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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_ 눅11:1~13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16.02.14|조회수150 목록 댓글 0

우리 기도의 대부분은 부러워하는 것들의 나열입니다. 부러워하는 것이 기도의 내용입니다. 재벌이나 자본가를 부러워하면 돈을 기도하고, 권력자를 부러워하면 권력을 기도하고, 유명한 사람을 부러워하면 명성을 기도합니다. 무엇을 부러워하십니까?


예수님도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눅11:2~4)


기도의 내용을 보건대 우리가 부러워하는 것과 주님의 기도 사이에 간격이 있습니다. 우리는 좀처럼 ‘좋은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눅11:13) 아이가 인공색소가 잔뜩 들어간 사탕이 ‘좋은 것’인 줄 알고, 게임하기에 최적화된 스마트폰을 부러워하는 것처럼, 우리는 돈 많은 사람을 부러워하고 명성이 자자한 사람을 부러워하고 권력을 지닌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것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뜻과 다르기 십상입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은 ‘생선’이나 ‘알’인데 우리가 구하는 것은 ‘뱀’이나 ‘전갈’일 수 있습니다.(눅11:11~12)





‘뱀’이나 ‘전갈’은 사막에서 어렵잖게 볼 수 있는 것들이지요. 세례요한과 요한의 제자들은 사막에서 동굴을 파고 기도했던 에세네파(Essenes)로 추정됩니다. ‘뱀’이나 ‘전갈’은 세례요한과 그 제자들에게 위험할 뿐 소용없는 것들입니다. 사막에서 기도하면서 아무 소용없는 ‘뱀’이나 ‘전갈’을 달라고 기도하진 않았겠지요. 세례요한과 요한의 제자들은 사막에서 기도할 때, ‘생선’과 ‘알’을 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로마 황제와 귀족들이 지중해 별장에서나 구경했음직한 ‘생선’과 ‘알’은 참으로 부러운 것이면서 너무나 불가능한 것이지요. ‘사막’에서 ‘생선’과 ‘알’을 구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기도요,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가르친’ 기도였을 것입니다.(눅11:1)


그런데 하나님은 사막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생선’과 ‘알’을 주고자 하십니다. ‘좋은 것’을 주고자 하십니다. 사막에서 어떻게 ‘생선’과 ‘알’을 받을 수 있을까요? 사막에 물고기가 헤엄치는 강이 흐르고, 사막이 새들이 둥지 트는 숲이 된다면 ‘생선’과 ‘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막에 강이 흐르고 숲이 생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사35:1~2)


사막 같은 세상을 하나님나라로 바꾸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과 그 제자들이 기도했을 이상을 생각하며, 당신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며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되새기고, 그 뜻이 이루어질 것을 기다리는 것이 기도입니다.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눅11:2) 로마 황제의 이름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고, 점령하고 정복하여 이룩한 평화(Pax Romana)가 아니라 공평한 분배를 통하여 세워진 정의로운 나라가 땅에 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눅11:3) ‘잉여생산’으로 토지를 독점하고 자본을 축적하는 세상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에겐 사막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일용할 양식’으로 충족할 수 능력을 갖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빌4:11~13)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deptor)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눅11:4) 토지와 자본을 독점한 사람들에게 ‘빚’을 져 ‘죄’짐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빚을 탕감 받고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눅11:4) 사막 같은 세상에서 ‘시험’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부와 명성과 권력의 유혹을 이겨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마4:1~11)


사막 같은 세상이 하나님나라가 되고, 빚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자유를 얻고, 여러 유혹에 취약한 사람들이 예수님처럼 시험을 이길 수 있을까요? 진짜 이런 일이 생길까요? ‘그 간청함’이 있다면 가능하다 하십니다.(눅11:5~8)


또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기도는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고 하십니다.(눅11:11) 기도 첫 머리에 ‘아버지’를 부르는 이유입니다.(눅11:2)


‘아버지’에게 ‘간청’합니다. 내가 부러워하는 것이 정의와 공평과 자유여서, 사막 같은 이 세상에 강물이 흐르고, 폭염이 내리쬐는 이 사막에 숲이 우거지게 하소서. 진정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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