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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면입니까, 기각입니까 _ 민6:1~7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17.03.12|조회수84 목록 댓글 0

레위 지파의 사람들이 제사 업무를 봤습니다. 레위 지파 사람들은, 행진할 때에나 숙영할 때에나 전쟁할 때에나, 성막을 둘러싸고 성막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을 탐지하는데 집중했습니다. 그래서 레위인은 군역에서 면제되었고 훗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토지를 불하받지 않았습니다.

 

레위지파가 아닌 사람 중에 자원하여 제사 업무를 보고자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레위 지파에 속하지 않은 사람 중에 일시적으로 제사 업무를 볼 수 있도록 허락한 제도가 나실인 제도였습니다. 나실인은 제사 업무를 위해 구별된 사람이란 뜻으로, 비정규직 제사장이라 하겠습니다. 일정한 기간 동안만 나실인이 되어 제사 업무에 참여하고, 기간이 지나면 다시 일상으로 복귀해야 했습니다.

 

나실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에겐 두 가지 금령이 내려졌습니다. 첫째, 술을 마셔서는 안됐습니다. 술은 풍요의 상징입니다. 술은 식량 외에 향기를 생산할 수 있는 곡식이나 과일이 남아있는 땅에서만 생산되기 때문입니다. 포도주와 독주는 광야에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지요. 술을 마시지 말라는 것은 후에 들어가게 되는 풍요로운 가나안 땅에 살 때에 광야 생활을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둘째, 머리를 깎아서는 안됐습니다. 머리를 깎지 말라는 것은 장례 풍습과 관계된 것으로 추측됩니다.(6:6,9;19:27,28;14:1) 나실인으로 구별된 기간 동안에 가족 중에 장례가 있어도 이방 종교의 풍습을 따라 장례를 치르지 말라는 뜻이겠습니다.

 

, 술을 마시지 말라는 것은 문화에 관한 것이요, 머리를 깎지 말라는 것은 종교에 관한 것입니다. 농경 사회에서 정착민으로 안정된 일상을 살고 있을 때에라도 광야의 여정을 기억하라는 것이요, 다른 종교의 관습을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풍요로운 이집트 제국에서 노예였던 것처럼 다시 풍요로운 가나안 문화의 노예가 되지 말고, 이집트 제국을 지탱하는 거대한 신전 속 종교를 떠나 제단도 없고 형상도 없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끝까지 견지하라는 것입니다.

 

다문화·다종교 사회입니다. 가나안보다 매력적인 문화가 풍성하고, 이집트보다 다양한 종교가 혼재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나실인으로 서원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뭐라 말씀하실까요?

 

광야에서는 문화가 없습니다. 다양한 문화 속에서 우리가 추구해야할 문화는 탈문화입니다. 문화의 기원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의 족보에 소개됩니다. “유발..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두발가인..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4:21~22) 탈문화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요. 문명 속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사람들에게 탈문화는 유행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유행의 풍조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고, 속사람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탈문화의 현실적 방편입니다.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3:3~4) 우리 시대에 나실인은 자본의 이익을 위해 빠르게 변화하는 유행에 역행해야 할 것입니다.

 

광야에서는 신전이 없습니다. 다양한 종교 속에서 우리가 추구해야할 종교는 탈건축입니다. 여전히 성 전건축이라는 반신학적 용어가 남용되곤 합니다.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면서 건물로서의 성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임 공간을 성전이라 사칭하며 수백억, 수천억대의 건물을 짓기도 합니다. 수백억 수천억대의 건물을 지을 때엔 금융자본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짓는 게 아니라, 자본이라는 맘몬이 모임 공간을 마련해주신다면, 이건 우상입니다. 옛날 원시인들이 큰 바위와 큰 나무 앞에서 제사 드렸던 것처럼, 지금도 자본이 건축한 큰 건물 속에서 예배드리는 원시인들이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나실인이 있다면, 이방신이랄 수 있는 자본에게 의지 성전 건축하지 말라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별된 사람, 즉 거룩한 나실인으로 부르십니다. “너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니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19:2) 사람은 거룩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거룩하지 않습니다. 부정한 죄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못합니다.(3:23) 거룩해야 하지만 거룩할 수 없는 것, 이것이 사람의 운명입니다.

 

운명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하는 어떤 노력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종교, 문화, 정치, 경제 등의 방편으로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사람은 거룩할 수 없습니다. ‘오직 은혜로만 사람은 거룩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3:27)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사람만 거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을 거룩하게 보십니다.

 

옷이 행동을 규정합니다. 정장을 입고서, 짐승의 토한 것 위를 구를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은 운명의 족쇄를 끊고 거룩한 사업에 투신합니다.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처럼 살게 됩니다. 은혜를 입은 사람은 정의와 사랑을 위해 헌신하게 됩니다. 거룩한 나실인이 됩니다.

 

피청구인 박근혜 대통령을 파면한다” 20173101121분에 내려진 헌법재판소의 판결문입니다. 대통령이라는 이름은 국민이 제공한 것이어서, 국민이 제공한 대통령의 옷을 입은 자는 헌법의 가치들을 실천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것이어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입혀주신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자는 성경의 가치들, ,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문화의 유행을 거스르지 않고, 이방종교의 유혹을 뿌리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준엄한 판결문을 받게 될 것입니다.(고후5:10)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는 파면입니까. 기각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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