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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 _ 마23:1~39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17.01.22|조회수166 목록 댓글 0

김목사는 종교지도자입니다. 저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고, 사람들이 저를 목사라 부릅니다. 교회에서도 목사라 부르고, 교회 밖 모임에서도 목사라 불립니다. 저는 목사라는 호칭을 사양할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목사라 불리는 순간, 저는 나이, 경력에 무관하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존중받고 예우 받습니다. 저는 목사라는 이름을 적절하게 사용하기를 좋아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목사와 그 역할이 비슷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준열하게 비판하십니다.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23:15)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23:27) 지금 여기에 예수님께서 오신다면, 김목사에게 하실 말씀들입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듯이, 목사가 예수를 따르는 것도 어쩌면 불가능한 건 아닐까요? 부자가 그 소유를 포기하기 어렵듯, 목사도 그 권위를 포기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권위를 포기하기 어려운 김목사에게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들은)...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23:6~7)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조금도 관대하지 않으신 예수님께서 김목사에게 관대하실 리 없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한 예수님의 일갈은 제 목을 겨누는 칼입니다.

 

지금 여기에 예수님께서 오신다면, 김목사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에겐 뭐라 하실까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23:3) 목사의 설교는 듣고 행하되, 목사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 하십니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주인공 포레스트가 달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3년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달리기만 하는데요, 달리는 포레스트를 보고 사람들이 함께 달리기 시작합니다. 말없이 길을 달립니다. 길이 막히면 다시 되돌아 달립니다. 침묵 중에 그저 길을 달리는 포레스트를 따라 사람들이 함께 달리는 장면이 기억납니다.

 

말이 없어도 내가 가는 길이 설교가 되면 좋겠습니다. 문자와 언어를 넘어선 성령의 역사가 있어서, 정교한 설교원고가 없어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길을 가면 좋겠습니다. 그만한 영성을 우리가 지니면 얼마나 좋을까요. 지금은 다만, 김목사의 행위는 본받지 말고, 김목사의 설교를 듣고 행하는 것이 성도들의 지혜겠습니다. 말하는 김목사에겐 흠이 많지만 듣는 성도들에게 지혜가 있어, 예수께서 가신길을 끝까지 달려가시길 부탁드립니다.

 

바리새인 중, 군계일학(群鷄一鶴)같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15:43)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은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존경받는 공회원이었다는 것은, 요셉이 바리새인이라는 뜻이겠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부터 제사장을 배출하는 사두개파는 오래도록 헬라 세력과 로마의 어용 종교인들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존경을 받지 못했거든요. 존경받는 공회원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아리마대 요셉은 바리새인이었겠습니다.

 

바리새인 요셉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의 시체를 로마 당국에 요청한 겁니다. 십자가 위의 시체는 서서히 썩으며 날짐승에게 쪼이거나, 혹은 매달린채 밤에 태워지기도 하면서 제국에 저항하는 이의 본보기로 전시되어야 하는데, 아리마대 요셉이 사실상 형집행 정지를 요청한 겁니다. 로마 제국에 대항한 반역자를 처형 중인데, 그래서 예수님을 근거리에서 따르던 제자들은 다 도망쳤는데, 그 때에 바리새인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요청한 것은 목숨 걸고 한 것입니다. 아무도 예수를 따르지 않고 따를 수 없는 때에 홀로,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공언하는 셈입니다.

 

바리새인 중에도 예수님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27:57) 종교지도자 노릇하는 김목사에게 롤모델이 있다면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관련해 다른 행적이 기록된 게 없습니다. 대단치 않았던 모양입니다. 다만, 마지막까지 예수의 곁을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예수의 죽음이 확실해진 순간까지,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의 제자였습니다. 죽으신 예수의 곁에 아리마대 요셉이 있습니다.

 

세월호 잠수사들이 있었습니다. 이미 죽은 아이들의 시체를 수습하기 위해 잠수사들은 목숨을 걸고 침몰한 세월호 선체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세월호 잠수사들은 시계 제로의 물속에서 온 몸의 감각과 손으로 선체를 더듬으며 물속 객실로 들어가 죽은 아이의 몸을 자신의 몸에 포개어 시신을 수습해 밖으로 나왔습니다. 잠수병에 걸릴 줄 알았지만, 자기의 나머지 인생을 걸고 잠수사들은 죽은 이의 곁으로 내려갔습니다. 이런 게, 소명입니다. 죽은 이의 곁을 지키는 것이 소명입니다.

 

뉴욕에서 있었던 911테러 때에, 무너진 건물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지기 위해 사람들이 달려 나오는데 무너진 건물을 향하여 달려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방관·경찰관들입니다. 폐허의 자리로 달려가는 것, 죽음의 자리를 향해 내 인생을 걸고 가는 것, 이게 소명입니다. 여느 바리새인처럼 인습과 관례를 따르지 않고, 죽은 자 예수를 끝까지 따르며 죽은 자의 곁을 지키는 것, 이것만 소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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