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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잔치는 시끄럽다 _ 눅14:1~24; 15:11~32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16.03.13|조회수439 목록 댓글 1

잔치 자리에 예수께서 초대받으셨습니다. ‘한 바리새인 지도자’가 예수를 초대한 것입니다.(눅14:1)


예수께서 만찬 자리를 둘러보시니, 와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 지도자’의 ‘형제’와 ‘친척’, 그리고 ‘부한 이웃’만 앉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잔치를 베푼 ‘바리새인 지도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눅14:12~13)


예수님께서 잔치 자리에서 찾아내지 못한 사람들, ‘몸 불편한 자들’, ‘저는 자들’, ‘맹인들’은 장애인들이지요.


잔치는 큰 집에서 해야 잔치가 아니요, 음식이 풍성해야 잔치가 아니요, 좋은 공연이 있어야 잔치가 아니요, 잔치는 사람이 있어야 잔치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기념하는 안식일 잔치에, 하나님께서 창조의 마지막 날 창조하신 사람들이 있어야 잔치입니다.


하나님께서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일부, 즉 ‘형제’와 ‘친척’과 ‘부한 이웃’만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 하신 것이 아니라, 장애인들과 ‘가난한 사람들’ 모두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잔치 자리에서 찾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 하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는 그 사람들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부한 자들’만 초대받았고, 부한 자들은 그 소유의 크기를 따지며 아랫목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눅14:8~9)


하나님의 창조를 기념하는 안식일 잔치는 모두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경쟁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장애인들과 가난한 자들이 없는 잔치는 잔치가 아닙니다. 가난한 자들과 장애인들이 없다면, 하나님의 창조를 기념하는 안식일 식사는 잔치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아들 예수를 보내셨지요.(요3:16)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창조된 모든 사람들이 함께 먹고 마시며, 하나님의 통치를 누리는 시공간입니다.


저 가난한 자들과 장애인들은, 돈이 없고 건강이 없기 때문에 일상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밭이 없고, 밭을 갈 소도 없고, 가정을 꾸릴만한 경제적·신체적 능력이 없어 일상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눅14:18~20) ‘하나님의 나라’는 경제적으로 신체적으로 핸디캡이 있어서 일상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까지 다 모여 ‘떡을 먹는’ 곳입니다. 또, ‘길과 산울타리가’에 있는 사람들, 즉 부정한 사람으로 분류되어 마을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까지 다 모여 ‘떡을 먹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지금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는 가난한 자들, 몸 불편한 자들, 맹인들, 저는 자들이 없기 때문에, 거기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 아닙니다.(눅14:15)


예배 중 ‘성만찬’을 나누는 것은 일상 중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배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 즉 부한 자나 가난한 자나 장애인이나 비장애인이나 내국인이나 외국인이나 건강한 사람이나 약한 사람이나 다 같이 똑같은 빵과 술로 성만찬을 나누며, 우리 일상 속에 ‘하나님의 나라’기 임하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초대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내 식탁에 초대하기로 결단하는 시간이 예배 중 기념하는 ‘성만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 장애인들, 또 길과 산울타리 가에 있는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모두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게 하십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내 경제적 수준이 부하든 가난하든, 내 건강 상태가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내 위치가 주류이든 비주류이든, 하나님은 나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기를 청하십니다.



렘브란트, '탕자의 귀향'



어쩌면 나는 구원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소원하지 않습니다.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 나보다 더 약한 사람, 나보다 더 주류에서 멀어진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을 불편해 합니다. 돌아온 동생을 위해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에게 분노하며 잔치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맏아들’같습니다.(눅15:28) 밭을 사고, 소를 사고, 가족을 돌보던 내 평온한 일상에, 일상을 살아 낼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 장애인들, 비주류의 사람들이 침입해 들어오는 것을 염려합니다. 익숙해져버린 일상을 지키고 싶다면, 그건 구원을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보다, 저기 저만치에 있으면서 내 일상 속에 안 들어오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돌아온 동생을 맞이하는 맏아들의 마음입니다.


내 마음은, ‘아버지’의 마음입니까, ‘맏아들’의 마음입니까?


내 고요하던 일상이 돌아온 동생으로 인해 침노당하고 시끄러워질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잔치는 불쾌할 수 있고, 잔치를 바라보는 마음도 시끄러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내 마음’도 있게 하소서.


천국, 잔치는 시끄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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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용감하게 명랑해 | 작성시간 16.03.2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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