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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난 _ 눅19:28~40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16.04.24|조회수210 목록 댓글 0

바다가 그러하듯, 공기가 그러하듯, 강물이 그러하듯, 토지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25:23) 토지의 소유권은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사람이 갖고 있는 등기는 하나님께서 그 소유권을 양도한 것이 아니라, 사용권을 인가한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토지의 경계를 함부로 옮길 수 없습니다. “그의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28:16)


그런데 아합이 왕궁 가까이에 있는 나봇의 포도원을 탐냅니다.(왕상21:1~2) 왕이라도 토지 소유권을 변경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왕이라도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면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 아합은 자기 욕심과 하나님의 뜻 사이에 긍긍합니다.


페니키아 공주였던 아합의 아내 이세벨은 이런 남편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신과 동급인 왕의 요청을 일개 백성이 거절한다는 것은 페니키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페니키아 공주였던 이세벨은 왕의 뜻이 곧 신의 뜻이라 여기고,(왕상21:7) 관제언론을 동원하여 신성모독의 죄를 조작해 나봇을 죽여 버립니다.(왕상21:8~14) 나봇의 포도원은 이렇게 아합의 것이 되었습니다. 아합은 하나님의 토지를 빼앗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토지가 약탈당하던 시절에 선지자 엘리사를 통하여 ‘예후’가 왕으로 지명됩니다.(왕하9:1~3) 예후가 왕으로 지명된 것을 듣고 ‘무리가 자기의 옷을 급히 가져다가...예후의 밑에 깔’았습니다. 백성들이 ‘나팔을 불며...예후는 왕이라’고 소리쳤습니다.(왕하9:12~13)


예후는 취임 직후, 이세벨의 아들 ‘요람’을 ‘나봇의 토지’에서 만나 ‘화살로 그의 염통을 꿰뚫’어 죽이고 ‘그 시체를 나봇의 밭에 던’집니다.(왕하9:21~26) 일개 왕에 지나지 않았건만 신이 되려했던 이세벨과 그 아들을, 예후가 심판했습니다.



지오토, '나귀 타신 예수'



예후의 발아래에 백성들이 ‘자기의 옷’을 깔았던 것처럼, 예수의 발아래에 사람들이 ‘겉옷’을 깔고 있습니다.(눅19:36) 위험천만한 장면입니다. 역모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옛날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했던 것처럼, 예수께서 역당의 우두머리가 되어 ‘강’을 건너 예루살렘으로 행진하십니다. 이제 다른 길은 없습니다. 충돌이 있을 뿐입니다. 추세(抽稅) 전문가인 유대의 왕들과 식민지에 파견된 로마의 총독과 정치권력에 포섭된 종교지도자들과의 일대 격돌을 이젠 피할 수 없습니다. ‘예수의 난’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난리가 총독과 왕을 몰아내는 ‘혁명’으로 발전할 수 있을까요? 혁명이 성공하려면, 예후가 이세벨의 아들을 죽였던 것처럼 예수는 로마 총독을 죽여야 합니다. 혁명군이 루이14세를 단두대에서 처형했던 것처럼, 예수는 헤롯 가문의 왕들을 베어야 합니다. 예수의 난이 혁명이 되려면, 예수는 유대의 왕들과 로마의 총독과 종교지도자들을 십자가에 처형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정치·종교권력을 처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제자들이 십자가를 져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7) 또 봉기한 군대가 지닌 무기는 칼 두 자루 뿐입니다.(눅22:38) 칼 두 자루는 난리의 수괴 예수를 처형하기 위한 역모의 물증이 될 뿐, 어떤 세력에게도 위협이 되진 않을 것입니다. 예수의 난은 진압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악한 사람들을 죽임으로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다 여기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악한 사람들을 위해 죽음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열고자 하십니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모두에게 햇빛이 비취듯,(마5:45)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을, 즉 선한 사람과 또 악한 사람까지 사랑하다가 그들을 위해 죽음으로 ‘혁명’을 완수할 수 있다고 여기십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공개처형 당하심으로 예수의 난은 진압됐지만, 예수의 혁명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교회를 이루어 ‘예수의 몸’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래서, 권력자들에겐 위험천만한 사람들입니다.


악랄하고 부패한 세상 너머,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이 ‘겉옷’을 깔아주며 예수를 찬송했지요.


그 예수를 믿는 교회는, 권력자들이 보기에 역모의 온상입니다. ‘헬 조선’이라 불리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다리는 교회는,(눅11:2) 세속 국가의 요시찰 대상입니다.


우리는 교회입니까? 교회라면, 진정 우리가 예수님의 몸이라면 빼앗긴 자뿐만 아니라, 빼앗는 자마저 사랑하겠습니다. 성공한 예후의 혁명이 아니라, 실패한 예수의 난을 도모하겠습니다. 교회가 일으키는 예수의 난으로 세상은 시끄러울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눅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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