도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무위지도(無爲之道)라 하지요. 아무 것도 하는 일도 없고, 무엇도 되는 게 없는데, 그 또한 ‘길’일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없을 때, 사람이 하는 일이 막힐 때, 그런 때가 있습니다. 그런 시절이 있습니다. 참 깝깝한 시절이요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겠답니다. 옛날, 흙뭉치를 생기 도는 사람 아담으로 창조하셨던 것처럼, 죽은 자들을 살리겠다 하십니다. 마른 뼈들을 군대로 부르시는 것처럼 시체들을 일어나게 하십니다. 티끌에 누운 사람들을 깨워 노래하게 하십니다. 이슬이 땅을 덮듯 하나님의 생기가 땅에 스밀 때에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을 것입니다. 나는 애써도 아무 것도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다시금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십니다. 그래서입니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창조는 옛 아담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티끌에 누워있는 지금 여기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여태 바람을 낳았습니까? 내가 바람을 낳았거든 그가 ‘그물에도 걸리지 않고, 산에도 막히지 않는’ 사람 되길, 소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다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