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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_ 눅22:54~62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16.05.01|조회수212 목록 댓글 2

예수께서는 ‘생활의 염려’를 ‘방탕함’, ‘술취함’과 같은 종류라 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21:34)


생활 때문에 염려한다면, 방탕하여 술에 빠져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겁니다. 역시 ‘이생의 염려’를 ‘재물’과 ‘향락’과 나란히 두시며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씨가)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눅8:14)


‘생활의 염려’라 표현하든, ‘이생의 염려’라 표현하든 ‘염려’는 ‘방탕’, ‘향락’, ‘술취함’ 따위와 같은 수준의 죄가 됩니다.


염려하는 사람은 알콜 중독자와 탕자처럼, 깨어있지 않습니다. 종일 가수면 상태로 지냅니다. 염려하는 사람에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소리가 들려도 꿈속에서처럼 각색되어 버립니다.


베드로에게도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잡혀가신 후, ‘염려’의 변종인 ‘두려움’에 베드로가 감염되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에 감염된 베드로는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겠다던 자기의 말도,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라는 예수의 말도 기억나지 않았습니다.(눅22:33~34)




카라바지오, '베드로의 부인'



세 번째 예수를 모른다고 강변하고 있을 때에야, 소리가 들렸습니다. “닭이 곧 울더라”(눅22:60)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째 부인하자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베드로와 예수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눅22:61)


둘의 눈이 마주쳤을 때, 예수는 베드로에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지만, 베드로는 이제야 예수께서 하셨던 말씀이 들립니다. 말씀이 들리니 베드로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슬퍼하며 통곡합니다.(눅22:62) 통곡은 염려와 두려움이라는 악성 바이러스를 제압하는 백신이 됩니다.


사실 닭은 아무 때나 웁니다. 닭은 저녁에도 울고, 삼경(三更) 전후에도 웁니다. 닭은 저 울고 싶을 때 웁니다. 닭 우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이유는 잠들어 있기 때문이지요. 잠에서 깨어나면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닭이 울어서 깨나는 게 아니라, 깨어나니 닭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예수의 말씀이 생각났다기보다, 그보다 먼저 예수님의 눈빛을 보고 깨어났기 때문에 닭 우는 소리가 기억났던 겁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던 예수의 말씀과 어디든 예수를 따르겠다던 자신의 고백이 기억나면서, 두려움에서 빠져나오게 되었고, 밤 새 울었을 닭소리도 들려온 게지요. 예수와 눈이 마주쳤을 때, 베드로는 두려움에서 깨어났고 닭 우는 소리도 천둥소리처럼 재생되었습니다.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눅21:36) 기도하며 주님의 얼굴을 마주 대할 때, 깨어납니다. ‘생활의 염려’와 그 변종인 ‘두려움’에 기운이 막히지 않으려면, 깨어 기도해야겠습니다. 성경 속 예수를 만나고 그와 대화하며 기도해야겠습니다. ‘생활의 염려’와 ‘두려움’에 감염되지 않으려면, 성경 속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는 예수와 눈을 마주보아야 합니다. 그때, 천둥 같은 깨달음이 있습니다.


5월 1일은 노동자의 날입니다. ‘생활의 염려’는 노동자들이 빠지기 쉬운 죄입니다. ‘생활의 염려’는 근근이 하루를 살뿐 아무 것도 보장받을 수 없는 이 땅의 모든 노동자들이 빠져들 수밖에 없는 죄입니다만, 생활을 염려하는 사람은 알콜 중독자보다 결코 낫지 않습니다. 생활을 염려하는 것은 허랑방탕하여 주색에 빠져있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유연한 노동시장은 사탄이 조장하는 악한 시스템입니다. 이 거대한 사탄의 시스템 속에서는 염려하지 않으래야 않을 수 없습니다. 염려하는 죄를 짓지 않으래야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죄와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까마귀도 먹이시고 들풀도 입히시는 줄 알고,(눅12:22~31) 믿음으로 죄와 싸워야 합니다.(엡6:12)


예수는 사탄의 지배체제에 저항하시고, 자신의 길을 가셨지요.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좁은 길을 가셨지요. 염려하지 않았기에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가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며 길을 가자하십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길로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염려하는 자는 아무 때나 우는 닭소리마저 듣지 못하니,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염려하는 자는 미끼를 좇다가 미늘에 걸리지만, 믿는 자는 길을 가다가 깃발을 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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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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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권석기 | 작성시간 16.05.0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목사님 매 번 힘있는 말씀으로 위로와 용기주셔서 감사합니다 ~♡
  • 답댓글 작성자김영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6.05.02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도하고 읽고 만나고...열심히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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