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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계시는 하나님 _ 단6:1~28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16.07.03|조회수210 목록 댓글 0

느헤미야가 전해 주는 예루살렘의 상황입니다.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느1:2~3) 느부갓네살에게 파괴된 예루살렘은 복구되지 않았고, 남아 있는 사람들의 형편도 참혹했습니다. 예루살렘 마을에도, 예루살렘 사람들의 마음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성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보다는 하나님의 부재가 강하게 증언되고 있는 곳이 당시 예루살렘이었습니다.



Edward Poynter, <다니엘의 기도>, 1865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타버렸는데, 거기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니엘입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6:10) 다니엘은 하루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했었고, ‘삼십일 동안’에는 왕 외에 다른 신에게 기도하면 사형에 처하겠다는 어명이 내려진 이후에도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단6:7)


아시아뿐만 아니라 이집트마저 속국으로 삼아버린 페르시아 왕의 금령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사로잡혀 온 유다 자손’ 다니엘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폐허 위에 여전히 계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재가 증명되는 곳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치 않습니다. 부재 속 존재를 확인하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단6:23)


다니엘의 믿음은 맹목이 아니라, 지식과 지혜에 기반을 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신 까닭에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폐허 위에 계신다는 역설을 믿는 것입니다.(단1:17) 하나님은 바벨탑 꼭대기에서 신음하는 자들을 내려다보시는 게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의 무너진 돌 더미 아래에 깔려 신음하는 자들과 함께 계십니다. 오히려 황금으로 장식된 스랍이 호위하고 있던 지성소야 말로 하나님의 부재로 공허했던 곳이요, 황금이 벗겨지고 터만 남아있는 폐허야말로 하나님의 존재로 충만한 곳입니다. 다니엘이 ‘삼십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의 어떤 신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이유입니다.(단6:7,10) 하나님의 뜻은 페르시아 궁전의 음모로 작성된 조서에 적혀 있는 것이 아니라, 무너져 내린 돌 더미 사이사이에 씨앗처럼 심어져있습니다. 이것을 알고 믿는 까닭에 다니엘은 왕의 금령에 저항하며, 기도하기를 쉬지 않습니다.(살전5:17)


기도하며 심지어 ‘감사’했다고 합니다. 다니엘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며 감사하던 때는, ‘삼십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의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겠다는 ‘금령’이 내려진 직후였습니다.(단6:7~9) 다니엘이 이 와중에 무얼 감사했다는 건지, 감사의 내용이 적혀있진 않습니다. 다니엘은 지금 무엇에 대해 감사하고 있을까요?


다니엘의 기도는 권력을 향한 저항이었습니다. 다니엘의 기도는 악한 권력의 부당한 행사에 맞서는 것이었습니다. ‘삼십일’만 지나면 자연스레 누리게 될 종교의 자유를 기다리지 않고, 오늘 누려야할 자유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다니엘은 자유의 집행을 유예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스스로를 위한 자유를 집행하며, 자유를 억압하는 악한 권력에 저항하기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삼십일 동안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데 다니엘 한 사람은 여전히 자유를 누리고 있음에, 그 자유를 포기하지 않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았을까요?


왕의 금령을 어긴 다니엘은 ‘감사’의 염으로 기도하는데, 부당한 금령을 내린 왕은 밥도 넘기지 못하고 잠도 이루지 못합니다. “왕이...밤이 새도록 금식하고 그 앞에 오락을 그치고 잠자기를 마다하니라”(단6:18) 신이 되고자 하는 왕은 초조히 잠들지 못하고, 왕에게 저항하며 자유를 잃지 않은 내시 다니엘은 감사를 담아 기도합니다. 한낱 왕이 신이 되고자 할 때, 그는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배고프면 먹고 곤하면 잠들기 마련이건만, 왕은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합니다. 왕권을 신권으로 격상시키고자하는 어리석음 때문에, 인권마저 스스로 박탈해버린 셈입니다.



Peter Paul Rubens, <Daniel in the lion's den>, 1615



다리오 왕은 내시 다니엘이 사자굴 속에 여전히 살아있음을 확인합니다. 그리고는 고백합니다. “내 나라 관할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하지 않으실 이시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의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그는 다니엘을 구원하며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이라”(단6:26~27)


씨앗이 땅 속에 묻혀 있다고 해서 없는 게 아니지요. 성전이 무너졌다고 해서 하나님의 부재가 입증되는 게 아닙니다. 자유를 유예하지 않고 악한 권력에 저항하며 기도를 쉬지 않는 사람을 구원하시는 이,


그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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