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구라행진 _ 사35:1~10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15.08.30|조회수219 목록 댓글 0

 

1.


1909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의사이기도 한 포사이드 목사가 광주로 오던 길에 나병에 걸린 여자를 자신이 타는 나귀에 실어 왔습니다. 병원에 입원시키려 했지만, 다른 환자들이 반대해서 나병환자들이 모여 있는 ‘벽돌 굽던 가마 굴’로 환자를 옮겼습니다. 포사이드는 양복에 나병환자의 진물과 고름이 묻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환자를 들어 안아 옮겼습니다. 옮기다가 환자의 지팡이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환자를 안고 있던 포사이드가 동행하던 최흥종에게 지팡이를 집어 달랬답니다. 최흥종은 지팡이를 집어주지 못했습니다. 포사이드 선교사가 양복에 고름과 진물을 묻히며 나병 환자를 떠메 안고 있는 걸 보면서도, 최흥종은 고름과 진물이 말라붙어 있는 지팡이를 차마 집어주지 못했습니다. 





그때 지팡이를 집어주지 못했던 최흥종은 목사가 됐습니다. 광주 사람들은 나병 환자를 업고 광주천을 건너는 최흥종의 목사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나병 환자의 지팡이를 차마 집어주지 못하던 이가 나병에 걸려 걸을 수도 없는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 업고 걷는 것, 이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그래서 떼보지 않은 걸음을 걷는 것입니다. 만나기 꺼려졌던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만나기 꺼려졌던 사람과 함께 떼보지 않은 걸음을 함께 가는 길이 ‘좁은 문’으로 난 길입니다. ‘좁은 문’으로 난 길을 가는 사람에게 생명이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14)



2.


나병환자들은 치료를 받은 후에 갈 곳이 없었습니다. 마을에서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치료를 받아 완쾌가 되었기 때문에 병원에 머물 수 없고, 치료가 되어 병원에서 나와도 일상을 살 수 없는 병이 나병이었습니다.


당시 나병은 천형이었지요. 병에 걸리는 순간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라 여길만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했습니다. 바빌로니아 군대에 영토를 빼앗겼고, 노예가 되어 운하공사에 끌려갔고, 성전이 무너졌고, 성전 제기들은 바빌로니아 궁전에서 술잔이 되었습니다.(단5:2)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유대인들이 경험하게 될 심판을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아직 심판을 경험하기 전에 회복을 약속하셨고, 바빌로니아로 끌려갔던 백성들이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빌로니아에서 유대로 돌아오는 길은 광야와 사막 복판에 나 있습니다. 길이라 할 수 없을 만큼 위험하고 꺼려지는 길입니다. 차라리 계속 노예로 살면서 하나님의 심판이 지속되는 게 낫다고 생각할 만큼 유대로 돌아가는 길은, 가고 싶지 않은 길입니다. 물이 없는 땅, 승냥이와 사자가 어슬렁거리는 땅을 통과해야, 유대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가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이라면 그래도 가야할 길이 있습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노예가 아니어야 하고, 사람이기 때문에 떡으로만 아니라 뜻으로 살아야 합니다. 떡으로 배부른 노예들, 그래서 광야와 사막 길을 주저하는 유대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사35:7~10) 가면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할 것입니다. 가면, ‘메마른 땅이 기뻐’할 것입니다.(사35:1)


만나기 꺼려졌던 사람들과 떼보지 않은 걸음을 걷던 최흥종 목사가 또 길을 갑니다. 1932년, 최흥종 목사는 나병환자 150여명과 함께 광주에서 서울 총독부까지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구라행진’이었습니다. '구라'는 나병환자를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서울로 가는 길에 구라행진은 150명에서 400명으로 불어났습니다. 누구도 막지 못했습니다. 나병환자들과 최흥종 목사가 한반도를 강탈한 일본제국의 심장 총독부를 조준했건만, 일본제국의 경찰은 구라행진을 막아서지 못했습니다.


나병환자 150명이 행진을 할 때, 광주에서 서울까지 가는 길에 나병환자들을 받아 줄 여관이 있을 리 없지요. 환자들의 걸음이 빠를 리 없고, 단체 노숙하는 150명 환자를 반겨 줄 마을도 없었지요. 목숨 걸고 가는 길이었습니다, 구라행진은. 그랬는데, 목숨걸고 가는데 나병환자 150명이 400명이 되었습니다. 길에서 죽는 환우도 있었지만, 중간에 나병환자들이 합류하면서 숫자는 오히려 세 배 가까이 늘었습니다.


마침내 총독부에 도착하고, 총독 우가끼에게 ‘소록도에 있는 자혜원을 갱생원으로 대폭 확장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냅니다. 1945년 일본천황이 항복을 선언하기 13년 전에 나병환자들은 소록도를 점령하고, 먼저 독립을 경험했습니다.



3.


바빌로니아에서 노예로 태어난 유대의 자손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심판을 당한 셈입니다. 이것이 원죄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이런 원죄가 있습니다. 태어나는 게 내 권한과 자율이 아니었음에도, 뭇 사람들은 원죄를 껴안고 살아야 합니다. 나병환자들이 그랬듯, 바빌로니아에서 태어난 유대인들이 그랬듯,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으로 삽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태어난 대로 살지 말고, 거듭나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육으로 태어난 사람은 원죄를 떠안고 주저앉지만, ‘성령으로 난 사람’은 가보지 않은 길을 갑니다.(요3:8) 거듭난 사람은 노예로 살지 않고 ‘구속함을 받은 자’되어 바빌로니아의 집과 텃밭을 떠납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노예로 살지 않고 ‘속량함을 받은 자’되어 사막을 관통하며 사막에 흐르는 시내를 마십니다.(사35:6)


심판받은 것 같은 인생입니까. 아닙니다. 인생,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인생 끝날 얼마 남지 않아 그냥 이렇게 사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인생은 평생이 아니라 영생입니다. 오늘도 가야할 길이 있습니다. 거듭난 자가 가야할 길이 있습니다,


길에서 하나님 나라를 볼 것입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