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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 _ 사41:8~20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15.09.13|조회수120 목록 댓글 0

 

식민지에서 끌려온 노예들은 강제노역에 시달려야 했고, 운하 건설 현장에서 죽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버러지’같고 구더기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버러지처럼, 구더기처럼 죽음의 수를 계수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미 구더기가 슬고 있는 몸처럼, 살아있어도 산 게 아닌 사람들이 징용 노예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징용 노예들을 부르십니다.


“나의 종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사41:8~9)


바빌로니아 왕의 종을, 하나님의 종이라 부르십니다. 바빌로니아 관리들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벗이라 부르십니다.


구더기도 밟히면 ‘꿈뜰’ 한다지요. 밟힐 때마다 ‘꿈틀’하는 거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약하고 소심한 바빌로니아의 노예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시41:10) 참 믿기 힘든 말씀입니다. 바빌로니아의 위세가 여전하고, 노역 생활은 끝날 거 같지 않은데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말씀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성전의 붕괴를 목격했고, 마르둑 신상은 근동의 어떤 신보다 우뚝하고, 바벨탑 지구라트는 하늘에 닿을 듯한데, 하나님을 믿어야할까요.


믿음은, 높은 신상과 거대한 신전의 틈새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듣는 것입니다. 신상과 신전의 틈 바구니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게 은혜구요.


하나님은 신상과 신전에 그늘에 안주하는 ‘버러지 같은 야곱’에게 광야를 지나 폐허 위에 서라 하십니다.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사40:5) 광야를 지날 때면 골짜기도 건너야 하고, 산도 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골짜기를 돋우시고 산을 평지가 되게 하시겠다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골짜기를 돋우고 산을 평지로 만드시는 걸까요?


“보라 내가 너를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로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을 겨 같이 만들 것이라”(사41:15)


하나님은 ‘버러지’를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로 삼겠다 하십니다. 버러지로 하여금 광야에 길을 내겠다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버러지와 함께 하시니, 버러지가 가면 광야에 길이 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버러지’를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로 거듭나게 하시고, 새 길을 열게 하십니다.


버러지가 골짜기를 돋우고 산을 평탄하게 한다는 것, 아무리 되뇌어도 믿기 어려움 말씀입니다. 자신의 작음과 추함과 약함을 주야로 묵상하며, 밟힐 때마다 ‘꿈틀’하고 마는 버러지 주제에 무슨 광야에 길을 만들고 폐허에 나라를 재건한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허황하기 짝이 없게 들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허황한 말씀을 믿지 못하는 세대에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신상은 단단하고 신전은 등등한 세상에서, ‘겨자씨 한 알 만큼’ 믿음 갖기도 쉽진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땅엣 것을 무시할 수 없는 우리에게 겨자씨만큼이나마 보이는 것을 요청하시는 것, 야속한 면도 있습니다.


버러지가 골짜기를 돋우고, 산을 부숴 길을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버러지와 함께 하시면, ‘버러지’가 ‘새 타작기’가 됩니다. 하나님은 버러지를 통해 역사를 이끄십니다. 이것이 믿음이요 은혜입니다.


나는 누구일까요? 나는 ‘버러지’일까요,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일까요.


현실 세계에 높다란 신상과 신전의 그늘 아래 안주한다면, 구원은 없습니다. 우상 아래 군림하는 자들의 발길에 ‘꿈틀’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산과 골짜기로 곳곳이 막막한 광야로 몸을 던질 때, 구원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버러지같은 사람과 함께 하시고, 버러지를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산을 깎아내고, 깎아낸 산으로 골짜기를 돋우는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로 거듭나지 않으면,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요3:3)


나는 누구입니까? 여전히 ‘버러지’입니까, 거듭난 ‘새 타작기’입니까?


나는 우상의 그늘 아래에 있습니까, 광야의 폭염 속에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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