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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증 없는 사람들 _ 눅2:1~20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15.12.13|조회수173 목록 댓글 2

 

목자들은 주민등록증이 없습니다. 당시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가 주민등록(census)을 명하였을 때, 목자들은 들에서 양 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눅2:1,8). 양 떼가 있는 곳이 목자들의 집이요, 양 떼가 가는 곳이 목자들의 고향입니다.

 

양 떼가 가는 곳이 고향인 까닭에 목자들은 호적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제아무리 로마 황제라도, 주소도 고향도 없는 들사람 목자들을 정복하지 못합니다. 들사람 목자들은 정복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로마황제라도 들에서 양 틈에 자는 목자들을 정복하지 못합니다.

 

목자들은 로마황제처럼 세상을 정복할 만큼 유능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목자들은 로마 황제에게 정복당할 만큼 무능하지도 않습니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수 이후를 ‘로마의 평화(Pax Romana)'라 하지만, 로마의 평화는 가짜 평화입니다. 로마의 평화는 군사력에 의해 전쟁이 억제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니까요. 로마의 평화는 폭력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요, 유효기간이 있습니다.

 

들사람 목자들은 로마의 가짜 평화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들사람 목자들은 로마의 가짜 평화에 중독되지 않고 광야의 영성을 보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천사들이 들사람 목자들에게 진짜 평화를 선포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아우구스투스에게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로마 제국 때문에 평화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평화가 선포됩니다.

 

 

지오토, '목자들의 경배'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들사람 목자들이 아기 예수님을 처음 알현합니다. 양 틈에서 잠을 잘지언정 로마의 가짜 평화에 오염되지 않은 들사람 목자들이 여물통에 누인 아기 예수를 찾아냅니다(눅2:16). 그리고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에게 먼저 들은 말씀을 전해 드립니다(눅2:17).

 

그러고 나서 며칠 후, 별을 연구하는 동방의 박사들이 유대 왕이 태어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마2:7). 박사들은 당연히 궁전에 경사가 있는 줄 생각하고 네비게이션에 예루살렘을 찍고 왕의아들을 만나기 위해 떠납니다.

 

그러나 궁전에는 하늘이 세운 왕이 없었습니다(마2:3). 궁전에는 왕을 자처하는 헤롯이 있을 뿐, 진짜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은 없었습니다. 하늘이 정한 왕은 여염집에 계셨습니다(마2:11). 동방의 박사들은 잘못 짚었습니다. 박사들은 별의 운행을 이해할 줄 알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박사들의 연구하는 별보다 높고, 하나님의 말씀은 박사와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상식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양 틈에 자던 목자들은 별의 운행도 몰랐고, 상식적이지도 않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마음먹으면 권력자 헤롯을 만날 수도 있었습니다. 또 재산도 있어서 아기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합니다(마2:11). 그러나 박사들의 예수님 방문기는 허탈하고 건조합니다. 고가(高價)의 선물이 있을 뿐, 말씀도 없고 찬양도 없습니다.

 

마태복음은 동방박사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그들의 어리석은 네비게이션 검색을 첫 문장에 쓰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베들레헴에 나시매...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마2:1)” 동방 박사들 이야기에는 찬송도 말씀도 없고, 다만 박사들의 무지가 있습니다. 박사들의 무지는 엄청난 역풍을 일으킵니다.

 

 

지오토, '헤롯의 대학살'

 

 

박사들을 만난 헤롯이 두 살 아래의 사내아이를 모두 죽여 버리는 참극이 발생합니다(마2:16). 헤롯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친아들을 둘씩이나 죽였고, 임종 직전에는 후계자로 지목된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할 정도로 광기 어린 권력욕으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헤롯의 아들이 되기보다 그의 돼지가 되는 편이 낫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궁전 밖 재앙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양 틈에 자던 들사람 목자들에게 선포된 것은 분명 ‘평화’였는데, 궁전에 드나들 수 있는 박사들 때문에 야기된 것은 ‘재앙’이었습니다.

