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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성이 영성입니다 _ 마4:1~4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16.01.10|조회수139 목록 댓글 1

영성은,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요15:5) 예수님께서 약속하셨던 성령께서 내 안에 거하시고, 내가 성령 안에 거하는 것이 영성입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상태를 보통, 성령 임재 혹은 성령 충만이라 표현합니다. 성령 임재 혹은 성령 충만의 증거는 무엇일까요?


황홀경일까요? 입신의 경험일까요? 그럴 수 있습니다. 입신이나 황홀경 같은 이성과 의식 너머에서 일어나는 현상 역시 성령 임재와 성령 충만의 경험일 수 있습니다. 바울에게 이런 신비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길을 가다가 빛을 보았습니다. 신비한 빛이 바울의 눈을 멀게 했고, 사흘 동안 보지도 먹지도 못했습니다.(행9:3~9) 또 바울은 자신도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일을 겪기도 했습니다.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고후12:2) 성령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신비한 현상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방언을 하기도 하고, 보통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영을 보기도 합니다. 신비는 있습니다.


신비한 현상, 신비의 경험은 ‘시작’입니다. 신비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닙니다. 신비를 경험했다고 해서 구원이 완성되는 것도 아닙니다. 신비를 꼭 경험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과 사람을 위한 구원은, 경험된 신비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알아차렸든 아직 모르든, 이미 시작하셨습니다. 다만, 신비한 경험을 통해, 사람이 알아차리기 ‘시작’했을 뿐입니다. 


한 번 신비를 경험한 이들은, 다시 신비를 경험하고 싶어 합니다. 황홀경과 입신의 순간을 반복해서 경험하는 것이 성령 충만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것은 출발지로 되돌아가는 격입니다. 인생의 운전자가 전방을 주시하지 않은 채, 거울만 바라보고 운전하는 격입니다. 출발지에 서는 황홀한 경험을 했다면, 달려가야지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3:12)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겠다고 합니다.(빌3:14) 푯대는 어디에 있을까요.


예수님은 세례 받으실 때 ‘비둘기 같이’ 내려오는 성령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마3:16) 개천에 지나지 않는 요단강이 성전처럼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거룩한 곳’(행6:13)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오셨던 성령이, 예수를 이끄십니다. 성령께서 예수를 이끌어 ‘광야’로 가십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서”(마4:1)



보티첼리, '유혹을 받으시는 그리스도'



성령께서는 예수를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예수를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성령 임재 혹은 성령 충만의 증거는 어떤 상태에 관한 것이 아니라, 어디 있느냐에 관한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 속에 사는 사람은 ‘광야’에 있습니다.


광야엔 먹을 것이 없습니다. 광야엔 마귀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마귀를 만나십니다. 광야는 홀로 마귀와 맞짱을 떠야하는 외로운 곳입니다. 먹을 게 없는 광야에서 마귀는 약점을 파고들어 집요하게 공격합니다. 돌이 떡처럼 보이지 않느냐고 마귀는 속삭입니다. 생각보다 마귀는 무섭거나 거칠지 않습니다. 마귀의 말은 솔깃하고 달콤합니다.


먹을 게 없는 곳에서 뭘 먹고 살지 고민되는데, 고민에 빠져있는 사람에게 달콤한 마귀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 지점에서 사람들은 주저앉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말씀은 ‘떡’도 있어야 살 수 있다는 뜻이라고 해석해버립니다. 이렇게 해석할 때, 뜻은 온 데 없고 떡만 남습니다.


뭘 먹고 사냐면요, 광야에선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삽니다.(마3:4) 광야에선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음식을 먹고 삽니다.(왕상17:4) 광야에선 ‘만나’를 먹고 삽니다.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것을 먹고 삽니다.(신8:3) 뭘 먹고 살지 모르겠는 건 사람의 생각이요, 이전에 모르던 방식으로 먹이시겠다는 게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영성은 야성(野性)입니다.


성령께서 이끌고 가시는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는 광야에서 사십일을 먹지 못한다 해도 그 광야에 머물 수 있는 것이 성령 충만 즉 영성이요, 그래서 영성은 광야에서 머물 수 있는 능력, 즉 야성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광야로 이끄실 때, 염려가 생깁니다. ‘생활의 염려’가 왜 없겠습니까.(눅21:34) 광야로 나서기 전 염려하는 이에게 말씀하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마6:26~28) 하나님께서, 새와 꽃보다 우리를 더 귀히 여기시는데, 우리의 영성이 새와 꽃보다 나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새장 속의 새에게, 온실 속의 꽃에게 야성이 없듯, 광야에 서지 않는 사람에겐 영성이 없습니다.


야성이 영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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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문재연 | 작성시간 16.01.21 말씀 잘 듣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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