 

우리가 동방 박사들처럼 지식 엘리트도 아니요, 우리 인생 좌표가 권력과는 거리가 멀고, 우리 통장 계좌에 황금도 유향도 몰약도 없다면, 우리는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배부를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눅6:20~21)”

 

양 틈에 자는 자들에게 선포된 그리스도의 평화가, 고단한 일상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기원합니다. 평화는 권력도 황금도 지식도 심지어 주민등록증도 없는, 그래서 세상을 정복할 수 없어도, 그러나 세상에 정복되지 않는 목자들에게 선포되었습니다. 궁전에서도 불안한 헤롯이 아니라, 여물통에서도 평안한 아기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왕이 오신 자리는 궁전이 아니라 여물통입니다.

 

왕이신, 예수를 만나셨습니까? 어디에 계시던가요?

 

2015년 12월 12일이었습니다. 오전에 갓난 아기의 엄마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아이는 예정일보다 2개월 먼저 태어났던 미숙아인데, 이제 5개월입니다. 아이의 부모님은 베트남 사람들이고, 부모님 모두 비자가 없습니다. 등록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병원에 다니는 것도 쉽지 않아, 아이가 열흘 째 똥을 누지 못해 엄마 젖을 거의 먹지 못하는데도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교회 차로 베트남 엄마와 아기를 태우고, 김포 시내에 있는 병원에서 관장을 했더니, 아이가 금새 엄마 젖을 빨기 시작합니다. 아주 작은 도움을 주었고, 아기는 다시 엄마 젖을 먹습니다.

 

2022년 12월 16일이었습니다. 세 딸과 분리된 베트남이 고향인 엄마가 우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왔습니다. 왜 아이들을 만나지 못하게 하느냐고 우는 엄마에게, 법과 행정은 절차와 형평성을 들이댑니다. 아이들을 맡고 있는 기관장들이 기분 나쁘지 않도록 곡진한 목소리로 민원을 넣는 게 제가 요즘 하는 일입니다. 다행히, 대한민국 공무원 중엔 사람이 있습니다.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 조금이나마 사람 노릇합니다. 

 

별 거 아닌데,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능해서가 아니라, 겁박하는 세상 때문에 움직일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옛날 목자들같이, 제도 속에 들어오지 못하는 나그네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그네들과 계십니다. 예수님은 나그네들이 거하는 들판, 목자들이 치던 짐승들이 밤을 피하던 동굴같은 마굿간에 태어나셨습니다.

 

세상이 예수를 환대하지 않아, 갓 태어난 예수는 여물통을 요람삼았습니다. 마굿간 여물통으로 예수께서 오셨다는 건, 예수가 환대받지 못했다는 건, 세상이 예수를 초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세상으로 초대받아 오신 게 아니라, 초대장 없이 방문하셨습니다. 오늘, 예수가 세상에 오신다면 여전히 세상은 예수를 초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초대하지 않았는데, 우리 자리에 오는 이가 있다면, 그가 예수입니다.

 

초대하지 않았는데, 방문하는 이를 환대하는 건 위험합니다. 헤롯은 예수가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 줄 알아, 적대했던 거구요. 환대와 적대는 뒤섞여 있습니다. 초대하지 않았는데 방문한 이를 환대한다해도, 마음 한 켠엔 적대가 녹아있습니다. 예수를 맞이하는 우리 마음 속엔 환대(hospitality)와 적대(hostility)가 섞여 있습니다.

 

내 옆에, 가장 낯선 사람들 서 있는 자리로, 예수께서 오십니다. 초대받지 않은 이방인으로, 예수께서 오십니다. 미음 한 켠에 적대감이 여전하지만, 우리는 예수를 환대하려 합니다. 적어도 옛날 헤롯보단 나아야 하니까요. 헤롯이 감당하지 못했던 위험한 만남을 감수할 때 우리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됩니다. 사람 너머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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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읽으면 좋은 책

 

강남순, 『데리다와의 데이트』, 행서B, 제9장 환대:환대 너머의 환대, 편안함의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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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anna | 작성시간 15.12.14 아멘.
  • 작성자용감하게 명랑해 | 작성시간 15.12.2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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